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53

..

“내 인생 갉아먹은 호빠”

일본 호스트 출신 오샤레씨 체험수기… “일확천금은 환상, 남은 건 악몽 같은 추억뿐”

  • 입력2003-06-20 16:54: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이 체험 수기를 쓴 오샤레씨 (가명·27)는 현재 지방에 있는 K대 법학과 4학년에 재학중이다. 그는 대학에 휴학원을 내고 2년간 일본 호빠에서 ‘선수(호스트)’로 활동했고, 귀국한 후에도 최근까지 이 일을 해왔다. 그는 국내에서의 경험을 수기식으로 정리해 얼마 전 ‘호빠일기’라는 제목의 책을 펴냈다. 다음은 오샤레씨가 일본 호빠에서 겪은 경험담이다.
    “내 인생 갉아먹은 호빠”
    일본에 있는 한국인 불법체류자들의 대다수는 화류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한국인들이 돈을 벌려는 목적만으로 화류계에 뛰어드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좋은 집안의 멀쩡한 자식들이 뭐가 아쉬운지, 또 뭐가 그리 궁금한지 하루가 멀다 하고 호빠에 찾아와 술 따르게 해달라고 면접을 본다. 그것도 친구와 함께 와서 말이다. 일본에서 공부를 잘하던 유학생들도 며칠 학교에 안 보인다 싶으면 술집에 나가 아르바이트를 하고, 한국에서 사업하다 망하면 일본 가서 호스트를 한다.

    “유학도 하고 돈도 벌고… 친구 말에 솔깃”

    또 일본 술집에서 스폰서를 잘 만나 한국에 돌아와서 유명 연예인으로 변신한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거꾸로 한국에서 연예인 노릇 하다 일본 가서 ‘공사(호스트 일)’를 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현재 국내에서 인기가수로 활동하고 있는 S씨와 D씨는 호빠에서 나와 함께 선수로 활동했는데 상당히 많은 돈을 벌었으며, 지금도 유명 댄스가수 Y씨는 우에노의 한 호빠에서 일하고 있다.

    그러나 화류계에 몸담고 있는 한국인 불법체류자들의 삶은 결코 편안하지 않다. 한국에서 건너온 건달과 일본 야쿠자들에게는 착취의 대상이고, 출입국관리국 직원들과는 쫓고 쫓기는 숨바꼭질을 해야 한다. 그래서 늘 긴장된 삶을 살아야 한다. 나는 일본에 가면 일확천금을 거머쥘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을 갖고 있는 우리나라 호빠 지망생들에게 실상을 밝혀주기 위해 이 글을 쓴다.

    내가 일본 호빠에 진출하게 된 것은 지방대학 법정학부 시절 친하게 지낸 친구 규민이 때문이다. 나는 규민이가 일본 유학을 간 이후 일본으로 가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해왔다. 그런데 일본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 큰돈을 벌 수 있다는 말에 귀가 솔깃해졌다.



    “규민아, 나도 유학 가고 싶은데 우리집 형편에 생활비를 받을 수는 없고, 내가 가면 무슨 할 일이 있냐?” 그러자 규민이는 한참 머뭇거리다 사실을 털어놓았다. “나… 사실은 여기서 호스트 해!” 순간 웃음이 터져나왔다. 녀석이 그런 일을 하게 될 줄이야! 규민이네는 남부럽지 않는 재산이 있는 집이고, 규민이 역시 공부를 썩 잘 하지는 못했지만 놀기 좋아하는 ‘날라리’는 아니었다. 그런 그가 뭐가 아쉬워서 호스트가 됐단 말인가.

    규민이는 집에서 보내주는 학비를 마구 쓰기가 미안해 무슨 일이든 해보려고 직업소개소를 찾아갔는데, 한국유학원들이 홍보하는 것과는 달리 쉽게 아르바이트 자리를 구할 수 없었다고 했다. 그런데 직업소개소에서는 규민이의 잘생긴 외모를 보고는 은근히 호스트를 권하더라는 것이다.(주로 유학생들은 이렇게 걸려든다.)

