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광지 개발, 축제 등 관광산업이 대부분의 지방자치단체에서 생존을 넘어 번영을 약속하는 분야로 취급받고 있다. 이른바 ‘뜨거운 양철지붕’에 비견될 만큼 특정 이슈가 생길 경우 전 국토와 국민이 온통 소용돌이에 휘말리는 형국이고 보면 비좁은 땅덩어리, 먹고 살기 힘든 우리네 현실에서 IT(정보기술)를 위시한 문화콘텐츠 산업, 관광산업이 고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전략산업으로 급부상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특히 주 5일제 근무 도입, 삶의 질 향상과 관련한 가치관의 변화, 여가산업의 발달, 온라인 네트워크와 오프라인 교통망의 비약적 발달 등으로 관광은 특정 계층의 전유물이 아닌 모든 사람들이 누리는 ‘웰빙 상품’으로 일반화되고 있다. 필자의 경우에도 최근 몇 년 사이 학회 활동과 연수 등 이러저러한 이유로 선진관광을 가까이에서 지켜볼 기회가 많았다.
최근 우리 사회의 흐름이자 화두로 떠오른 ‘웰빙’의 한 부분이 관광 분야에 해당한다면, 관광을 즐기는 소비자나 관광 인바운드에 기여하는 관광상품 생산자 모두 관광입국의 새로운 틀거리를 만드는 데 지혜를 모아야 할 것이다. 사실 1970~80년대 산업화에 진력하던 우리의 부모세대 대부분은 여름 한철 모래찜질과 물맞이 행사로 여가를 즐기고, 모닥불에 햇감자와 옥수수로 먹거리를 대신하면서도 ‘레저’와 ‘웰빙’을 어엿하게 치러내지 않았던가.
국내 소비자와 글로벌 입맛에 맞는 상품 개발 시급
그런데 21세기는 혁명적인 속도로 이전 밀레니엄과 다른 ‘전혀 새로운’ 코드를 양산하고 있다. 라디오에서 컬러텔레비전으로, 그리고 컴퓨터 단말기와 페이저, 인터넷과 모바일로의 비약적 성장이 불과 10여년 사이에 이루어졌다. 관광상품의 성장 환경도 급물살을 타며 변화하는 추세다. 예상한 대로 흐름은 철저하게 소비자가 원하는 방향에 맞춰지고 있다. 필자는 도시 전체가 문화재 덩어리인 유럽 제국들 저마다의 풍요로운 태도와 자세를 미주알고주알 늘어놓을 처지도 아니고, 그렇다고 우리가 가야 할 관광입국의 방향을 제시할 필요까지는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관광’과 ‘웰빙’ 이전의 문제, 그러면서도 우리가 예의주시해야 할 우리네 관행과 다른 사실을 본 대로 적어 공감을 유도하고 싶다. 물론 관광에 대한 소회는 소설책을 읽고 난 느낌과 궤를 같이하는 것이어서 제각각일 수 있겠다. 하지만 혹자에겐 사소하게 비치기도 할 문제일지언정 나로서는 일종의 글로벌 관광시대를 사는 원칙이라 여긴 것이다. 몇몇을 열거해본다.
먼저 미국의 옐로스톤 국립공원, 페트리파이드 공원, 그래시아 공원 등과 같이 인간(관광객)과 자연(관광물)을 분명히 구분해야 관광 요인이 극대화한다는 사실이다. 상혼이 개입된 종합백화점식 진열은 좋은 관광물이 될 수 없다는 점이다. 도로에 동물보호 철책을 조성하는가 하면, 도시에서는 차량보다 보행자가 언제나 우선이다. 캐나다의 경우 시민들의 자발적 봉사에 의해 투어리즘 센터가 운영되고 있으며, 국경일은 캐나다를 세계 관광객에게 알리는 절호의 기회로 각종 축제행사가 진행된다.
오스트리아의 구프스타인, 인스부르크 다운타운이나 이탈리아 밀라노의 진열장은 영업이 끝난 뒤에도 불이 꺼지지 않아 세계의 유명 상품을 아이쇼핑할 수 있다. 이탈리아는 오만함이 느껴질 정도로 문화재를 원형 그대로 방치(?)하고 있으며, 스위스는 산속 곳곳에 집과 도로와 관광시설물이 산재해 있으나 환경과 관광을 위해 고도의 자연활용술로 위장(?)하고 있다.
