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승은 목이 마르지 않으면 물을 한 방울도 마시지 않는다.
- 출처 미상
올여름 기록적인 폭염의 여파인지 10월 중순까지도 마치 초가을처럼 낮에는 여전히 더웠다. 그런데 10월 하순 어느 날 아침, 밖으로 나서자 나도 모르게 몸이 움츠러든다. 이처럼 갑자기 늦가을로 접어들면서 겨울 채비를 하게 생겼으니, 사계절이 있는 우리나라가 살기 좋다는 말에 쉽게 공감이 가지 않는다.
수분 섭취는 음식물로도 충분
가을이 깊어지고 겨울이 다가오면 특히 여성은 피부에 부쩍 신경 쓴다. 여름이 덥고 습하기는 하지만, 땀 덕분에 피부 관리가 저절로 되는 측면이 있다. 그런데 가을과 겨울은 날씨가 추울 뿐 아니라 건조해 피부에게는 시련기다. 아침저녁으로 씻은 뒤 기초화장품(보습제)을 충분히 발라주지 않으면 ‘촉촉한’ 피부를 기대하기 어렵다.피부에 보습제를 바르는 것만으로는 뭔가 부족하다. 그래서인지 이맘때면 여기저기서 물을 충분히 마셔서 몸속 수분을 보충해야 한다는 조언이 들린다. 특히 ‘하루에 물 여덟 잔은 마셔야 한다’ 또는 ‘하루에 물 2ℓ는 마셔라’ 등 물의 양까지 정해주기도 한다. 물 한 잔이 250㎖라고 하면 사실 이 둘은 같은 얘기다(250㎖×8=2000㎖=2ℓ).
‘하루에 물 여덟 잔’ 예찬론자에 따르면 충분한 수분 섭취가 피부에만 좋은 게 아니라고 한다. 물을 충분히 마셔야 체내 노폐물을 깨끗하게 배출할 수 있고 변비도 예방할 수 있다고 한다(염소똥은 수분 함량이 낮다!). 또 물로 배를 채우니 간식이나 야식 유혹에도 더 잘 견딜 수 있단다(물론 칼로리는 없으므로 뇌를 속이는 것이지만). 수돗물을 믿을 수 없어 매일 2ℓ짜리 생수를 한 병씩 사 먹는다고 해도 커피 반 잔 정도의 가격밖에 안 되니 부담도 적다.
그런데 이렇게 좋은 ‘하루에 물 여덟 잔’ 건강법에 이의를 제기하는 이들도 있다. 그들의 반론에 따르면 물은 ‘목이 마를 때’ 마시면 된다. 한여름에 계속 밖을 돌아다니거나 축구 같은 격렬한 운동으로 땀을 많이 흘려 갈증이 심할 때는 여덟 잔이 아니라 열여덟 잔도 마실 수 있지만, 요즘처럼 기온이 떨어져 가만히 있어도 목마를 일이 없으면 일부러 마실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이런 진영을 대표하는 사람이 미국 인디애나대 의대 소아과 교수인 애런 캐럴 박사다. 그는 2009년 동료 레이첼 브리먼 박사와 함께 집필한 책 ‘내 남친은 발 사이즈가 크다’에서 여러 가지 잘못된 건강상식을 폭로하며, ‘하루 물 여덟 잔’ 조언도 비판했다. 이 책에 따르면 이런 세간의 상식은 1945년 나온 한 발표가 왜곡된 결과다.
당시 미국 국립연구위원회의 식품 및 영양 부서는 ‘성인은 하루에 2.5ℓ의 수분을 섭취해야 한다’는 지침을 발표하면서, ‘필요한 수분의 대부분은 하루 동안 먹는 음식에 들어 있다’고 덧붙였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뒷문구가 사라지고 앞문구의 소수점 뒤 숫자도 사라지면서(그나마 다행이다!) ‘하루에 물 2ℓ를 마셔야 한다’는 ‘건강상식’이 널리 퍼졌다. 이 왜곡된 조언을 따르자면 음식으로 섭취하는 수분과는 별도로 물 2ℓ를 마시게 되는 셈이다.
