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0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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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1993~94년 北·美 핵협상 당시 김정일 | “핵 없으면 조선도 없다”

탈북자 김길선 씨 김정일 육성 증언…“미국과 갈루치는 김정일에게 속았다. 이번에도 또?”

  • 김승재 YTN 기자·전 베이징 특파원 sjkim@ytn.co.kr

    입력2016-10-28 18: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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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대통령선거를 20여 일 앞둔 10월 21일과 22일 북한 당국자들과 미국 전직 관료들이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한 호텔에서 비공개회동을 가졌다. 북한에서는 한성렬 외무성 미국국 국장과 장일훈 유엔주재 북한대표부 차석대사 등 당국자 5명이, 미국에서는 민간 북한 전문가 4명이 참석했다. 미국 측 참석자는 로버트 갈루치 전 국무부 북핵 특사, 조지프 디트라니 전 6자회담 차석대표, 리언 시걸 사회과학연구위원회(SSRC) 동북아안보협력 프로젝트 국장, 토니 남궁 전 미국 캘리포니아대 버클리캠퍼스(UC버클리) 한국학연구소 부소장이다.

    미국의소리(VOA) 방송에 따르면 디트라니 전 차석대표는 “북한이 9·19 공동성명으로 돌아갈 의지가 있는지 알아보는 데 초점을 맞춰 대화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북측은 ‘핵개발은 한미 위협에 대한 억제력 확보 차원’이라는 기존 입장을 되풀이했다고 한다.



    1차 북핵 위기 당시 김정일 육성 기록

    이번 회동에 대해 한국과 미국, 중국 정부는 엇갈린 평가를 하고 있다. 한국과 미국 정부는 “별 의미를 두지 않는다”며 평가절하하는 반응을 보였다. 미 국무부는 “이번 회동이 정부 개입 없이 독자적으로 이뤄진 것”이고 “민간 차원의 ‘트랙2’ 대화는 공식적인 것이 아니다”라고 밝혔다. 우리 외교부도 이번 회동이 “미국 정부와 전혀 관계없는 것”이라는 미국 정부의 발표를 강조하면서 “한미 양국은 앞으로도 국제사회와 긴밀히 공조해 강력한 대북제재 및 압박을 지속해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이에 반해 중국 정부는 비공개 접촉이 북핵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될 거라며 환영했다. 루캉(陸慷)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10월 24일 정례 브리핑에서 “북핵 문제는 북한과 미국의 모순에서 발생했다”며 “미국과 북한 양국이 접촉과 협상을 많이 하도록 격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번 비공개 접촉에서 눈에 띄는 인물은 갈루치 전 특사다. 그는 1990년대 북·미 제네바합의 당시 미국 측 수석대표로 우리에게도 낯익은 인물. 93년 3월 북한이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를 선언하며 1차 북핵 위기가 발생했고, 미국은 북한과 세 차례 협상을 벌인 끝에 94년 10월 북한이 핵활동을 전면 중단할 것을 밝힌 ‘제네바 기본합의서’를 채택했다. 당시 북측 협상팀 대표가 강석주 외무성 부상이었고, 미국 측 협상팀 대표가 갈루치 특사였다.

    갈루치 전 특사가 다시 등장한 이번 북·미 회동은 20여 년 전 1차 북핵 위기 상황을 떠올리게 한다. 먼저 올해는 어느 때보다 북핵 위기가 고조된 한 해였다. 1월과 9월 각각 4차와 5차 핵실험으로 북한은 ‘1년에 두 차례 핵실험’이라는 유례없는 도발을 감행했기 때문이다. 북한은 또 미국 본토를 타격할 수 있는 미사일 발사도 올해 10차례 이상 실시했다. 20여 년 전 강석주 부상 대신 한성렬 국장이 대표팀 수장으로, 미국은 민간인 신분이긴 하지만 갈루치 전 특사가 수장으로 나선 점도 비교된다.

