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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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단한 삶…차라리 떠나고 싶다”

수해지역 강원도 양양군 현북면 르포… 험한 지형 복구 손길도 늦어 더욱 ‘막막’

  • < 송홍근 기자 > carrot@donga.com

    입력2003-06-10 14: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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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단한 삶…차라리 떠나고 싶다”
    8월31일 오후 10시. 오전부터 내린 비는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 쏟아졌다. 강원도 양양군 현북면 장리 이장인 김학시씨(66)는 이곳에서 나고 자라면서 이런 큰 비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맞은편 큰길로는 산사태로 집채만한 바위가 쿵쿵 소리를 내며 떨어졌고, 보에 걸린 강물은 집의 처마 높이보다도 더 높게 파도를 일으키며 하류로 흘렀다. 불어난 남대천이 곧 집을 집어삼킬 것만 같았다. 두려움에 떨던 김씨 부부는 무작정 뒷산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귀중품 하나 챙기지 못하고 겨우 몸만 빠져나간 것이다. 재산목록 1호인 암소를 돌볼 겨를도 없었다. 산 쪽으로 얼마나 내달렸을까. 김씨 부부는 산속에서 추위와 싸우며 비가 그치기를, 해가 뜨기를 기다렸다.

    양양군 현북면은 풍광이 아름답기로 이름난 곳이다. 남대천을 따라 현북면으로 향하는 지방도는 여름철이면 관광객들로 장사진을 이뤘다. 그러나 ‘천혜의 비경’은 태풍에 할퀴어 아수라장으로 변해 있었다. 잘려 나간 집과 논밭은 마치 폭격을 맞은 듯했고, 죽은 가축이 내뿜는 고약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이재민들은 비교적 온전한 이웃집을 전전하거나 임시로 마련한 텐트, 컨테이너 박스에서 고단한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수해로 가재도구가 모두 떠내려가 식사는 고사하고 덮고 잘 이불조차 충분하지 않아 하루하루가 고달프기만 하다.

    ‘천혜의 비경’ 한순간 아수라장

    9월11일 오후. 김씨는 방금 도착한 옷가지와 먹을거리를 마을 주민들에게 나눠주고 있었다. 마을에서 이장 노릇을 하고 있는 터라 피해조사하랴, 구호물품 나눠주랴, 자원봉사자 챙기랴, 정신없이 뛰어다녀야 했다. 김씨가 살던 집은 그날 송두리째 강물에 휩쓸렸다고 한다. 그는 “자갈밭이 되어버린 집터에선 사람이 살았던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김씨는 한동안 마당에 신문지를 깔고 잠을 잤다. 특별히 갈 곳도 없었고 어미 잃고 홀로 살아남은 송아지가 안쓰러웠기 때문이란다. 김씨는 떠내려간 집보다 피해를 당한 마을 사람들을 더 걱정했다. 구호물자를 못 받은 집은 없는지, 혼자 사는 노인들의 건강은 어떤지, 추가로 붕괴될 가옥은 없는지….

    현북면에는 9월11일 현재까지도 고립된 지역이 있다. 현북면의 가장 서쪽인 법수치리가 바로 그곳. 법수치리 입구에선 비포장도로를 내는 작업이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어성전리에 사는 주기용씨는 “법수치리는 앞으로도 1주일 가량 지나야 도로가 복구될 정도로 피해가 심각하다”고 말했다. 골짜기를 따라 13km에 걸쳐 건설된 도로 중 절반 이상이 휩쓸려나가 절벽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걸어서 마을 입구까지 내려온 법수치리 주민 오창호씨(54)는 “평생을 이곳에서 살았지만 이런 수해는 처음 본다. 아랫마을은 상류인 법수치리보다 피해가 더 클 텐데 어떻게 됐는지 궁금하다”면서 오히려 아랫마을 주민들은 걱정했다. 법수치리의 피해 상황 역시 처참한데도 아랫마을 사람들의 안부를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오씨가 걱정한 아랫마을은 김씨가 살고 있는 장리와 장리 아래쪽의 도리, 장리 위쪽의 어성전리 등이다. 피해 상황은 오씨의 말처럼 남대천 하류로 내려갈수록 더 컸다. 어성전리보다는 장리가, 장리보다는 도리가 더 황폐해져 있었다. 어성전리는 75가구 중 14가구가 완파됐고 도리와 장리에선 온전한 집을 찾아보기조차 힘들었다. 한 마을에서도 명암은 엇갈렸다. 물길이 비켜간 곳은 언제 태풍이 불었냐는 듯 평화로웠지만, 물길이 지난 곳의 참상은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고단한 삶…차라리 떠나고 싶다”
    장리와 도리는 말할 것도 없고 비교적 도로사정이 좋은 어성전리에서도 중장비를 이용해 복구를 하고 있는 집은 단 한 곳밖에 없었다. 포클레인 등 중장비가 제대로 지원되지 않아 주민들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일손을 놓고 있었다. 집 앞의 강둑을 보수하고 있던 한 주민은 “언론에 보도가 많이 된 강릉은 지원이 많다고 들었다”며 “고립된 탓에 언론 보도가 적었던 양양 지역은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현북면에선 자원봉사자들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어성전리 이장 함석기씨(49)는 “강릉처럼 수백명씩 오겠다는 자원봉사자는 한 팀도 없었다. 소규모 인원을 지원해준다는 말은 있었지만 10명 정도가 찾아와 사진이나 찍고 가는 것은 오히려 방해만 되더라”고 말했다.

