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최승호 감독의 ‘자백’이 제17회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여러 부문을 수상할 때만 해도 사실 조심스러웠다. 정부기관의 문제점을 짚고, 찾고, 따라가는 내용이 포함돼 있어서다. 영화 한 편을 상영하는 게 영화제의 운명과도 연관될 수 있다는 학습효과가 있었기에, 국가정보원(국정원)이라는 기관 이름이 버젓이 드러나는 이 영화가 과연 안전하게 개봉할 수 있을까 우려스러웠다. 다행히 10월 개봉 소식이 전해졌고 작게나마 상영관을 잡아 상영에 이를 수 있었다.
문제는 영화 ‘자백’ 속 상황보다 어느새 현실이 더 스펙터클하고 재미있어졌다는 사실이다. 영화 ‘자백’은 공무원 간첩사건에 관한 영화다. 아니 좀 더 엄밀히 말하자면, 탈북한 화교 출신 서울시 공무원 유우성 씨가 국정원에 의해 간첩으로 내몰린 사건에 대한 추적이자 기록이며 재구성이다. 영화 제목이기도 한 ‘자백’은 유씨를 간첩으로 만드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자백이 강압과 강요, 공포 분위기 속에서 만들어진 거짓이었음을 말하고 있다. 거의 유일한 근거인 여동생의 증언을 받아내고자 국정원은 무려 170일간 여동생을 국정원 중앙합동신문센터에 가뒀다. 결국 여동생은 오빠를 간첩으로 거짓 고변한 죄책감을 안은 채 영구추방된다.
‘자백’은 최승호의 장기가 잘 살아 있는 작품이다. 장르적으로 보자면 ‘자백’은 다큐멘터리다. 그런데 최승호는 언론인으로서의 장점을 최대한 발휘한다. 진실을 추구하고자 어떤 장애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그 사실을 찾아간다는 얘기다. 잘 알려졌다시피 그는 퇴직 언론인이다. 하지만 회사를 떠났다고 언론인으로서 정체성까지 잃은 것은 아니라고, 그는 영화 곳곳에서 강렬하게 말하고 있다. 직장에 몸담고 있을 때와 같은 조직력이나 자본력이 없다고 취재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한국, 중국, 일본, 태국을 넘나들며 그는 추적한다. 바로 진실을 말이다.
‘자백’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두 개로 압축된다. 하나는 이 모든 일의 책임선상에 있는 김기춘 전 대통령비서실 비서실장이나 원세훈 전 국정원장이 모르쇠로 일관하는 장면이다. 심지어 원 전 국정원장은 섬뜩한 미소까지 남긴다. 또 하나는 이미 꽤 오래전 간첩사건에 휘말려 인생의 나머지 부분을 모두 날려버린 재일교포 할아버지를 찾아가는 장면이다. 사건을 조작한다는 것은 말하자면 누군가의 인생을 완전히 짓밟는 일이다. 결국 언론인이 진실을 추구한다면 그것은 공명심이 아니라 바로 그 한 사람의 삶을 되찾아주는 일이라는 것을 잘 보여주는 장면이다.
영화 ‘자백’의 광고 문구 중 하나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 대한민국에서 일어났다! 이것은 모두 실화다!’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국정원 일쯤은 사소하게 여겨질 만큼 너무나도 말도 안 되는 일이 10월 내내 터지고 있다. 최순실 씨 국정 개입설이 설이 아니라 사실로 밝혀지고, 대통령이 사과까지 하는 지경에 이르자 안타깝게도 ‘자백’이 다룬 일쯤은 꽤나 그럴듯한 일이었음을 다시 깨닫게 된다. 이 정도 상황에서 국정원의 간첩조작쯤이야, 너무도 우스운 거짓이자 위조였던 셈이다.
지난 5개월 동안 과연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아니 우리는 지난 4년 동안 대체 무엇을 알고, 또 모른 채 살아온 것일까. 그럼에도 누군가는 진실을 좇고, 사실을 재구성하려 뛰고, 또 일련의 성과를 작게나마 얻었음을 보여주는 영화가 바로 ‘자백’이다. 그리고 이젠 정말 누군가의 책임 있는 자백을 들어야 할 때가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