융프라우 정상에 이르는 땅 속에 수직으로 개설된 100m 길이의 엘리베이터는 기술력이 인간의 의지와 맞물린 합작품이다. 프랑스의 자존심이기도 한 루브르박물관은 일본인 가이드와 달리 한국인 가이드의 출입을 엄격하게 통제하고 있다. 한국 문화재 반환 문제는 아랑곳하지 않고 일본인 관광객의 수를 의식해서라는 진단이다. 이는 프랑스에 대한 단순한 적개심만으론 해결될 일이 아니다. 관광은 관광대상물 이전에 관광에 대한 ‘선진의식’이 선행돼야 소기의 목표에 다가갈 수 있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바로 이것이 전부라는 자존’과 ‘안심하게 보여주려는 배려’나 다름없다. ‘웰빙’인들 어찌 다르겠는가.
최근 우리 사회의 흐름이자 화두로 떠오른 ‘웰빙’의 한 부분이 관광 분야에 해당한다면, 관광을 즐기는 소비자나 관광 인바운드에 기여하는 관광상품 생산자 모두 관광입국의 새로운 틀거리를 만드는 데 지혜를 모아야 할 것이다. 사실 1970~80년대 산업화에 진력하던 우리의 부모세대 대부분은 여름 한철 모래찜질과 물맞이 행사로 여가를 즐기고, 모닥불에 햇감자와 옥수수로 먹거리를 대신하면서도 ‘레저’와 ‘웰빙’을 어엿하게 치러내지 않았던가.
국내 소비자와 글로벌 입맛에 맞는 상품 개발 시급
그런데 21세기는 혁명적인 속도로 이전 밀레니엄과 다른 ‘전혀 새로운’ 코드를 양산하고 있다. 라디오에서 컬러텔레비전으로, 그리고 컴퓨터 단말기와 페이저, 인터넷과 모바일로의 비약적 성장이 불과 10여년 사이에 이루어졌다. 관광상품의 성장 환경도 급물살을 타며 변화하는 추세다. 예상한 대로 흐름은 철저하게 소비자가 원하는 방향에 맞춰지고 있다. 필자는 도시 전체가 문화재 덩어리인 유럽 제국들 저마다의 풍요로운 태도와 자세를 미주알고주알 늘어놓을 처지도 아니고, 그렇다고 우리가 가야 할 관광입국의 방향을 제시할 필요까지는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관광’과 ‘웰빙’ 이전의 문제, 그러면서도 우리가 예의주시해야 할 우리네 관행과 다른 사실을 본 대로 적어 공감을 유도하고 싶다. 물론 관광에 대한 소회는 소설책을 읽고 난 느낌과 궤를 같이하는 것이어서 제각각일 수 있겠다. 하지만 혹자에겐 사소하게 비치기도 할 문제일지언정 나로서는 일종의 글로벌 관광시대를 사는 원칙이라 여긴 것이다. 몇몇을 열거해본다.
먼저 미국의 옐로스톤 국립공원, 페트리파이드 공원, 그래시아 공원 등과 같이 인간(관광객)과 자연(관광물)을 분명히 구분해야 관광 요인이 극대화한다는 사실이다. 상혼이 개입된 종합백화점식 진열은 좋은 관광물이 될 수 없다는 점이다. 도로에 동물보호 철책을 조성하는가 하면, 도시에서는 차량보다 보행자가 언제나 우선이다. 캐나다의 경우 시민들의 자발적 봉사에 의해 투어리즘 센터가 운영되고 있으며, 국경일은 캐나다를 세계 관광객에게 알리는 절호의 기회로 각종 축제행사가 진행된다.
오스트리아의 구프스타인, 인스부르크 다운타운이나 이탈리아 밀라노의 진열장은 영업이 끝난 뒤에도 불이 꺼지지 않아 세계의 유명 상품을 아이쇼핑할 수 있다. 이탈리아는 오만함이 느껴질 정도로 문화재를 원형 그대로 방치(?)하고 있으며, 스위스는 산속 곳곳에 집과 도로와 관광시설물이 산재해 있으나 환경과 관광을 위해 고도의 자연활용술로 위장(?)하고 있다.
융프라우 정상에 이르는 땅 속에 수직으로 개설된 100m 길이의 엘리베이터는 기술력이 인간의 의지와 맞물린 합작품이다. 프랑스의 자존심이기도 한 루브르박물관은 일본인 가이드와 달리 한국인 가이드의 출입을 엄격하게 통제하고 있다. 한국 문화재 반환 문제는 아랑곳하지 않고 일본인 관광객의 수를 의식해서라는 진단이다. 이는 프랑스에 대한 단순한 적개심만으론 해결될 일이 아니다. 관광은 관광대상물 이전에 관광에 대한 ‘선진의식’이 선행돼야 소기의 목표에 다가갈 수 있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바로 이것이 전부라는 자존’과 ‘안심하게 보여주려는 배려’나 다름없다. ‘웰빙’인들 어찌 다르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