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를 배우는 아이들이라면 누구나 바흐 인벤션이나 모차르트 피아노 소나타를 치게 된다. 그런데 모차르트가 살던 1700년대에 ‘피아노’라는 악기가 있었을까? 당시만 해도 피아노는 일반인에게 낯선 악기였다. 대부분의 건반 음악은 쳄발로로 연주됐다. 더욱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바흐, 헨델 등이 활동하던 1700년대 전반에는 아예 피아노가 없었다. 그렇다면 피아노로 연주되는 바흐 음악은 ‘진짜’ 바흐 음악이라 할 수 있는 걸까?
원전연주는 바로 이 같은 의문에서 출발한다. ‘정격음악’이라고도 불리는 원전연주는 과거에 사용되던 악기와 작곡가들 생존 당시의 연주 양식을 최대한 되살린 연주를 뜻한다. 원전연주자들은 피아노 대신 쳄발로를 사용하며, 바이올린과 첼로에는 철선이 아닌 양의 창자를 꼬아 만든 ‘거트’ 현을 끼운다. 첼로는 바닥에 세우는 핀이 없어 연주자가 다리 사이에 악기를 끼운 채 지탱한다. 모두 과거의 연주 양식을 따른 것이다.
연주자들은 원전연주의 가장 큰 매력으로 흔히 ‘음색’을 꼽는다. 거트 현을 맨 현악기는 현대의 바이올린, 첼로처럼 매끈한 음색을 내지 못한다. 약간 둔한 듯, 거친 듯한 소리가 난다. 건반악기 역시 마찬가지다. 명료하고 깔끔한 피아노에 비해 낭창거리는 쳄발로의 소리는 단조로우면서도 다정하다. 색깔로 비유하자면 오래된 가구의 고동색, 또는 진한 커피색이라고나 할까.
거친 듯 풋풋한 선율 매력 만점
가을빛이 점차 짙어가는 요즈음, 공연가에 원전연주 포스터가 많이 눈에 띈다. 금호아트홀은 9월10일에 열린 앙상블 ‘콘버숨 무지쿰’의 ‘사계’ 연주를 시작으로 해서 내년 초까지 모두 5회에 걸쳐 원전연주 시리즈를 계속한다. 두 번의 실내악과 쳄발로 독주, 첼로 독주, 바이올린 독주로 꾸며져 다양한 원전음악을 즐길 수 있는 시리즈다. LG아트센터는 9월24일 바로크 바이올리니스트 레이첼 포저 초청연주회를 갖는다. 국내 유일의 바로크 바이올린 연주자인 김진이 이끄는 앙상블 ‘무지카 글로리피카’도 10월10일과 31일에 서울 성공회대성당에서 연주회를 갖는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올 가을 원전연주의 최대 이슈는 9월28일부터 10월1일까지 열리는 첼리스트 안너 빌스마의 내한공연이다. 바로크음악 전문연주가인 안너 빌스마는 지난 99년 처음 내한할 때만 해도 로스트로포비치나 요요마 등에 비하면 낯선 첼리스트였다. 그러나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연주한 그의 첫 내한공연에서 2600석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이 전 석 매진되는 이변이 일어났다. 제대로 된 원전연주에 대한 관객의 갈증은 그만큼 컸다. 빌스마의 공연에 이어 고음악 아카데미, 지기스발트 쿠이겐 등 이름난 원전연주자들의 내한공연이 줄을 이었다. 세 번째 내한 연주인 이번 공연에서 빌스마는 바로크 음악 전문 트리오인 ‘라르키부델리’와 함께 3회에 걸친 실내악 연주와 독주회를 갖는다. 원전연주자로서는 처음으로 지방(울산 현대아트홀)무대에도 선다.
올 가을 원전연주의 첫 주자로 나선 콘버숨 무지쿰의 ‘사계’ 연주는 낯익으면서도 새로웠다. 비발디의 ‘사계’는 국내 음악애호가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곡이다. 그러나 원전연주 단체가 ‘사계’를 연주한 것은 이번이 처음. 콘버숨 무지쿰은 ‘사계’ 외에 바흐의 두 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협주곡 D단조와 두 대의 쳄발로를 위한 협주곡 C단조도 함께 연주했다.
7명의 일본인 연주자로 구성된 콘버숨 무지쿰은 창단된 지 2년밖에 안 된 신생 연주 그룹이다. 자연히 세부적인 연주의 완성도에서는 미흡한 구석이 많았다. 하지만 이들의 연주에는 이 같은 디테일의 문제점들을 무시할 만한 힘이 있었다. 그것은 원전연주 특유의 자유로운 영감의 발현이었다. 이들은 빠르고도 격렬한, 시린 겨울바람 같은 ‘사계’를 연주했다. ‘가을’에서 보여준 활달한 리듬감과 가끔씩 쳄발로가 지어 보이는 아름다운 표정도 인상적이었다. 바이올린 솔로를 맡은 기리야마 다케시는 연주 도중 술취한 사람의 흉내를 내는가 하면, 마치 사냥꾼에게 쫓기는 사냥감처럼 바이올린을 든 채 재빨리 무대 뒤로 숨기도 해 객석의 웃음을 자아냈다.