    한 달 월급 25만엔(약 250만원), 매일 팁 1만엔 이상! 누군들 귀가 솔깃해지지 않겠는가? 규민이는 직업소개소의 제의를 선뜻 받아들였다고 한다.

    규민이와의 통화 이후 나는 심각하게 고민한 끝에 3개월짜리 단기비자로 일본행 비행기를 탔다.

    “내 인생 갉아먹은 호빠”
    신주쿠 니시가와구치(西川口)에 있는 가게에서 처음 해보는, 그것도 타국에서의 호스트 생활이었지만 재미있었다. 나는 숙련된 말솜씨로 쉽게 적응해 나갔다. 한국이나 일본 모두 호스트들은 여자 손님들을 끄는 ‘말빨’과 상황판단을 잘할 수 있는 ‘두뇌회전력’에 따라 능력이 평가된다. 그리고 난 ‘팁빨’도 상당히 따라주었다.

    나는 많은 여자들을 만났다. 신주쿠에서 톱클래스급에 해당하는 호스티스 ‘루비’를 만나 사랑에 빠지기도 했다. 루비가 자기 업소의 ‘교세도항(남자손님 강제동반)’이 있는 날이면 나는 없는 돈을 탈탈 털어서 그녀의 가게를 찾아 술을 팔아주었고, 심부름을 도맡아 했다. 결국 루비와의 만남은 실연으로 끝났다. 한국 호빠나 일본 호빠 모두 선수들에게는 손님들과의 사랑은 금지돼 있다. 서로 상처를 받기 때문이다.

    어느 날 ‘아타라시 손님(처음 오는 손님)’ 세 명이 떴다. 30대 중반쯤의 완숙한 여인들이었는데, 아카사카에서 놀러 왔다고 했다. 원래 일본에 있는 한국 호스트바에는 정해진 ‘초이스(선택)’ 시스템이 없다. ‘지마마(새끼마담)’의 권한으로 그냥 그 자리에 어울릴 만한 선수들을 앉히는 것이 관례다. 그러나 그녀들은 초이스를 하겠다고 했다.

    우리들은 긴장을 감추지 못하고 대기석에서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그중 제일 예쁜 한 여인이 날 ‘시메(초이스)’하는 것이었다. 수수한 차림이었지만 풍만한 가슴과 연예인 뺨칠 정도의 외모를 갖춘 여자였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오른손목에 ‘피아제’ 올다이아를 곱게 차고 있었다. 이것은 형들로부터 들은 ‘공사(여자손님으로부터 1000만원 이상의 돈을 받는 것)’급 아닌가.

    2년 동안 일본 8개 도시 돌며 허송세월

    난 머슴으로서 최선을 다했다. 그녀가 웃으면 나도 웃었고 그녀가 박수를 치면 난 더 크게 열심히 쳤다. 그럭저럭 그녀들도 만족한 표정이었다. 마칠 시간이 되자 그녀는 내게 밥을 먹자고 했다. 난 흔쾌히 그녀를 따라나섰다. 그런 나에게 형들은 밥만 먹으라고 했는데, 처음에는 그게 무슨 말인지 몰랐다. 단순히 형들의 질투려니 생각했다.

    어느 한국식당에서 식사하고 나오니 강렬해진 햇빛에 눈이 부셨다. 그녀는 달콤한 표정을 지으며 내게 같이 있고 싶다고 속삭였다. 나는 그녀의 유혹을 거부할 수 없었다. 모텔로 들어서자마자 서로를 강렬히 탐닉했다. 완숙한 여인의 테크닉은 탄성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유혹의 코스가 끝난 뒤 그녀는 아침에 밥을 먹었던 한국식당으로 나를 데려가더니 마늘장아찌랑 총각김치를 한껏 사주면서 집에 가 친구랑 같이 먹으라고 했다. 그녀의 세심한 배려에 눈물이 핑 돌았다. 난 집으로 달려와 친구에게 “이젠 고생은 끝났노라”고 외쳤다. 내 인생에 한 줄기 환한 빛이 비추는 듯했다.