    이런 가운데 필자는 1993년과 94년 북·미 협상 당시 북한 지휘부의 속내를 엿볼 수 있는 인물을 취재했다. 북한의 핵·미사일 개발을 주도한 제2자연과학원(우리의 국방과학원과 유사)에서 기자로 활동하다 97년 탈북한 김길선 씨다. 그는 제2자연과학원 출판사의 정책편집부 기자로 17년간 근무한 여성이다. 제2자연과학원 출판사는 군수, 핵, 국방과학 부문에 종사하는 이들의 사상 세뇌와 정치 선동, 그리고 과학기술 향상을 위한 자료 보급을 주 임무로 하고 있다. 김씨는 이곳에서 당시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육성이 담긴 녹음 테이프를 수시로 듣고 이들의 교시를 담은 자료를 접하는 특권을 누렸다. 모두 최고지도자의 교시를 전파하려는 프로파간다 업무의 일환이었다. 



    “비핵화 선언=핵개발 다그치는 지령”

    김씨는 북한의 핵개발은 6·25전쟁 이후 시작됐다고 했다. 6·25전쟁 직후 ‘전쟁총화’(전쟁 평가)에서 김일성 주석이 전한 평양 교시에는 다음과 같은 취지의 내용이 담겼다고 한다.


    “(6·25전쟁 때) 미국 놈들이 핵을 쏘겠다고 위협하는 바람에 숱한 인민들이 남조선으로 향했다. 조선 공산주의자들의 역사적 사명인 남조선 해방을 하려면 핵무기를 보유한 미국을 몰아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선 우리가 핵을 가져야 한다.”


    이후 핵개발은 어떤 상황에서도 포기할 수 없는 북한의 지상명제가 됐다. 남한과 북한은 1991년 12월 31일 ‘비핵화 공동선언’을 채택했다. 한반도를 비핵화함으로써 핵전쟁 위험을 없애고 한반도와 아시아는 물론 세계 평화와 안전에 이바지한다는 취지였다. 하지만 이 무렵 조선노동당에서는 오히려 정반대되는 지시를 제2자연과학원에 하달했다고 한다.


    “당이 비핵화 선언을 하면 할수록 핵개발을 더 빨리 하라고 다그치는 당의 지령으로 알고 움직여라.”

    북한이 NPT 탈퇴를 선언하기 바로 전 달인 1993년 2월 평양에서는 조선노동당 중앙군사위원회가 열렸다. 김씨는 당시 회의 내용도 당 중앙위원회 군수공업부 종합과 사무실에서 모두 확인했다고 한다. 회의 내용이 모두 녹음된 테이프와 관련 문건을 살피며 각종 프로파간다 문건을 작성한 것. 이날 회의에서 김일성 주석은 “미국이 작심하고 자꾸 핵사찰을 들어오겠다고 하는데 이거 어떻게 대처해야 하나. 미국 놈들이 작심하고 달려들면 빠져나갈 재간이 없는데…”라고 말했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고 침묵이 이어지자 김정일이 벌떡 일어나 이렇게 외쳤다.


    “수령님, 핵은 곧 조선입니다. 우리가 핵을 가지지 못하면 조선이 없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조선이 없어지는 지구는 깨버리겠습니다.”


    당시 김씨는 녹음테이프를 듣다 김일성 주석이 질문을 던졌는데 한동안 침묵이 흐르며 아무도 대답하지 않은 데 대해 종합과 과장에게 “수령께서 질문하시는데 회의하러 모인 분들이 왜 아무 말씀도 안 하시는 겁니까”라고 물었더니 과장이 “지도자 동지보다 먼저 말하면 안 되지. 다 감옥 가는데…”라고 대답한 것도 기억난다고 덧붙였다.



    김정일, 핵협상 팀에 ‘저팔계 외교’ 주문

    강석주 팀과 갈루치 팀의 회담은 1993년 6월부터 시작됐다. 이 회담을 앞둔 어느 날 김씨는 ‘절대 비밀’이라고 표기된 문건을 받아 프로파간다 작업에 들어갔다. 이 문건은 오른쪽 상단에 ‘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 동지께서 1993년 몇 월 며칠에 주신 말씀’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었다. 김정일 교시가 담긴 ‘절대 비밀’ 문건은 평소에도 수시로 김씨 손에 떨어졌다. 이 비밀 문건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갈루치 일행과 북·미 회담을 앞둔 당시 강석주 부상에게 ‘저팔계 외교’를 펼칠 것을 요구했다. 저팔계 외교란 “겉으로는 어리석은 척, 우둔한 척, 모르는 척하면서 실제로는 실속과 실리를 다 챙기는 외교. 얻어먹을 것은 다 얻어먹는 외교”라는 게 김씨의 설명이다. 김정일은 또 미국 팀을 상대로 “연막전술을 펼칠 것도 강조했다”고 한다.

