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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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거 70주년… 위풍당당 역사 속으로

  • 입력2003-08-01 14:2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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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거 70주년… 위풍당당 역사 속으로
    저널리즘과 아카데미즘은 항상 서로를 아쉬워한다. 저널리즘은 아카데미즘의 깊이가, 아카데미즘은 저널리즘의 순발력이 부럽다. 홍인근의 ‘이봉창 평전’(나남 펴냄)은 이러한 저널리즘과 아카데미즘의 행복한 만남을 보여준다.

    저자가 이봉창 의사와 인연을 맺은 것은 1994년 말 기자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동아일보’가 해방 50주년 기념 특집으로 이봉창 의사를 재조명하면서 그의 옥중수기인 ‘상신서(上申書)’ 등 새로운 자료를 많이 접할 수 있었다. 이를 계기로 이듬해 11월 효창공원에 이봉창 의사의 동상이 세워졌다. 이의사가 순국한 지 63년 만의 일이었다.

    그리고 1999년 그가 35년간의 기자생활을 접고 국제한국연구원의 연구위원이 되면서 다시금 이봉창 의사와 만났다. 신문사에서 특집을 만들 때는 그 의미를 충분히 헤아리지 못했던 김구 선생의 글 ‘東京炸案의 眞狀’을 다시 읽으며 심장이 멎는 듯한 감격을 느꼈다고 그는 말한다. 그 글에서 김구 선생은 이봉창 의사 의거의 의의, 이봉창 의사의 경력과 가정환경, 김구 선생과 거사 논의 및 준비 과정 등을 상세하게 밝혀놓았다. 그때부터 그는 본격적인 이봉창 연구에 들어갔다.

    ‘이봉창 평전’은 1932년 1월8일 이의사가 일본 천황을 향해 폭탄을 던지던 역사적인 날로부터 시작된다. 천황의 행차에 대한 정확한 정보도 없이 백주에 경시청 정문 앞에서 거사를 기도한다는 것은 죽음을 무릅쓰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거사에 실패한 뒤 그는 엉뚱한 사람이 범인으로 지목되자 곧바로 “아니다, 나다!”라고 외칠 만큼 당당했다.

    그러나 당시 상황에 대해 지금까지 알려진 사실 중 두 가지 오류가 있다. 첫째는 독립운동사편찬위가 펴낸 ‘독립운동사’에서 이의사가 수류탄을 던진 후 태극기를 꺼내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는 대목이고, 둘째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천황의 마차에 만주국 황제 부의가 동승하고 있었다는 부분이다. 저자는 이것이 명백한 잘못이라며 바로잡았다. 이어 이봉창의 성장과정과 일본에서의 방황기,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김구와의 만남을 연대기 순으로 기술했다. 8~12장은 의거의 의의와 한·중·일의 반응을 해설한 것이다. 부록으로 ‘상신서’ ‘조선총독부 경비관계철 이봉창 관련’ ‘동경작안의 진상’ 등을 붙였다.



    저자는 안중근, 윤봉길 의사에 비해 상대적으로 이봉창 의사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소홀했던 이유를 세 가지로 설명한다. 일본이 천황 살해 기도라는 엄청난 ‘대역죄’가 알려지는 것을 철저히 통제했고, 이로 인해 이봉창 의사 관련자료들은 대부분 일본 정부기관에서 보관하며 제한적으로만 공개됐으며, 이봉창 의사가 독신으로 순국해 그의 업적을 기릴 유족이 없었다는 점이다. 의거 70주년을 맞고서야 비로소 제대로 된 평전이 나왔다는 사실도 우리가 이봉창 의사에 대해 얼마나 무심했는지를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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