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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작업의 거의 모든 공정이사람의 손이 거쳐야 하는 애니메이션의 경우는 어떤가. 9월11일부터 15일까지 건국대학교 새천년기념관에서 열린 ‘2002 국제 판타스틱 애니메이션 영화제’에서는 일본 애니메이션의 걸작 ‘공각기동대’ TV판이 세계 최초로 상영되어 큰 관심을 모았다. ‘공각기동대’ TV판을 비롯, 최근 화제가 되고 있는 작품들을 통해 일본 애니메이션의 새 경향을 더듬어보자.
단편이 주는 짧지만 진한 여운
언제부터인가 일본 애니메이션은 관객들에게 하나의 작품만을 보고 즐기는 것이 아니라 생각지도 않았던 잔재미까지 보여주는 방식을 하나의 상술로 이용하기 시작했다. 복잡함을 싫어하는 요즘 세대의 습성과 단순하면서도 강한 여운을 즐기는 젊은 세대의 기호를 반영한 이 경향은, 이제 새로운 문화 형태로 자리잡게 되었다.
기술력과 자본이 모두 뒷받침되지 않았던 애니메이션 초창기에 애니메이터들은 어쩔 수 없이 단편 애니메이션을 만들 수밖에 없었다. 광고용 애니메이션이 아닌 상업적인 작품을 만든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던 시절이었다. 이는 한국 애니메이션의 초창기에 등장한 신동헌 감독의 진로 소주 광고를 봐도 알 수 있다. 제작비 충당이라는 현실적인 벽에 부딪혀 스스로의 창의성을 광고 메시지를 빗대어 나타내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단편 애니메이션은 장편 애니메이션이 발전하면서 또 다른 양상으로 변화하기 시작한다. 상업적인 목적이 아니라는 이유로 단편영화는 창작자가 의도한 모든 영상적 코드나 모호한 내용을 삽입할 수 있다. 이 같은 경향이 개인용 미디어의 급속한 발달과 맞물려 다시금 변모해 나간다.
컴퓨터의 발달로 인해 과거에 엄청나게 복잡했던 작업도 개인이 간단하게 할 수 있게 되었다. 가상공간에서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자신의 생각을 보여주고 그에 대한 반응을 즐기는 문화가 형성되면서, 개인의 시간과 노력을 제외하고는 그 어떤 요소들도 필요치 않은 애니메이션은 급속한 유행을 타고 번져 나가기 시작했다. 통칭 ‘웹애니메이션’이라 불리는 이 방식은 이제 컴퓨터를 박차고 나와 극장 혹은 TV에서 관객들을 웃기고 또 울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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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지난 여름, ‘고양이의 은혜 갚기’와 더불어 전격 공개된 스튜디오 지브리의 ‘기브리즈 에피소드 2’ 역시 스튜디오 지브리에 근무하는 이들을 소재로 삼아 만든 단편 작품이다. 그 안에 녹아 들어간 내용의 기묘함과 표현 양식의 다양함은 보는 이들의 상상을 초월한다.
이처럼 단편 애니메이션은 ‘짧음의 미학’을 그 어떤 것보다도 강하게 부각시켜 관객들로 하여금 확실한 재미를 느끼게 한다. 단편의 가장 큰 무기는 아쉬움 뒤에 남겨지는 진한 여운이다. 장편에 이미 식상해져 버린 일본 애니메이션의 팬들에게 단편 애니메이션은 새로운 활력소를 불어넣고 있다.
기술력 넘쳐도 소재는 고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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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각기동대’ TV판은 지난날 우리를 놀라게 했던 동명의 극장판과 단지 1년의 격차-극장판의 배경은 2029년, TV판은 2030년-를 둔 줄거리, 그리고 보다 원작에 가까운 캐릭터로 만들어졌다. 작품의 수준은 TV판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높다. 그러나 원작에서 볼 수 있었던 가벼운 유머조차 느껴지지 않는 무거운 주제와 잔인한 액션신 등은 충격적이다. 과연 이 작품이 가장 대중적인 매체인 TV를 통해 공개되는 작품일까 하는 의구심이 생겨난다.
더구나 이 작품은 국내에 같이 소개된 ‘파라사이트 돌스’와 더불어 전작의 후속편격 리메이크라는 묘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이는 지금 일본 애니메이션계가 안고 있는 문제인 ‘소재의 고갈’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예인 듯하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일본 애니메이션은 아주 평범한 일상 속에서 참신한 소재를 발굴하여 관객들을 놀라게 하곤 했다. 그러나 이 같은 세심함은 ‘더 이상 표현의 한계는 없다’는 디지털시대를 맞이하게 되면서 서서히 포화상태에 달하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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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같은 한계를 극복하고 과거의 영광을 되찾자는 의도일까. 최근의 일본 애니메이션계는 디지털시대의 개막과 더불어 ‘명작의 부활’이라는 새로운 대의명분을 내세웠다. ‘은하철도 999’나 ‘우주소년 아톰’, ‘우주해적 캡틴 하록’ 등 과거의 명작들이 디지털화된 영상으로 속속 재개봉될 예정이다. 시간의 흐름을 초월한 소재의 공유가 과연 가능할 것인가. 어디 한번 두고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