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요? 차림새가 원래 이래서…. 편한 옷을 입어야 공부가 잘되거든요.”
초여름 햇살이 강하게 내리쬐는 날, 신록이 우거진 고등과학원 캠퍼스에서 강석진 교수(43)를 만났다. 티셔츠와 반바지 차림에, 책이 가득 든 배낭을 멘 모습은 고루한 ‘교수님’의 이미지를 한참 벗어나 있었다.
그런 강교수를 따라다니는 수식어는 축구광, 문학소년, 괴짜 수학자, 톡톡 튀는 젊은 과학자 등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별명으로 본다면 취미생활과 인생을 즐기는 수학자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자신의 연구 분야에 대한 프로정신만큼은 어느 학자라도 압도할 만큼 강한 학자다.
“자기가 하고 있는 일, 그리고 앞으로 해야 할 일에서 최고라는 평가를 받는 일이 가장 중요합니다. 자기 일은 제대로 해놓지도 않고 다른 일을 통해 긍정적인 의미의 과학자가 되려고 해서는 안 되겠죠.”
고차원 ‘양자군 표현론’ 학계 주목
공식 외우기에 치중하는 우리나라 수학교육의 현실 때문인지 많은 사람들은 수학이 딱딱하고 어려운 학문이자 일상과 동떨어진 상관없는 분야의 학문으로 인식하고 있다. 수학을 갖고 논다(?)고 소문난 강교수를 사람들이 더욱 별나게 보는 이유이기도 하다. 강교수에게 수학이란 도대체 어떤 의미일까.
“잠에서 깨어나면서 본능적으로 하는 시계 보기부터 하루 일정을 세우고, 체중을 재고, 지하철을 타는 모든 인간행동이 수학에 바탕을 두고 있어요. 게다가 컴퓨터, 기상 예측, 주식투자, 위성방송, 여론조사 등 좀더 전문적인 분야까지 수학과 무관한 인간활동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강교수는 수학의 실용성을 넓고 높게 평가한다. 그러면서도 수학 자체의 아름다움을 강조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저는 수학의 쓸모에 대해선 관심이 없습니다. 음악이나 미술작품을 좋아하는 데 특별한 이유가 없듯이 그저 수학의 아름다운 모습에 반했을 뿐이지요. 예술작품을 감상하듯 수학의 아름다움을 만끽하고 있습니다.”
‘추상대수학’이라는 분야를 전공하고 있는 순수 수학자다운 말이다. 서울대 수학과를 졸업한 강교수는 미국 예일대학에서 석사 및 박사 학위를 받았고, 미국 노트르담대학 조교수와 서울대 부교수를 지낸 ‘화려한’ 경력의 소유자다. 1992년 완전결정이론을 공동 개발해 수리물리학의 격자모형이론을 수학적으로 증명했고, 미국수학회에서 편찬한 대학원 수학교재를 공동 집필하는 등 지금까지 대수학 관련한 50여편의 논문과 책을 펴냈다.
최근에는 ‘양자군 표현론’이라는 고차원의 수학이론을 레고블록과 테트리스 게임에 빗대 설명함으로써 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수학 논문에 레고블록과 테트리스 게임이 등장하다니 도대체 무슨 얘기일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차원’과 ‘기저’의 개념을 알아야 한다.
먼저 우리가 알고 있는 차원에 대해 생각해보자. 일반적으로 1차원은 직선, 2차원은 평면, 3차원은 공간, 4차원은 공간+시간이라고 하는데 수학에서 차원은 공간상의 한 점(데이터)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하는 벡터(vector)의 개수를 말한다. 여기서 벡터는 크기와 방향을 함께 나타내기 위해 사용하는 화살표와 같은 개념이다.
기저란 공간을 표현하기 위한 방법의 가짓수를 뜻한다. 수학에서는 무한차원이 존재할 수 있는데, 무한차원 공간을 표현하는 방법의 가짓수를 수학적으로 어떻게 만들어내느냐가 바로 강교수의 연구과제다.
축구 마니아, 만능 스포츠맨으로 통하는 강교수는 자신의 책 '축구공위의 수학자' '수학의 유혹'을 통해 수학의 보편성을 전파해왔다.
즉 레고블록과 테트리스 게임에서 높이와 밑면의 길이가 각기 다른 육면체 블록을 제대로 쌓으려면 중력과 공간을 고려해 형태를 맞출 수 있는 공간을 찾아야 하듯, 무한차원 공간의 기저를 계산하는 과정에서도 마치 블록처럼 맞는 경우의 수를 찾아낼 수 있다는 의미다. 이런 방법으로 무한차원 공간의 기저를 계산해내면 이를 순수 수학의 다른 분야에 응용할 수 있다.
주 특기 갖고 있어야 진짜 ‘수학선수’
잠깐 동안의 전공 설명이 이어졌지만 그다지 아름다워 보이지 않는다. 눈치를 챘는지 강교수가 뼈 있는 충고를 던진다.
“아! 먼저 수학의 아름다움을 알기 위해서는 수학의 언어를 알아야 합니다. 수학의 참된 모습을 발견하고자 한다면 수학이 어렵다고 불평하지 말고, 언어를 먼저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자세가 중요하지요.”
카리스마 넘치는 눈빛으로 전공 이야기를 하는 강교수는 수학과 사랑에 빠진 ‘기인’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자신도 수학만을 외곬으로 파고들기엔 갖고 있는 재능이 너무 많다는 것을 알아챘나 보다.
그는 2002년 수학자다운 정교한 필치로 ‘축구공 위의 수학자’라는 책을 펴내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게다가 뛰어난 축구선수. 스스로 실력 부족을 통감해 포기했다고 둘러대지만 어린 시절 한 달 급식비를 빼돌려 축구공을 사 결식아동이 됐던 적이 있을 정도로 축구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 지난해에는 축구를 하다 갈비뼈가 부러져 의사한테서 석 달 동안 축구 금지처방을 받고 하늘의 무심함(?)을 원망한 적도 있단다.
고차원 수학이론을 게임에 빗대 설명한 것처럼 축구와 수학 사이에도 뭔가 연결고리가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가 생각하는 축구와 수학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축구선수는 끊임없는 훈련을 통해 자기 기술과 주 특기를 개발하고, 실전에서 이를 자유자재로 써먹을 수 있어야 합니다. ‘수학선수’도 마찬가지죠. 자기 주제를 찾아서 이론을 발전시키고 새로운 정리를 만들어내야 합니다.”
그는 “축구영웅 마라도나가 왼발 하나로 세계를 제패할 수 있었던 이유는 끊임없는 연습을 통해 자신만의 슛 동작을 창조했기 때문이다”며 “수학공식도 무조건 외우는 것이 아니라 연구하고 고민해서 익힌 뒤 습관처럼 사용할 수 있어야 진짜 자기 것이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자신의 전공 분야를 확실하게 정복한 전문가이면서도 좋아하는 일에 대해 끊임없는 관심과 열정을 쏟는 모습. 이것이 바로 강교수가 발산하는 가장 큰 매력이며 새로운 시대 학자의 모델이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