원전연주의 매력은 연주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원전연주를 찾는 관객은 클래식음악에 대해 어느 정도 조예가 깊은 사람들이다. 자연히 청중의 태도는 진지하면서도 너그럽다. 이날 300석 규모의 금호아트홀은 전 석 매진되었다. 영감 넘친 연주와 그 영감을 충분히 이해하는 청중. 쳄발로와 거트 현의 따스한 여운이 작고 아담한 홀에 오래도록 남았다.
원전연주는 바로 이 같은 의문에서 출발한다. ‘정격음악’이라고도 불리는 원전연주는 과거에 사용되던 악기와 작곡가들 생존 당시의 연주 양식을 최대한 되살린 연주를 뜻한다. 원전연주자들은 피아노 대신 쳄발로를 사용하며, 바이올린과 첼로에는 철선이 아닌 양의 창자를 꼬아 만든 ‘거트’ 현을 끼운다. 첼로는 바닥에 세우는 핀이 없어 연주자가 다리 사이에 악기를 끼운 채 지탱한다. 모두 과거의 연주 양식을 따른 것이다.
연주자들은 원전연주의 가장 큰 매력으로 흔히 ‘음색’을 꼽는다. 거트 현을 맨 현악기는 현대의 바이올린, 첼로처럼 매끈한 음색을 내지 못한다. 약간 둔한 듯, 거친 듯한 소리가 난다. 건반악기 역시 마찬가지다. 명료하고 깔끔한 피아노에 비해 낭창거리는 쳄발로의 소리는 단조로우면서도 다정하다. 색깔로 비유하자면 오래된 가구의 고동색, 또는 진한 커피색이라고나 할까.
거친 듯 풋풋한 선율 매력 만점
가을빛이 점차 짙어가는 요즈음, 공연가에 원전연주 포스터가 많이 눈에 띈다. 금호아트홀은 9월10일에 열린 앙상블 ‘콘버숨 무지쿰’의 ‘사계’ 연주를 시작으로 해서 내년 초까지 모두 5회에 걸쳐 원전연주 시리즈를 계속한다. 두 번의 실내악과 쳄발로 독주, 첼로 독주, 바이올린 독주로 꾸며져 다양한 원전음악을 즐길 수 있는 시리즈다. LG아트센터는 9월24일 바로크 바이올리니스트 레이첼 포저 초청연주회를 갖는다. 국내 유일의 바로크 바이올린 연주자인 김진이 이끄는 앙상블 ‘무지카 글로리피카’도 10월10일과 31일에 서울 성공회대성당에서 연주회를 갖는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올 가을 원전연주의 최대 이슈는 9월28일부터 10월1일까지 열리는 첼리스트 안너 빌스마의 내한공연이다. 바로크음악 전문연주가인 안너 빌스마는 지난 99년 처음 내한할 때만 해도 로스트로포비치나 요요마 등에 비하면 낯선 첼리스트였다. 그러나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연주한 그의 첫 내한공연에서 2600석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이 전 석 매진되는 이변이 일어났다. 제대로 된 원전연주에 대한 관객의 갈증은 그만큼 컸다. 빌스마의 공연에 이어 고음악 아카데미, 지기스발트 쿠이겐 등 이름난 원전연주자들의 내한공연이 줄을 이었다. 세 번째 내한 연주인 이번 공연에서 빌스마는 바로크 음악 전문 트리오인 ‘라르키부델리’와 함께 3회에 걸친 실내악 연주와 독주회를 갖는다. 원전연주자로서는 처음으로 지방(울산 현대아트홀)무대에도 선다.
올 가을 원전연주의 첫 주자로 나선 콘버숨 무지쿰의 ‘사계’ 연주는 낯익으면서도 새로웠다. 비발디의 ‘사계’는 국내 음악애호가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곡이다. 그러나 원전연주 단체가 ‘사계’를 연주한 것은 이번이 처음. 콘버숨 무지쿰은 ‘사계’ 외에 바흐의 두 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협주곡 D단조와 두 대의 쳄발로를 위한 협주곡 C단조도 함께 연주했다.
7명의 일본인 연주자로 구성된 콘버숨 무지쿰은 창단된 지 2년밖에 안 된 신생 연주 그룹이다. 자연히 세부적인 연주의 완성도에서는 미흡한 구석이 많았다. 하지만 이들의 연주에는 이 같은 디테일의 문제점들을 무시할 만한 힘이 있었다. 그것은 원전연주 특유의 자유로운 영감의 발현이었다. 이들은 빠르고도 격렬한, 시린 겨울바람 같은 ‘사계’를 연주했다. ‘가을’에서 보여준 활달한 리듬감과 가끔씩 쳄발로가 지어 보이는 아름다운 표정도 인상적이었다. 바이올린 솔로를 맡은 기리야마 다케시는 연주 도중 술취한 사람의 흉내를 내는가 하면, 마치 사냥꾼에게 쫓기는 사냥감처럼 바이올린을 든 채 재빨리 무대 뒤로 숨기도 해 객석의 웃음을 자아냈다.
원전연주의 매력은 연주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원전연주를 찾는 관객은 클래식음악에 대해 어느 정도 조예가 깊은 사람들이다. 자연히 청중의 태도는 진지하면서도 너그럽다. 이날 300석 규모의 금호아트홀은 전 석 매진되었다. 영감 넘친 연주와 그 영감을 충분히 이해하는 청중. 쳄발로와 거트 현의 따스한 여운이 작고 아담한 홀에 오래도록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