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28일 참여연대 민주노총 등의 시민·사회 단체가 주도한 반전시위가 여의도 국회의사당 주변에서 열렸다(왼쪽). 같은 날 세종문화회관 앞에선 경실련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등이 별도의 반전집회를 열었다.
[장면2] 이날 정오께 서울 세종문화회관 앞에선 또 다른 반전집회가 열렸다. 세종문화회관 집회는 예상과 달리 차분했다. 참석자들은 반전성명서를 발표하고 ‘전쟁반대’ 구호를 몇 차례 외친 뒤 15분 만에 집회를 끝냈다. 세종문화회관 집회는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이하 경실련)을 중심으로 경제정의실천불교시민연합(이하 경불련), 녹색미래동북아평화연대, 지구촌나눔운동, 한국여성정치연구소,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등의 시민단체가 주도한 것. 이날 발표한 성명서의 요지는 이렇다. “정당화할 수 없는 전쟁에 반대한다. 한국 정부의 처지를 이해하지만 파병에 반대한다.” 언뜻 보기에 여의도 집회와 비슷한 주장이었지만, 파병동의안 국회 통과 문제에 대한 언급은 거의 없었다. 또 여의도 집회와 달리 파병 결정을 한 노무현 대통령과 정부에 대한 비판의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경실련 vs 참여연대 입장차 뚜렷
최근 시민·사회 단체의 화두는 단연 반전운동이다. 그런데 왜 언뜻 같은 주장을 하는 것으로 보이는 시민단체들이 다른 장소에서 다른 방식으로 집회를 열었을까. 참여연대를 비롯한 단체들은 반전·등미(等美)에, 경실련이 중심이 된 단체들은 반전·반핵에 무게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아직 주류 시민운동 단체로 보기는 어려운 일부 보수단체들을 제외하면, 주류 시민단체들은 “반전운동이 주한미군 철수운동 등 감정적인 반미운동으로 치닫는 것을 경계한다”(경실련 등)는 쪽과 “국군 파병은 헌법에 어긋나는 것이며 미국과의 대등한 관계를 요구한다”(참여연대 등)는 쪽으로 갈라진 상황이다. 각각 파병반대와 반미 우려에 무게가 실려 있다. 미국의 이라크 공격과 한국 정부의 파병 방침을 놓고 사회적 논란과 갈등이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반전운동’을 둘러싼 입장을 통해 주류 시민단체들 각각의 지향점이 보다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는 셈이다.
“참여연대가 주축이 된 반전운동에는 극단적인 반미와 미군철수를 주장하는 단체까지 섞여 있다”는 게 경실련측이 별도의 모임을 결성해 따로 반전시위에 나선 이유다. 미군철수를 요구하고 반미를 주장하는 단체들과 한목소리를 낼 수 없다는 것이다. 한 관계자는 “적극적 반미단체인 한총련 민족화해자주통일협의회 등과 같은 목소리를 낼 수는 없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이런 경실련측의 움직임에 대해 다른 시민단체들의 소장파 회원들은 “반전운동에 찬물을 끼얹는 행동”이라고 비난하고 있다. 이들은 “정부의 결정을 이해한다”는 탄력적 접근에 대해 “드러내놓고 참전에 찬성한다고 주장하는 편이 나을 것”이라며 “경실련의 보수성은 인정한다 해도 반전을 얘기하면서 파병 반대 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 것은 납득할 수 없다”고 말한다.
경실련을 비롯한 세종문화회관 집회측이 “돈독한 한미관계를 원한다”고 강조하고 있는 부분은 노대통령의 ‘전략적 파병론’의 논리와 비슷하다. 이를 놓고 일각에선 “여론 때문에 마지못해 파병에 반대하는 것 아니냐”고 꼬집기도 한다. 경실련이 ‘주한미군 철수’라는 예민한 문제를 빌미로 지나치게 정치논리를 앞세우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참여연대의 한 시민운동가는 “대다수 시민단체가 벌이고 있는 반전운동을 미국에 대한 증오에서 비롯됐다는 식으로 몰고 가는 것은 반전평화운동의 본질을 왜곡하는 무분별한 주장”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시민운동가는 “전 세계를 강타하고 있는 반미운동은 오만한 미국에 반대하고 저항하는 것”이라며 “돈독한 한미관계 운운하는 그들의 주장은 국민정서와 동떨어져 있다”고 주장했다.