    “올 겨울 어떻게 넘겨야 할는지…”

    사정이 이렇다 보니 현북면 주민들은 정부와 언론에 대해 적대감을 나타내기도 했다. 지나가는 기자들을 보면 주민들은 “왜 이제야 찾아왔느냐”며 화를 내기 일쑤였다. 도리에 사는 한 주민(43)은 “대통령도 강릉만 다녀갔다고 하더라. 우리 마을엔 언제쯤 장비와 자원봉사자가 지원되느냐”면서 분통을 터뜨렸다.

    “고단한 삶…차라리 떠나고 싶다”
    답답하기는 양양군청도 마찬가지다. 응급 도로복구와 가교개설, 방역, 이재민 구호 등 응급조치를 위해 당장 필요한 예산만 75억원에 이르는데, 현재 확보된 예산은 도비와 재난관리기금을 포함해 13억원에 불과하다. 군은 임시방편으로 지역 건설업체를 통해 ‘선시공 후지급’ 형식으로 응급복구에서 나서고 있으나 이마저도 어려운 형편이다. 어성전리 입구에서 만난 김진선 강원도지사는 “강원도와 자원봉사자들이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어려운 점이 많다”며 “더 많은 국민적 관심을 기대한다”고 말했다.

    이런 복구 속도라면 현북면 주민들을 비롯한 수재민들은 올 겨울에도 따뜻한 잠자리를 기대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강바닥에 쌓인 토사로 인해 적은 비에도 피해지역이 재침수될 가능성도 있다. 13일 전국 일원이 특별재해구역으로 선포되면서 위로비와 복구비, 금융상의 특별지원을 받게 됐지만 보상금과 융자금이 나와도 올 겨울까지 집을 짓는 것은 무리다. 도리 이장 이장우씨(43)는 “농협에 수천만원씩 빚을 지고 있는 집이 대부분인데, 이 정도 복구비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걱정이다. 다시 농사를 지으려면 3~5년, 완전복구되려면 10년은 걸린다. 차라리 농협에 땅을 주고 고향을 떠나고 싶은 심정이다”라고 말했다.

    집을 잃은 사람들은 아직도 라면 외엔 이렇다 할 먹을거리가 없다. 장리 이장 김학시씨 부부는 저녁식사 시간이 되자, 복구작업으로 지친 고단한 몸을 이끌고 집터로 향했다. 혼자 살고 있는 이웃 노인 김봉녀씨(69)와 함께 저녁식사를 하기 위해서다. 라면을 먹으면서 김노인이 이장 부부에게 한가위 얘기를 꺼냈다. “그래도 한가위에 자식들 볼 생각에 견디는 거 아녀.” 김씨의 말에 이장 부부의 얼굴이 환해졌다. “이 텐트도 아들놈이 해다 준 거여. 아들놈 볼 날도 이제 1주일밖에 안 남았구먼. 큰아들은 서울의 큰 병원에서 일하고 작은아들도 공직에 있수. 대처에서 성공한 자식들마저 없었다면 죽어버렸을지도 몰라.” 김노인과 이장 부부는 자식자랑에 수해로 입은 고통을 잠시나마 잊은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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