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이 3월 18일 청와대에서 민주당 지도부 오찬회동에 앞서 환담하고 있다.
“특검법안과 당개혁안 처리 과정에서 민주당이 보여준 갖가지 행태에 강한 불신감을 갖고 있다. ‘이렇게 해서 총선을 치르겠느냐, 신당을 창당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생각도 있는 것 같더라.”
신주류 한 의원은 “C의원이 (신당 창당과 관련해 노대통령으로부터) 밀명을 받은 것 같다”는 말도 덧붙였다. 이 인사는 “C의원이 이미 3월7일 당내 개혁파 7인 멤버와 모여 ‘신당으로 갈 수밖에 없다’는 ‘도원결의’를 했다”는 말도 전했다. 3월13일, 또 다른 신주류 의원 2명이 노대통령의 부름을 받고 청와대를 방문했다. 이들에게 전달된 노대통령의 의중도 C의원에게 전달된 의중과 수위가 비슷했다고 한다.
3월18일, 청와대를 찾은 민주당 정대철 대표와 이상수 사무총장은 애초 계획대로 “민주당 안에 우리가 여당인가라는 자조가 퍼져 있다”는 당내 불만과 항의의 뜻을 전달했다. 이에 노대통령은 “미래지향적인 정당으로 변모해달라. 나의 머릿속은 한반도에서 전쟁을 막는 것과 내년 총선 승리라는 두 가지 생각으로 가득하다”는 흉중의 말을 던졌다고 한다.
신당 창당에 대한 노대통령의 의지는 확실해 보인다. 김원기 고문, 이상수 사무총장, 천정배·신기남 의원, 이강철 대통령 정무특보, 안희정 민주당 국가전략연구소 부소장 등 하나같이 노대통령의 핵심측근 그룹에서 정계개편의 목소리가 터져나오고 있다는 점이 방증이다. “코드가 맞는 사람끼리 살림을 차려야 한다”는 게 노대통령을 만나고 온 인사들의 이구동성이다. 그것도 가급적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는 입장인 것 같다.
개혁 의지로 정국운영 현실적 한계 노출
청와대가 신당 창당에 집착하는 가장 큰 이유는 민주당에 대한 불신 때문으로 보인다. “노대통령은 민주당을 고쳐 쓰기 어렵다고 결론 내린 것 같다”는 게 그를 만나고 온 신주류 한 인사의 전언이다. ‘되는 것도 없고 안 되는 것도 없는’ 민주당은 노무현 개혁의 동력이 될 수 없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는 것. 기저에는 내년 총선에 대한 불안감이 깔려 있다. 지금의 정당구조로는 여당의 패배 가능성이 적지 않고 이에 대한 부담이 생각보다 크다는 것이다. 노대통령은 당선자 시절 “내년 총선에서 지면 반(半)대통령”이라고 말했다. 총선에서 패할 경우 남은 임기 4년은 절반의 대통령에 불과할 것이란 얘기다. 신주류 인사들도 노대통령의 총선 걱정을 입에 올린다. 노대통령은 이미 ‘다수당이 총리를 맡는다’는 배수진을 쳐놓았다.
여소야대란 불안정한 정국도 타개해야 한다. 특검법 공포 과정에서 이미 개혁의지만 갖고 정국을 운영할 수 없다는 현실적 한계가 노출됐다. 노대통령은 민주당 다수의 반대에도 대북송금 특검법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정국 주도권을 되찾는 것이 노무현 정부의 성패와 직결된다는 집권 한 달의 교훈을 청와대측은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야권도 신당 에너지가 분출하고 있다. 지난 대선을 계기로 ‘3김식 정치’는 생명을 다했다. “변해야 산다”는 한나라당 인사들의 장탄식이 당사에 가득하다. 한 월간지가 최근 143명의 현역의원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 70.3%가 정계개편에 공감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목소리는 크지만 민주당 신주류의 신당 밑그림은 확실치 않다. “시나리오가 작동하고 있다”는 주장과 “필요성만 거론된다”는 상반된 지적이 혼재한다. 동교동계를 ‘후안무치한 세력’이라고 몰아붙였던 민주당 안희정 부소장은 3월28일 “그 발언은 특정세력을 겨냥한 것도, 계산이 깔린 것도 아니다”고 말했다. 홧김에 던진 말이라는 설명이다. 김원기 고문은 정계개편 주장은 정치개혁을 추진하기 위한 압박용이라는 뉘앙스를 풍긴다. 하나같이 당 개혁이 1순위며 정계개편은 후순위라는 주장이다. 문제는 당의 개혁이 지지부진할 경우다. 사사건건 신·구주류가 마찰음을 내는 분위기로 보아 같은 길을 가기는 어려워 보인다. 신주류는 신당 창당이라는 외길 수순으로 접어들 가능성이 매우 높다.