이를 지적한 캐럴 박사 등은 “물을 좋아하는 것이 잘못됐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하루에 물을 반드시 여덟 잔 이상 마셔야 한다는 주장의 과학적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고 강조했다. 오히려 “정말로 걱정해야 하는 것은 수분을 과다하게 섭취하는 경우”라고 덧붙였다. 즉 갑자기 물을 너무 많이 마시면 수분중독 증상이 일어나 심하면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실제 외국에선 ‘물 많이 마시기 대회’ 같은 행사에서 사망자가 나온 일이 몇 번 있다.
수분중독은 물을 지나치게 마실 때 나타나는 증상을 일컫는데, 체액이 묽어져 나트륨 같은 이온 농도가 떨어지면서 경련이 생기고 혼수 상태에 빠질 수 있다. 조현병 환자 가운데 병적으로 갈증을 느끼는 사람은 수분중독으로 사망에 이르기도 한다.
사실 혈관이나 신장에 이상이 있는 경우가 아니라면 하루에 물 여덟 잔 정도를 추가로 마신다고 해서 큰 문제가 생기지는 않는다(화장실을 몇 번 더 가는 게 귀찮기는 하겠지만).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한 번에 한두 잔씩 몇 시간 간격을 두고 나눠 마시는 경우에 대한 얘기다. 만일 고지식한 사람이 하루 종일 바쁘게 보내다 밤에 문득 ‘그러고 보니 오늘 물을 한 잔도 안 마셨네’라며 한 번에 큰 생수통 한 병을 다 비운다면 자칫 큰일이 날 수도 있다.
체액 균형 유지하는 정교한 메커니즘
갈증은 배고픔과 함께 동물이 생존하는 데 꼭 필요한 욕구다. 그래서 동물은 이런 욕구를 충족하고자 최선을 다하고, 일단 충족되면 더는 이를 추구하지 않는다. 그런데 유독 인간은 이런 기본 욕구를 거스르는 행동을 즐기는 종인 것 같다. 배가 고파도 안 먹고(다이어트나 단식), 배가 불러도 숟가락을 놓지 않으며(폭식), 목이 말라도 물을 마시지 않고(물만 먹어도 살이 찐다는 사람), 목이 안 말라도 물을 잔뜩 마신다(하루 물 여덟 잔 실천자). 그래서 만물의 영장인 걸까.
필자는 생리학 교재를 보며 동물의 몸에서 갈증과 배고픔을 느끼고 충족하는 메커니즘을 어느 정도 알게 됐고, 그 정교함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리고 이런 욕구에 거스르는 ‘부자연스러운’ 행동은 결코 건강에 좋을 리 없다는 결론에 ‘자연스럽게’ 이르렀다. 이번 글의 주제는 물이므로 갈증의 생리학에 대해서만 잠깐 생각해보자.
먼저 여성에게는 좀 미안한 얘기지만, 여성보다 남성이 더 ‘촉촉한’ 성이다. 디 언그로브 실버턴 미국 텍사스대 교수가 쓴 대학교재 ‘인체생리학’을 보면, 우리 몸에서 수분이 차지하는 비율이 여성 50%, 남성 60%로 나온다. 여성은 체지방 비율이 상대적으로 높기 때문이다. 수분 분포를 보면 전체 체내 수분 중 세포내액이 3분의 2, 세포외액이 3분의 1이다. 세포외액, 즉 세포 밖에 있는 물 가운데 4분의 3은 간질액(세포 사이 공간을 채우는 체액)이고, 4분의 1은 혈장(혈액에서 혈구를 뺀 부분)이다. 그런데 세포 안팎의 체액과 혈액은 맹물이 아니다. 나트륨, 칼륨 같은 각종 이온과 포도당, 단백질 등 수많은 생체분자가 녹아 있다. 그 농도가 좁은 범위에서 통제되고 있는데, 이를 벗어나면 문제가 생긴다.
