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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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나라로 떠난 미술 여행

천재 작가 박이소 심장마비로 요절 … 한·미 미술계에 뚜렷한 족적 남기고 쓸쓸한 생의 이별

  • 김민경 기자 holden@donga.com

    입력2004-06-17 12: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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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늘나라로 떠난 미술 여행

    2003년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에 출품된 박이소의 ‘2010년,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 10선’.

    박이소라는 한 미술작가의 요절 사실이 6월6일 뒤늦게 알려졌다. 올해 46살. 일반인들에게 박이소(본명 박철호)는 지난해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에 출품한, 특이한 이름의 작가 정도로만 알려졌지만, 1990년대 이후 한국 미술이 너무나 큰 빚을 지고 있는 작가다. 경기도 파주에 있는 기독교 묘지에서 추모식을 치르고 돌아온 미술계 지인들은 비탄에 잠겨 누구도 박이소에 대해 차분하게 ‘미술적인’ 설명을 달지 못했다.

    “박이소 없이 우리가 미술을 할 수 있을까요?”(김선정, 아트선재센터 부관장)

    “박이소 없는 한국 미술이란 걸 생각해본 적이 없었는데….”(정헌이, 미술평론가)

    그의 미술계 동료들을 더욱 큰 충격과 깊은 슬픔에 몰아넣은 까닭은 요절했다는 사실뿐이 아닌 듯했다. 박이소가 4월28일 혼자 있다 갑작스런 심장마비로 숨을 거두었다는 것, 유족인 누나가 주검을 화장하고 6월2일에야 장지를 구해 유골을 안치했다는 것, 이메일을 보내도 답장이 없어 궁금해하던 동료들이 그가 세상을 떠난 지 한 달이 훨씬 지나서야 알게 됐다는 이 모든 상황이 죽음을 더욱 비극적인 것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동료들 한 달 지나서 사망 사실 알아



    하늘나라로 떠난 미술 여행

    박이소의 요절로 한국미술계는 대표 작가 한 사람을 잃었다.

    박이소는 서울 청담동에서 누나 부부와 함께 살고 있었으나 출입문이 따로 달린 2층 작업실에서 혼자 작업에 몰두해왔기 때문에 유족들이 미술계 동료들을 찾아 알리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늘 야윈 몸 때문에 맑은 눈이 더 크게 보였던 작가는 사망한 날도 혼자 작업실에서 음반과 포도주 병을 옆에 두고 의자에 앉은 채 숨을 거둔 것으로 알려졌다.

    박이소와 절친했던 이영철 교수(계원조형예술대·기획자)는 “몸이 감당하지 못할 만큼 너무 빨리, 너무 많은 것을 꿰뚫은 작가였다. 그는 이미 노인의 깨달음을 얻었다. 그런 의미로 보자면 ‘늙어서 죽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교수는 작가가 90년대 한국 미술의 지형을 바꿔놓은 작가이자 이론가였으나 육체가 그 같은 부담을 질 수 없다는 점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늘 뒤에 서 있으려 했다고 덧붙인다. 그런 이유로 “박이소는 엄청나게 시니컬하게 보이긴 했지만 실제로 동료나 후배들에게 섬세하고 다정다감한 사람이었다”고 기억했다.

    어려서부터 자주 ‘천재’라는 말을 들을 만큼 명민했지만 잦은 병치레에 시달린 몸은 자신의 삶을 예술가로 규정짓도록 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박이소는 종종 예술을 양호실에 비유하기도 했다.

    “남들처럼 일하고 돈벌고 하는 방식에는 전혀 적응이 안 되니, 이런 보호구역에 들어가서 약간 아픈 척하면서 적당히 뭉개 보려고 (작업을) 하는 게 아닐까요. 저는 예술의 영역이 비정상적인 사람들을 위한 보호구역이나 양호실 같다고 생각합니다.”(‘포럼a’ 인터뷰)

    그는 어디로든 ‘떠나기 위해’ 홍익대학교에서 졸업장을 받았고, 뉴욕의 프랫 대학원에서 회화를 전공했다. 1982년부터 94년까지 뉴욕에 머물며 박모-익명, 아무나라는 의미-라는 이름으로 33회의 크고 작은 전시에 참여했다. 뉴욕 주 예술재단기금과 연방예술기금을 수상했고, 뉴욕시의 공공미술 작가로 선정됐으며 일종의 대안공간인 ‘마이너 인주어리(Minor Injury)’를 직접 운영하기도 했으니, 뉴욕의 제3세계 작가 중에는 단연 스타가 된 셈이었다.