신주류가 그려놓은 창당의 기준은 진보와 보수라는 ‘색깔별 헤쳐 모여’다. 이를 위해 먼저 신주류를 중심으로 한 ‘주력군’이 당을 이탈, 신당 창당에 나설 가능성이 거론된다. 중도파 인사들도 기회를 보아 그 뒤를 따른다. 구주류를 제외하는 뺄셈의 공식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DJ)이 1995년 지지세력을 이끌고 민주당을 탈당해 국민회의를 창당했던 방식의 벤치마킹이다. 여기에 한나라당 개혁파, 수도권과 부산 의원 및 개혁당 인사들도 동참시킨다는 복안이다. 이는 ‘40+5설’이라는 덧셈의 공식으로 구체화된다. 40+5는 민주당 40여명과 한나라당 개혁세력 5명의 연대를 의미한다.
당외에서 개혁세력을 영입, 기존 민주당과 통합하는 방식도 거론된다. 워밍업을 하고 있는 장외의 386세력과 민변(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등 전국의 신진 기수들이 수혈 대상이다. 현재 이강철 특보, 안희정 부소장 등이 물밑접촉에 나선 것으로 알려졌다(상자기사 참조).
한나라당 “불순한 움직임 중단하라” 경고
신당이 자리잡고 나면 나머지 세력도 분화와 재편의 불길을 피할 수 없다. 이상수 총장의 예언은 다당제로의 전환이다. 한나라당과 TK(대구·경북)를 중심으로 한 보수정당과 광주와 전남에 기반한 민주당, 자민련 등 총 4개 이상의 정당 출현이 예상된다. ‘1여(與)’와 ‘다야(多野)’라는 총선 구도는 여권의 구미를 당기고도 남는다. 결국 여권의 신당 구도는 개혁정당을 축으로 하는 다당제가 축인 셈이다. 다당제로 총선을 치른 후 정책연합을 통해 집권연합을 구축할 것이란 전망도 뒤따른다.
정계개편의 출발점은 PK(부산·경남)일 가능성이 많다. 노무현 정부 출범 이후 부산 민심은 조금씩 변하고 있다. 부산 출신 한나라당 K의원이 보는 부산의 현재 위치는 ‘한나라당과 노무현’의 중간이다. 정형근 의원 말을 들어보면 실감이 난다.
“노무현 정부 인사가 호남 배제, 영남 전진배치 아니냐. (부산 시민들이) 노무현 정권은 우리 정권이라고 한다.”
한나라당 내 소장 개혁세력에 대한 여권의 물밑접촉설도 무성하다. 현역의원 4, 5명 탈당설, 지방자치단체장 이탈설 등 무수한 루머가 흘러다닌다. 박종웅 의원도 그 주인공 가운데 한 사람. 그의 말이다.
“지난해 지방선거 때 그쪽에서 나를 부산시장 후보로 영입하려 했고 노대통령, 문재인 민정수석 등 아는 사람이 많아서 나도는 말이 많다.”
민주당 탈레반 천정배(왼쪽), 신기남 의원. 두 의원은 신당 창당에 무게를 싣는다.
그는 “지난해 대선 직전 이 내용이 한나라당으로 흘러 들어갔고, 한나라당은 이를 토대로 나라종금 의혹을 제기했다”고 말했다. 세풍 사건에도 비슷한 수의 야당의원 이름이 오르내린다. 이런 의혹 사건은 ‘약과 독’을 동시에 품고 있다. 과거 정권의 경우 독을 취해 정치적으로 활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한나라당과 민주당 구주류 주변이 우려하는 대목이다.
정계개편의 길목에는 지뢰가 많다. 정대철 대표와 김원기 고문 등 일부 인사들은 DJ와 동교동계를 치는 정계개편은 전통적 지지기반인 호남의 이탈을 불러와 오히려 총선 패배로 이어질 것이라고 본다. 당권을 놓고 김고문 등은 정균환 원내총무 등 구주류와 조건부 타협책을 찾는 눈치도 보이고 있다. 이명박 서울시장의 낙마론이 퍼지면서 주력부대 내에서도 미묘한 견해차가 나오고 있다. 이상수 총장과 신기남 추미애 신계륜 의원 등은 출마를 위한 워밍업에 돌입한 것으로 보인다. 선거를 위해 당의 안정이 무엇보다 급선무다.
주인 없는 당이지만 한나라당의 조직적 반발도 불을 보듯 뻔하다. 이미 박종희 대변인의 입을 통해 “상생의 정치를 바란다면 불순한 움직임을 중단하라”는 엄중 경고가 전달된 상태다. 무리한 정계개편은 정국 냉각을 불러올 게 뻔하다. “인위적 정계개편은 없다”는 노대통령의 원칙과 명분주의도 상당부분 손상될 게 분명하다. 신당 추진론자들의 의도와 달리 지역주의를 심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고, 이 역시 국민통합과는 거리가 멀다. 국민들이 갖는 보다 본질적인 의문은 선거 때마다 신당이 등장했지만 정치 수준의 도약으로 이어진 경우는 없었다는 점이다. 진보와 보수로 나누는 새로운 방식의 화장술은 과연 효과가 있을까. 국민들의 눈은 민주당의 앞날을 주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