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국이 끝난 후 복기를 하고 있는 이창호 9단(왼쪽)과 이세돌 3단
제7회 LG배 세계기왕전 결승 5번기에서 이세돌 3단이 이창호 9단을 꺾었다는 사실은 바둑계에 ‘충격과 공포’ 그 자체였다.
이창호 9단이 누구인가. 지금까지 세계대회 결승에 16번 올라 15번을 우승한 ‘불패 신화’의 주인공이다. 그가 결승에서 기록한 패전은 1999년 제1회 춘란배 결승 3번기에서 조훈현 9단에게 2대 1로 역전패한 것이 전부다. 물론 그럴 리야 없겠지만, 당시 이창호 9단이 진 최종판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어 현지에선 “배부른 제자가 자기 때문에 가난해진 스승에게 일부러 져준 게 아니냐”는 말이 나돌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때까지 이창호 9단은 3판이든 5판이든 ‘번기(番棋)’로 이뤄지는 그 어떤 세계대회에서도 패한 적이 없어 ‘번기의 왕자’로 불리고 있었다. 이창호 9단은 ‘반상의 지존’으로 불릴 만큼 막강한 실력을 갖춘 고수다. 특히 형세 판단이 탁월하고 종반전에 강세를 보이는 바둑이라 그에게 한 판 이기기도 쉽지 않은데 장기전인 3번기나 5번기임에랴.
그런데 이세돌 3단이 5번기에서 3대 1로 당당히 이겼다. ‘떠오르는 태양’ 이세돌 3단이 ‘중천의 태양’ 이창호 9단을 이겼다는 점도 충격이었고, 이창호 9단이 5번기에서 졌다는 점도 충격이다. ‘브레이크 없는 벤츠’ 이창호 9단에게 드디어 이세돌이라는 브레이커가 등장했다는 점도 충격이다. 그리고 이 브레이커가 이제 고작 스무 살의 앳된 청년이라는 점은 공포다.
당분간 이창호-이세돌 각축전 예상
한국 바둑 팬들은 이창호 못지않은 또 한 명의 걸출한 스타 탄생에 환호했지만 중국, 일본 바둑계로선 죽을 맛이다. 특히 ‘타도 한국’의 기치를 내걸고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중국의 처지에선 한숨을 내쉴 만한 일이다. 세계 정상 정복 일보 직전에서 번번이 이창호라는 철(鐵)의 수문장에 걸려 좌절을 거듭하고 있는 그들은 최근 이렇게까지 체념 섞인 말을 내뱉은 바 있다. “미동도 않는 석불(石佛·돌부처 이창호를 중국 팬들은 이렇게 부른다)을 어찌 움직일 것인가. 이래도 안 되고 저래도 안 된다면 그저 석불이 늙기를 기다릴 수밖에…. 그러나 석불의 나이 이제 스물여덟. 이야말로 부지하세월이 아닌가.”
그런데 이창호보다 여덟 살이나 어린 또 한 명의 석불이 등장했으니 어찌 세계 바둑계가 공포에 휩싸이지 않을쏜가.
이세돌 3단이 이창호 9단을 꺾고 새 챔피언으로 등극했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두 사람의 대결을 흥미롭게 바라보는 조훈현 9단에게 슬쩍 물어보았다. “드디어 이세돌의 시대가 열렸군요. 세대교체의 신호탄을 쏘았다고 봐야겠죠?”
조훈현 9단이 껄껄 웃으며 답했다. “세대교체는 무슨…. 이제부터야. 이제부터 치열하게 두 사람이 싸우는 시기가 온 거지. 그 싸움이 끝나봐야 알 수 있어. 세대교체 여부는….”
어쨌든 이창호 9단의 독주에 이세돌 3단이 제동을 걸고 나옴으로써 당분간 바둑계 판도는 두 기사의 쫓고 쫓기는 각축전 양상을 띨 것 같다.
전문가들이 꼽고 있는 이창호 9단의 패인은 단연 부담감이다. 그동안 해가 지지 않는 이창호 왕국의 건설은 한결같이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선배들을 상대로 이룬 것이었다. 도전하는 처지였으므로 밑져야 본전인 위치였다. 그러다 2년 전 제5회 LG배 결승에서 후배인 이세돌 3단의 도전을 받았고, 그때 이창호 9단은 1·2국을 내리 빼앗기며 벼랑 끝까지 몰렸다가 나머지 세 판을 가까스로 이겨 체면을 유지했다. 이세돌 3단에 대한 심적 부담감은 그때 이미 크게 자리잡았다. 그리고 2년 뒤 다시 같은 기전에서 리턴 매치를 벌인 결과는 패배였다.
흔히 이창호 9단을 ‘부동심의 달인’ ‘포커페이스’라 치켜세우지만 실제 곁에서 지켜보면 처음 만나는 상대, 특히 자기보다 어린 상대에게 곧잘 지곤 한다. 이겨야 본전인 위치, 방어해야 하는 위치, 천하의 이창호 9단도 인간이기에 쫓기는 자의 심적 부담감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다.
이창호 9단이 부담감에 평정심을 잃었다는 사실은 바둑 내용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이번 결승에서 이창호 9단은 1국과 4국에서 도저히 이창호가 둔 수라고 믿기 어려운 ‘덜컥수’를 연발해 자멸했다. ‘반상의 강태공’이라 불릴 정도로 서두르지 않고 상대가 제풀에 지쳐 쓰러질 때까지 느긋하게 기다리는 기풍인 이창호 9단이 유독 이세돌 3단만 만나면 자기 스타일을 잊은 채 발톱을 세우고 이빨을 드러내며 전면전을 마다하지 않는다. 유리할 땐 한두 집도 스스럼없이 내주며 딱 반 집만 이겨가던 이창호 9단이었다. 그랬던 그가 이세돌 3단을 만나서는 표독스럽게 한 집을 고집하다 타이틀을 날렸다.
강태공 vs 약은 바둑 흥미진진 예고
조훈현 9단 말마따나 이세돌 3단의 바둑이 ‘상대를 긁는 바둑’이기는 하다. 워낙 저돌적인 데다가 잔수와 노림에 강한 ‘약은 바둑’이어서 슬며시 부아를 돋운다고 한다. 아직 통산 상대 전적에서는 13승12패로 이창호 9단이 한 판 앞서고 있지만 지난해부터 따진다면 8승5패로 오히려 이세돌 3단이 우위를 보이고 있다.
를 보면, 하변 백대마가 잡혀 있는 상태. 이쯤 되면 승부가 끝나 있는 상황이다. 백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1·3으로 움직여본다. 이때 흑4가 빌미를 준 발단. 5의 자리로 후퇴해 한 집쯤 인심 써도 승패와는 전혀 상관 없는 국면이었다. 두 번째 덜컥수는 백5 때 흑6으로 이은 수.
흑2는 웬만한 프로라면 빤히 보이는 수다. 이후 실전처럼 진행된다 해도 백11 때 흑12로 웅크리면 흑A로 끊은 뒤 흑B로 먹이는 수가 있어 백을 몽땅 잡을 수 있다.
실전은 백17까지 진행된 뒤 ‘가’의 곳을 다투는 엄청난 패가 발생했다. 그냥 죽었다고 여겼던 백대마가 이렇게 부활해서는 창졸간에 역전. 평상시의 이창호라면 도저히 나올 수 없는 미스터리 장면이었다. 294수 끝, 백 7집 반 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