    미국에 머무는 동안 자신의 작업은 “미국에서 활동하는 한국인으로서 ‘다르기의 게임’에 중독되어 있다”고 표현할 만큼 한국적인 정서를 뿜어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서양인들의 동양 취미에 부합하기 위한 이국적이고 ‘아름다운’ 이미지와 거리가 멀었다.

    하늘나라로 떠난 미술 여행

    박이소가 미국에서 만든 작품들. ‘자본=창의력’(1986), ‘차라리 메주가 되자’(1985), ‘무제’(1986), ‘역사’(1990)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그는 대학원을 졸업할 무렵, 추수감사절에 외국인을 초대해 저녁식사를 함께 하는 교회의 자선 프로그램에 신청해 저녁을 먹고 와서는 사흘간을 굶고, 검은 밥솥을 긴 줄로 묶어 자신의 목에 매달아 브루클린을 걸어다니는 가학적 퍼포먼스를 감행한다.

    이것은 이후 그의 미술적 태도를 설명한다. 구별이 안 되는 한국과 미국의 액체인 간장과 콜라를 붓에 찍어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간장통에 야구방망이를 절여넣기도 한다. 촌스러운 명조체로 쓴 ‘자본=창의력’이란 작품에서는 ‘독일의 조셉 보이스의 그림을 내가 번역했다’고 써넣기도 한다.

    박이소는 미국이 제3세계 국가에 허용한 문화적 시혜를 받으며 스타작가가 되었으나 여느 소수민족이나 주변부 국가의 작가처럼 그것으로 성공할 마음이 없었다. 작가는 서양미술의 제1규칙인 ‘남과 다르기’를 따르면서, 미국이 허락한 한계를 정면돌파할 작정이었다.

    미국 스타작가 포기하고 돌연 귀국

    당시 한국은 민중미술이 미학적으로 급격히 퇴보하는 현상을 보이고 있었고 제도권 미술은 ‘모더니즘’을 심각하게 오해하면서 요령부득한 ‘벽지’ 그림들을 찍어내고 있었다. 미술전문지에 민중미술과 한국의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날카로운 비평을 기고하면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박이소는 작가로서 성공적인 미국 생활을 갑자기 접고 한국으로 돌아온다.

    이영철 교수는 “지독한 향수병이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는 이유였다. 그곳에서 할 일이 많다고 생각해 무척 말렸다. 한국 미술제도가 너를 죽일지도 모른다고까지 말했는데 결국 돌아오더라”고 말한다.

    박이소의 귀국은 한국에서 새로운 시작을 알린 사건이었다. 그를 기점으로 한국 미술은 민중미술과 모더니즘을 새롭게 발견하게 되었으며, 그 맥락에서 미술을 ‘언어’로 설명하려는 시도가 이어지고 개념적인 미술과 비평이 시작되었다. 이전까지 미술은 그저 마음으로 ‘느끼는’ 것으로 여겨졌다.

    한편으로 그의 작품에선 한국적 도상(圖像)들이 걷히고 전 지구적인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은 훨씬 강화된다. 가장 최근작으로 베니스 비엔날레에 출품한 ‘2010년,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 10선’이 적당한 예가 될 것이다. 작가는 서울에 살면서 미술의 소재로 공사장에서 쓰는 ‘아시바(비계)’나 합판, 콘크리트와 석고보드 등을 즐겨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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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냥 풀' (1988).

    그는 무엇인가를 높이 세우고 번듯하게 성취하기 위한 인간의 노력에 대해 지극히 회의적이었다. 오히려 임시로 쓰는 건축 재료나 구조에서 ‘삶의 너절함’과 ‘완성에 대한 집착이 없는 경지와 헐렁한 매력’을 느꼈다.

    2002년 에르메스 미술상을 수상하고 2003년 베니스 비엔날레에 나가면서 대중적인 인지도를 얻었지만, 현실 개혁을 예술가의 운명으로 생각했다는 점에서 박이소는 늘 재야의 작가였다. 작업 외에 무슨 일을 하느냐는 한 기자의 질문에 숨쉬기 놀이, 배추벌레 놀이(방을 굴러다니는 것), 집 보기 놀이(집 천장과 바닥, 벽을 순서대로 바라보는 것)를 한다고 대답했다. 미술을 뺀 삶은 그에게 숨쉬는 것 이상의 의미를 띠지 못했다.

    “박이소는 20년이라는 시간 동안 한 인간이 성취하기엔 너무 많은 일들을 해놓았다. 그처럼 창조적이고 밀도 있는 작가를 우리가 다시 보긴 어려울 것이다.”(이영철 교수)

    그의 마지막 유작은 8월21일부터 시작되는 부산 비엔날레 현대미술전에서 공개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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