그런데 수분은 우리 몸에서 계속 빠져나간다. 숨을 내쉴 때도 나가고(겨울에는 날숨에 포함된 수증기가 바로 응결되는 걸 ‘코앞에서’ 목격할 수 있다), 피부에서도 수분이 증발한다. 또 소변과 대변으로도 나간다. 따라서 만일 음식에 수분이 전혀 포함돼 있지 않다면(기름을 섞어도 촉촉하게 만들 수 있으니) 아무리 영양분이 풍부하고 칼로리가 높아도 어느 순간부터는 먹을 수조차 없게 된다. 참고로 사람은 체내 수분의 12%가 손실되면 죽는다.
따라서 체내 수분을 적정 수준으로 유지하는 건 생존에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만큼 생명체의 수분 섭취 욕구는 정교하게 조절되고 있다. 예를 들어 갈증이 나서 물을 몇 모금 마시면 바로 갈증이 사라져 더는 마시지 않게 된다. 그런데 사실 막 마신 물은 아직 위에 들어 있을 뿐 혈관에 흡수되지 않은 상태다. 즉 체액은 여전히 부족하다. 마신 물이 흡수돼 체액에 완전히 반영되는 데는 50분 정도가 걸린다. 만일 이만큼의 시간이 흘러 체액 균형이 회복될 때까지 갈증이 사라지지 않아 계속 물을 마신다면 난리가 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때에 이르기 전, 미리 물 마시기를 중단한다.
미래의 물 부족까지 대비하는 생체시계
우리는 아직 이 메커니즘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하고 있다. 대략적인 그림만 알려졌을 뿐 모르는 부분이 더 많다. 그런데 미국 캘리포니아대 샌프란시스코캠퍼스(UCSF) 연구자들이 9월 29일 영국 학술지 ‘네이처’에 이에 대한 새로운 발견을 발표했다. 동물실험을 통해 체액 균형을 되찾을 양만큼 물을 마시면 더는 갈증이 느껴지지 않게 조절하는 스위치를 찾았다는 것이다. 연구자들은 생쥐에게 하룻밤 동안 물을 안 줘 갈증을 느끼게 만들면 뇌에 있는 뇌궁하기관(SFO)의 신경세포가 격렬하게 반응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런데 물을 마시자마자 신경세포들이 잠잠해졌다.
다음으로 연구자들은 좀 짓궂은 실험을 했다. 목마른 쥐에게 짠물을 준 것. 실험쥐들은 짠물이라도 허겁지겁 마셨고, SFO의 신경세포도 곧 만족한 것 같았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신경세포가 다시 날뛰었다. 짠물은 체액의 이온 농도를 높여 물을 안 마셨을 때보다 오히려 더 위험하게 만들 수 있다. 이러니 신경세포가 다시 목이 마르다는 신호를 격렬하게 보내는 것이다. 즉 SFO는 체액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마시는 물의 양뿐 아니라 이온 농도까지 탐지하는 고성능 센서다.
한편 이 학술지에는 갈증에 대한 또 다른 논문도 실렸다. 역시 흥미로운 내용이다. 이에 따르면 우리는 시간대에 따라 ‘심리적’ 갈증을 느끼기도 한다. 즉 현재 체액이 균형을 이뤄도 목이 마를 때가 있다는 얘기다. 잠자기 직전이 그렇다. 잘 생각해보면 자기 전에 물 한 잔을 마시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발견할 것이다. 캐나다 맥길대 연구자들은 역시 동물실험을 통해 이런 갈증이 수면으로 긴 시간 수분을 섭취하지 못할 것을 아는 우리 몸이 미리 수분을 섭취하고자 만든 적응반응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 연구에 따르면 생쥐도 사람처럼 자기 전 갈증을 느껴 물을 마신다. 연구자들은 생쥐에게서 그런 행동을 하게 만드는 신경회로를 밝혀냈다. 여기에는 뇌에서 일주기리듬(생체시계)을 조절하는 시교차상핵(SCN)도 포함돼 있었다.
이런 실험 결과들은 동물의 몸이 체액 균형을 포함해 항상성을 유지하고자 얼마나 세심하게 신경 쓰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따라서 신경계질환이 있는 경우가 아니라면 우리 몸의 신호에 따라 행동하는 게 건강을 유지하는 쉽고도 확실한 길일 것이다. 목이 마르지도 않은데 하루에 물을 여덟 잔이나 마신다는 건, 뇌에 있는 정교한 갈증 회로에 대한 실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