10월 21일 저녁 뉴스에 낯익은 미국의 북한 전문가 3명이 등장했다. 로버트 갈루치 전 미 국무부 북핵특사, 조지프 디트라니 전 6자회담 차석대표, 리언 시걸 미 사회과학연구위원회 동북아안보협력 프로젝트 국장이다. 한성렬 북한 외무성 미국국 국장과 장일훈 유엔주재 북한대표부 차석대사를 만나고자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 온 이들은 한국 기자의 질문에 친절하게 대답하는 등 한국 언론의 관심이 싫지 않은 듯했다. 북측도 마찬가지였다. 한 국장은 한국 기자들에게 동영상 촬영을 허락하며 여유를 부렸다. 북한 체제 특성상 한국 언론을 만나도 좋다는 사전 허락을 받고 온 듯했다.
북·미관계사 단골 메뉴 ‘트랙2’
북·미관계가 최악인 시점에 북한의 대미외교 책임자들과 과거 북·미협상을 직접 담당했던 미국 인사들이 만나는 것은 그 자체로도 큰 뉴스거리임이 분명했다. 북한이 올해 들어 두 차례 핵실험과 20여 차례 미사일 시험발사를 하자 미국의 한반도 정책 책임자인 대니얼 러셀 미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담당 차관보가 “김정은은 즉시 죽을 것”이라는 험한 말까지 해가며 강경하게 대응 자세를 취한 상황에서 모처럼 소통 창구가 열린 것이다.디트라니 전 차석대표는 회담을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간 뒤 10월 25일 미국의소리(VOA) 방송과 인터뷰에서 “북한이 9·19 공동성명으로 돌아갈 의지가 있는지 알아보는 데 초점을 맞춘 탐색적인 대화가 이뤄졌다”고 소개했다. 하지만 북측 반응은 예상대로였다. 북한은 자신들을 핵보유국으로 인정하고 평화협정을 논의하자는 기존 주장을 되풀이했다고 미국 측 참석 인사들은 전했다.
정부 간 대화를 대신해 미 전직 관료들과 북한 외교관들이 제3국에서 만나는 이른바 ‘트랙2(민간 차원)’ 대화는 북한 핵개발사, 특히 북·미관계사에 주기적으로 등장하는 단골 메뉴가 됐다. 과거 북·미 대화의 용사들이 노익장을 과시하고 나서는 ‘트랙2’는 그만큼 북·미 당국 간 대화가 경색돼 있음을 방증하기 때문이다.
갈루치 전 특사와 디트라니 전 차석대표, 시걸 국장은 일 년에 두세 차례 열리는 이 대화의 단골 등장인물이다. 이들은 과거 북·미 대화 경험을 토대로 북한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다는 점과 북한 문제는 어쩔 수 없이 외교와 대화로 풀어야 한다는 강한 신념을 가지고 있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이른바 미국 내 대북 대화파 내지는 비둘기파인 셈이다.
2014년 10월 미국 워싱턴 조지타운대 교수실에서 만난 갈루치 전 특사는 20년 전인 1994년 10월 북·미 제네바 합의를 이끌어낼 당시를 잊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20년 전) 북한 측 협상 대표였던 강석주 조선노동당 국제담당 비서를 지금 또 만난다면 ‘어떻게 하면 다시 협상이 진행되도록 할 수 있을까’를 함께 논의할 것”이라며 대화의 필요성을 재차 강조했다. 이어 “(북·미 대화가 교착상태에 빠진) 최근 상황은 매우 실망스럽다”면서 “미국은 북한에 진정성을 요구하고 있지만 나는 실용적이라 진정성보다 ‘좋은 협상(good deal)’이 중요하다고 본다”고 말했다.