    북·미 제네바합의는 1994년 10월 21일 최종 타결됐다. 며칠 뒤인 24일 제2자연과학원에서는 30돌 축하 기념행사가 열렸다. 이 행사에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지시로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축하문’이 전달됐다. 축하문에는 북·미 회담을 앞두고 제2자연과학원에서 실시한 ‘로켓 발사’(김씨는 ‘화성 5호’로 기억하고 있는데 ‘화성 7호’일 가능성도 있다)가 성공함으로써 제네바합의 타결에 도움을 줬다고 치하한 내용이 담겼다.

    이 축하문에서 김정일은 북·미 제네바합의 타결에 대해 “미국과 싸우면서 제2 조국해방전쟁(6·25전쟁) 승리와 맞먹는 대승을 거뒀다”고 표현했다. 미국으로부터 최대한 얻어내면서도 핵개발은 핵개발대로 할 수 있는 합의를 이룬 데 대해 격찬한 것. 김씨는 1990년대 북·미 제네바합의는 미국이 북한에게 철저히 속은, 실패한 회담이었다고 규정했다. 그러면서 “지금 시점에 당시 주인공인 로버트 갈루치가 왜 또 등장해 북측과 접촉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20년 넘게 속아왔으면 됐지, 또 얼마나 더 속으려고 그러는지 모르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美 정보수장 “북, 핵포기 가능성 없다”

    이런 가운데 최근 미국 정보당국 수장이 한반도 비핵화를 목표로 하는 미국 정부의 원칙에 반하는 발언을 해 파문이 일었다. 제임스 클래퍼 미 국가정보국(DNI) 국장은 현지시각으로 10월 25일 뉴욕에서 열린 한 세미나에서 “북한이 핵을 포기할 가능성은 없다. 현실적으로 핵능력을 제한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말했다. 클래퍼 국장은 북한이 핵무기를 포기할 것으로 보는지를 묻는 질문에 “그것은 아마도 가능성이 없는 것”이라면서 “핵무기는 그들의 생존 티켓”이라고 답했다. 클래퍼 국장은 또 “아마도 우리가 희망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은 북한의 핵능력에 일종의 ‘제한(cap)’을 두는 것”이라면서 “이마저도 고분고분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이기에 중대한 유인책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클래퍼 국장의 발언이 파문을 일으키자 미 국무부는 “미국 대북정책의 목표는 검증 가능한 비핵화를 달성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천영우 전 대통령비서실 외교안보수석도 클래퍼 국장의 발언에 동의하고 있다. 10월 26일 국립외교원 주최 토론회에서 천 전 수석은 “현 상황에서 북한의 비핵화는 별로 가능성이 없음이 틀림없다”며 “북한의 핵개발 의지와 국제사회의 비핵화 의지 간 대결에서 국제사회가 졌다”고 말했다. 두 사람의 발언 모두 김길선 씨의 증언, 즉 ‘핵은 곧 조선’이라는 김정일의 발언과 김정일이 북·미 제네바합의 팀에게 직접 주문한 ‘저팔계 외교’ 등에 비춰보면 북한 핵의 현실을 냉정하게 평가한 것으로 보인다.

    말레이시아에서 북한과 미국이 접촉한 직후 있었던 북·중 간 접촉도 눈길을 끌었다. 10월 24일부터 27일까지 류전민(劉振民) 중국 외교부 부부장이 북한을 방문한 것. 중국 외교부는 “류전민 부부장이 북·중 국경공동위원회 중국 측 수석대표 자격으로 방북해 박명국 북한 외무성 부상과 함께 제3차 회의를 공동주관했다”고 밝혔다. 북한과 중국은 양국 국경 유지 및 관리와 관련해 2011년부터 정기회의를 하고 있는데 이러한 정기교류 차원의 방북이란 설명이다. 하지만 북한 핵실험에 대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대북제재를 놓고 미국과 중국이 조율하는 현실에서 류 부부장이 북측과 북핵 관련 의견을 나눴을 개연성이 높다는 관측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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