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광사 전경
전에 법정 스님과 감로암에서 국수를 먹었던 일도 떠오른다. 불일암과 감로암은 이웃해 있다. 감로암 비구니 스님들이 국수를 먹는 날에는 법정 스님도 모시곤 했다. 나그네는 불일암에서 법정 스님과 함께 감로암으로 건너가 들깻가루를 탄 고소한 국수를 맛있게 먹었던 것이다. 지금도 그때가 잊혀지지 않는 것은 감로암의 국수 맛보다는 젊은 법정 스님의 칼날 같은 인상이 더 강하게 남아 있기 때문이다. 법정 스님은 ‘잘 먹었다’는 의례적인 말을 생략한 채 “국수 대접 받았으면 됐지 ‘차 드시고 가시라’는 인사까지 받기는 번거롭고 미안하다”며 나그네에게 조용히 자리를 뜨자고 했던 것이다.
송광사 6세 사주 … 스님 문집에 20여편 茶詩 남겨
현재 감로암에는 비구 스님들이 살고 있는 모양이다. 비구 스님 한 분이 산책 삼아 산길을 내려가고 있다. 나그네는 감로암 원감국사 비 앞에서 충지 스님의 다시를 한 수 중얼거려본다.
감로암 어귀 약수.
원감국사는 전남 장흥 출신으로 속성은 위씨. 9세부터 공부를 하여 17세에 사원시(司院試)에 합격했고, 19세에는 춘위(春 )에 나아가 장원급제하여 영가서기로 부임했다. 이후 사신이 되어 일본으로 갔다가 돌아와서 벼슬이 금직옥당에 이르렀다. 29세에 출가하여 주로 교학을 탐구하여 삼중대사(三重大師)가 되고, 수선사에 이르러서는 원오국사 회상에서 참선정진을 하게 된다. 이때는 원나라 장수 흔도( 都)가 탐라를 정벌한 뒤 수선사도 군량미 명목으로 세금을 내게 되었는데, 원감국사는 원나라 세조에게 청전표(請田表)를 올려 빼앗긴 논밭을 되돌려 받는다. 이를 계기로 세조는 국사를 흠모하게 되어 초청하지만 거듭 거절하다가 마침내 원경에 도착하여 빈주(賓主)와 스승 대접을 받는다. 귀국할 때는 세조에게서 금란가사와 벽수장삼, 흰 불자 한 쌍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국내로 돌아온 국사는 여러 절을 거쳐 원오국사의 추천으로 수선사 제6세 사주가 된다. 국사는 입적에 이르러 문인들에게 “생사는 인생의 일이다. 나는 마땅히 가리니 너희는 잘 있거라”라는 말을 남겼다.
나그네가 지금 보고 있는 스님의 비는 열반한 지 22년 만에 문인 정안(靜眼) 등이 세웠으나 병화로 파괴돼 지금으로부터 200년 전에 시안(時安), 찬현(贊玄) 등이 중건했다고 한다.
문득 스님의 시 한 편이 다선일여(茶禪一如)의 경지에 든 스님의 내면 풍경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바람 지나간 뜰은 빗자루로 쓴 듯/ 비 갠 경계와 만물은 다투어 곱기만 하다/ 보이는 것마다 작은 누 한 점 없나니/ 온몸으로 늘 깊은 선에 잠겨 있다네(風過庭除如掃 雨餘景物爭鮮 觸目都無纖累 全身常在深禪).
스님은 선정에 잠겨 있다가 목이 마르면 차솥에 찻물을 넣고 솔방울에 불을 붙여 손수 차를 달였으리라. 스님에게 차 한 잔은 심선(深禪)의 맛이 아니었을까.
☞ 가는 길
남해고속도로에서 송광사 나들목으로 나와 송광사 산문을 지나면 왼편 농막 위쪽으로 5분 거리의 산길 끝에 감로암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