    그러나 당장 그날 밤부터 그녀와의 연락이 두절됐다. 며칠간 수십통의 전화를 걸었지만 허사였다. 결국 난 마늘장아찌와 김치 쪼가리에 내 젊음을 판 것이었다. 알고 보니 꼭 그런 X들이 있다고 한다. 자기 동네 호스트바에서는 소문이 나니까 못 가고, 딴 동네에 와서 제일 순진해(?) 보이는 선수들을 찍어서는 하룻밤 쾌락의 상대로 즐기는 ‘상습범’들이 있다는 것이다. 결국 그날 내가 제일 만만해 보였던 것이다. 난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진정한 프로가 되는 수밖에!

    “내 인생 갉아먹은 호빠”
    조용한(?) 며칠이 흘렀다. 나는 견습 딱지를 떼기 위해 더욱더 일을 충실히 했다. 그러나 그 고요함은 아마도 폭풍전야의 그런 것이었나 보다. 결국 사건은 터지고 말았다.

    원래 ‘오픈(open)가게’는 한두 달 손님이 반짝 들끓게 마련이다. 그런데 그걸 시샘한 히가시가와구치(東川口)의 정통 깡패가게인 ‘황궁’에서 간부들이 급습해왔다. 황궁의 상무와 전무 모두 한국 깡패들이었는데, 소위 오픈 축하인사를 빙자해 우리 가게를 방문했다. 그들은 처음엔 조용히 술만 마시더니 은근히 술기운이 올라오자 행패를 부리기 시작했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부사초(부사장)가 바로 1부마마에게 전화를 날렸다. 1부마마는 곧바로 우리가게 ‘멘도미(보호)’하는 야쿠자들에게 전화를 했고, 5분여 만에 야쿠자 3명이 즉각 달려왔다. 그러자 황궁의 한국깡패들도 자기측 야쿠자들을 더 불러 사태는 더욱 악화됐다.

    야쿠자들끼리의 맞대응 상황! 그들은 절대 먼저 총을 뽑거나 칼을 휘두르지 않는다. 계속 이리저리 전화해 서로의 우열을 가리는 서열싸움을 한다. 극한의 상황에서는 다 같이 죽는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한국처럼 치고 받는 식의 싸움은 거의 없다.

    “내 인생 갉아먹은 호빠”
    나중에 우리측의 보스급 야쿠자 몇 명이 더 합류했다. 다행히 우리측 서열이 높아 사태가 진정 국면에 들어서려니 했다. 그런데 갑자기 황궁의 전무란 자가 술김인지 실수인지 “치∼”라는 말을 내뱉어버렸다. 화가 난 우리측 야쿠자가 계속 그 자에게 화를 내며 다그쳤다. 그런데도 황궁 전무는 겁도 없이 “니혼고 와카라나이(일본말을 모른다)”만을 연발하는 것이었다. 참을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른 우리측 야쿠자는 이윽고 총을 뽑아 들어 그 자의 머리 정중앙을 겨냥했다. 내 평생 처음 본 살인현장이었다.

    소문은 삽시간에 퍼져 나갔다. 사건이 일어난 후 손님이 뚝 끊겼다. 눈에 띄지 않는 선수들도 상당수였다. 설상가상으로 1부마마까지 여기저기 빚만 잔뜩 져놓고 도망을 가버렸다. 참 황당하기 짝이 없었다. 이윽고 간부들은 폐업이라는 결론에 도달한 듯했다. 한동안 쉬다가 장소를 옮겨 재오픈을 한다고 했다. 하지만 그것이 기약 없는 약속이란 건 누구나 다 알고 있었다. 결국 일본에서의 내 첫 직장인 ‘엔드리스(ENDLESS)’는 그 이름과 달리 두 달 만에 문을 닫고 말았다.

    이후 나는 2년간 일본 내 여덟 군데의 도시의 10여곳을 전전하며 호빠생활을 하다 결국은 인생만 피폐해진 채 한국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