그는 “20년이 지난 지금도 대화로 북한의 비핵화를 이룰 수 있다고 믿느냐”는 기자의 첫 질문에 “대답은 ‘아마도(maybe)’일 것이다. 지난해(2013년) 9월 스티븐 보즈워스 전 미 국무부 대북정책 특별대표와 함께 독일 베를린에 가서 북측 인사들을 만났을 때 내가 ‘핵을 포기할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그들의 대답도 ‘아마도’였다”고 말했다.
이젠 강석주도, 보즈워스도 고인이 됐다. 보즈워스는 사망 전 ‘동아일보’에 칼럼을 썼다. 첫 회인 2014년 4월 19일자에는 ‘생각하기에 고통스럽고 동의하기 어렵겠지만 우리에게는 평양에 대한 간여(engage)를 다시 시작해 핵무기 프로그램을 제거할 수 없다면 동결이라도 할 수 있는 당근과 채찍의 배합을 찾는 노력을 하는 것 외 대안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고 적었다. 말수가 적고 입이 무거운 보즈워스 전 대표와 달리 디트라니 전 차석대표는 비밀 회동에서 파악한 북측 인사들의 주장을 외부에 알리는 데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2015년 1월 18, 19일 싱가포르에서 당시 북핵 6자회담 수석대표였던 이용호 북한 외무성 부상(현 외무상)을 만나고 돌아온 그는 한국 기자들에게 “북한이 한미합동군사연습 중단의 대가로 핵실험 유예와 함께 핵탄두 소형화 노력의 중단도 함께 제안했다”고 알렸다. 북한이 미국을 향해 ‘핵탄두 소형화 중단’이라는 카드를 꺼낸 사실이 처음 알려진 것이었다.
“핵무기는 북의 생존 티켓, 포기 안 할 것”
미국 전문가들은 스스로 국제사회가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북한 측에 알리고 타이르는 일을 하고 있다고 믿는 듯했다. 디트라니 전 차석대표는 싱가포르 회동에서 “북한이 미국과 대화하려면 적어도 2005년 9·19 공동성명을 이행해 포괄적이고 검증 가능한 비핵화에 나설 의향이 있다는 점을 밝혀야 한다고 타일렀다”며 “대화에 필요한 신뢰를 쌓으려면 한국과는 이산가족 상봉을 위해, 일본과는 납북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양자 간 대화를 하라고 촉구했다”고 소개했다.
2005년 9·19 공동성명 당시 미국의 대북협상 특사를 맡았고, 버락 오바마 대통령 취임 이후 일관되게 북한과 대화가 필요하다고 강조해왔던 디트라니 전 차석대표는 “지난 20여 년 동안 미국은 북한과 비핵화 대화에 실패했고, 미국 내에는 북한이 핵을 포기할 것이라고 믿지 않는 북한 피로감(fatigue)이 만연해 있다”며 답답해했다.
오바마 행정부가 북핵 해결의 실마리를 잡지 못한 채 8년 임기를 끝낼 것이 확실해지면서 이젠 당국자들도 비슷한 인식을 공개적인 자리에서 표명하기 시작한 것 같다. 제임스 클래퍼 미 국가정보국(DNI) 국장은 10월 25일 뉴욕에서 열린 미국외교협회(CFR) 주최 세미나에서 “북한의 비핵화 가능성이 사실상 없는 만큼 핵 폐기가 아닌 동결로 북핵 정책의 목표를 낮춰 잡아야 한다”며 북한 비핵화라는 오바마 정부 방침과는 다른 이야기를 했다. 또 클래퍼 국장은 이날 “북한을 비핵화하겠다는 생각은 아마도 ‘가능성이 없는 것(lost cause)’이다. 핵무기는 그들의 ‘생존 티켓’이기 때문”이라며 “그래서 그들의 핵무기 능력을 단념케 하려는 생각은 애당초 성공 가능성이 없는 것이다. 아마도 우리가 희망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은 (북한 핵능력에 대한) 일종의 제한(cap)”이라고 말했다. 2013년 2월 북한의 3차 핵실험 이후 머리로만 고민해온 ‘북한 비핵화 회의론’을 공개적으로 드러낸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