경실련 등은 성명서를 채택하는 데 난항을 겪었다고 한다. 참여한 단체들의 일부 인사들은 파병 문제에 대해 “전략적 파병은 고려할 수 있는 것 아니냐”는 입장이다. 고심 끝에 내린 결론이 “노대통령이 파병 결정을 내린 것은 이해하지만 파병에 반대한다”는 것이었다. 지구촌나눔운동 강문규 대표는 “대통령은 대통령의 논리대로 적절히 처신한 것이고, 시민단체는 시민단체 나름의 논리로 행동하는 것”이라며 “파병엔 반대하지만 주한미군의 전쟁 억지력 또한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3월28일 주한미군 철수반대 1000만서명운동본부 애국청년단 해병전우회 등 보수단체들은 국회의사당 주변에서 파병을 촉구하는 집회를 열었다.
반면 ‘전쟁반대 평화실현 공동실천’은 정부의 파병 결정을 강하게 비판하면서 ‘평등한 대미관계’를 중심으로 한 한미관계의 재설정을 요구하고 있다. 여중생범대위 한상열 공동대표는 “진정한 국가안보는 비굴한 타협을 통해서 얻어지는 게 아니라 서로 존중하는 한미관계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말했다. 녹색연합은 3월28일 이라크전 파병동의안에 찬성한 국회의원들을 대상으로 한 시민단체의 `낙선운동에 노대통령이 부정적 견해를 밝힌 데 대해 “국민의 80%가 파병에 반대하는 가운데 시민단체의 건전한 비판기능을 깎아내리려는 것”이라고 노대통령을 비난했다.
경실련과 참여연대가 서로 다른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은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1989년 경실련이 출범할 당시 정부는 경실련을 반정부 단체라며 몰아세웠고 재야는 현실타협주의의 산물이라고 비판했다. 또 경실련이 민중운동 진영을 비판한 반면 참여연대는 민중운동의 전통을 존중하면서 경실련을 중산층 중심의 보수적 운동 단체라고 비난했다. ‘좌 참여, 우경실’이란 말도 그래서 나왔다. 반전운동을 계기로 이런 색깔이 더욱 분명해지고 있는 것이다.
[장면3] 3월28일 오후 1시, 다시 국회 앞. 애국가를 함께 부른 보수적 시민단체 회원들은 국군의 이라크 파병에 찬성하는 시위를 벌였다. 주한미군 철수반대 1000만서명운동본부 김한식 본부장은 “반미·친북·공산 세력이 평화의 이름으로 한미 동맹관계를 깨뜨려 우리나라를 적화하려 한다”고 소리를 높였다. 곳곳에서 “옳소!” “옳소!” 하는 목소리가 터져나왔고, 일부에선 “전투병을 보내라”는 외침도 나왔다. 해병가를 부르며 모여든 해병전우회 회원들도 “이라크 파병을 늦춰서는 안 된다”며 파병동의안의 국회 통과를 촉구했다. 자유지성300인회 윤하정 대표는 “미국과의 동맹이 다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면서 “어떤 일이 있더라도 미국과 손잡고 북한의 야욕을 없애야 한다”고 주장했다.
새 정부 출범 이후 더욱 주목받고 있는 시민단체들은 여론의 바로미터 역할을 하며 사회적 아젠다를 제시하고 있다. 보수단체들도 과거의 이미지를 벗고 시민단체로 거듭나고 있는 등 시민단체들의 이념적 지향점이 다양화하고 있다. 시민단체들이 서로 다른 주장을 대변하며 충돌하는 사례 또한 늘고 있다. 반전시위를 둘러싼 갈등은 시민단체의 분화가 보다 가속화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고려대 조대엽 교수(사회학)는 “구체적인 사안에 따라 시민단체 간의 이합집산과 대립이 더욱 표면화할 것”이라고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