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전 대통령 부부와 함께한 소설가 유시춘 씨.
“전남 신안군 하의도에서 태어나 소년기를 보내고 정치에 입문해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넘긴 간난신고(艱難辛苦)의 얘기들이 본인의 입을 통해 그대로 흘러나왔다. 김 전 대통령이 태어나 대통령 재임 후까지 자신의 삶 전체를 구술하고 이를 토대로 정확한 자료를 찾아서 정리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김 전 대통령은 이 자서전을 자기 기록의 정본으로 남기고 싶어했다. 먼 훗날 역사의 평가를 위해.”
김 전 대통령 서거 다음 날인 8월19일 서울 종로구의 한 오피스텔에서 단독 인터뷰한 유시춘 씨의 말이다. 유씨에 따르면 원고는 이미 탈고한 상태. 그러나 유씨는 “자서전 간행위원회(위원장 한승헌)에서 최종적으로 원고를 검수하고 책 발간 시점을 결정한 이후에나 내용 공개가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설득 끝에 김 전 대통령의 자서전을 쓰게 된 과정, 유씨의 기억에 남아 있는 자서전의 주요 내용 가운데 ‘매우 민감한 부분을 뺀’ 일부분을 들을 수 있었다. 유씨가 김 전 대통령의 자서전을 정리하게 된 것은 그와의 오랜 인연 때문이다.
“1984년 겨울인지 85년 봄인지 정확하진 않은데, 김 전 대통령이 미국 망명생활을 끝내고 돌아와 김영삼 씨와 함께 민주화추진협의회를 만들 즈음이었다. 당시 나는 교사였는데, 시국 사건에 연루돼 우리 집에 숨어 있던 시민(유시민 전 장관)이가 잡혀갔다. 그때 구속학생 학부모들을 설득해 구속학생학부모협의회를 만들고, 내가 총무를 맡았다. 이 협의회가 나중에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가 됐다. 학생 석방운동을 하다가 어려운 일이 생기면 동교동으로 쫓아갔다. 그때 처음 만난 김 전 대통령이 그렇게 따뜻할 수 없었다. 그 이후 87년 대선 때 찬조연설도 하고, 94년 ‘김대중 선생 납치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시민의 모임’을 만들면서 지속적으로 관계를 맺어왔다.”
자서전은 어떻게 집필하게 됐나.
“자서전 간행위원회에서 작가 몇 명을 후보로 추천했는데, 김 전 대통령이 나를 지목했다고 들었다. ‘나를 이해하고 좋아해야 잘 쓸 수 있지 않겠느냐’면서. 그리고 김택근 당시 경향신문 논설위원이 함께 참여했다. 김 전 대통령은 기록과 자료의 중요성을 잘 아는 분이다. 60여 차례 구술한 내용을 모두 녹화해 보관하고 있다. 자서전도 그것을 토대로 자료를 확인해가며 집필했다. 두 사람이 김 전 대통령의 구술을 함께 듣고 전반부는 김 위원이, 후반부는 내가 정리했다. 후반부는 재임 시절 국정운영과 정책에 관한 것이어서 민감한 내용이 많았다.”
자서전을 집필하면서 김 전 대통령을 자주 만났을 텐데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였나.
“입원하기 직전인 7월7일 오후 4시쯤이었다. 한 달 전쯤 원고를 탈고해 드렸더니 ‘수고했다’며 동교동으로 불렀다. 휠체어에 앉은 채로 40분 정도 대화를 나눴는데, 그때 이미 많이 힘들어했다.
특히 현 정부 들어 민주주의와 남북평화가 후퇴하고 있다는 사실에 굉장히 슬퍼했다. ‘내가 뭔가 하긴 해야겠는데, 이제 힘이 없다. 우리 국민은 현명해서 위기가 오면 늘 극복했다. 지금도 국민을 믿고 싶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뒤돌아서서 나오는데 이상하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자서전에서 가장 기억나는 대목을 꼽는다면.
“1976년 3월1일 ‘3·1 명동구국사건’으로 진주교도소에서 징역을 살 때였던 것 같다. 김 전 대통령은 추위를 많이 타는 분이다. 여름에도 에어컨 바람을 싫어할 정도다. 그런 분이 추운 겨울을 교도소에서 보내자니 얼마나 고통이 심했겠는가. 김 전 대통령은 감옥에서 수행하듯 많은 독서를 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감옥대학 출신’이라고 말한다. 그때 제도권 정당에 있던 야당 정치인 김대중이 민주화운동 세력과 처음으로 연결됐다. 김 전 대통령은 이것을 굉장히 뜻 깊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때 함께 옥고를 치른 수많은 분들이 나중에 정치적 원군이 됐다.”
‘3·1 명동구국사건’으로 구속된 민주화 인사들은 함석헌 선생, 윤보선 전 대통령, 문익환 문동환 서남동 목사, 함세웅 신부, 이우정 여성운동가, 이문영 안병무 교수, 김지하 시인, 정일형 이태영 박사 부부 등이다. 김 전 대통령은 2년9개월간 옥고를 치르고 78년 12월27일 형 집행정지로 가석방됐다. 하지만 80년 5월17일 전두환 군부가 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하던 날 김 전 대통령은 또다시 감옥으로 끌려갔다. 그리고 ‘광주폭동’의 주범으로 몰려 사형을 선고받고 청주교도소에 수감됐다.
유씨는 “김 전 대통령은 두 차례 구속돼 옥중에서 일제가 만들어놓은 교도소 준칙에 따라 머리를 깎일 때가 가장 슬픈 기억 중 하나라고 회고했다”고 말했다. 반면 김 전 대통령에게 가장 기쁜 기억은 역시 가족에 관한 것이었다.
“김 전 대통령이 1982년 청주교도소에서 추운 겨울을 보낼 때 3남 홍걸 씨가 고려대 불문과에 합격했다. 경쟁이 치열해 눈치작전이 심하던 때였는데, 다행히 홍걸 씨가 소신 지원한 불문과가 2명 미달된 것이다. 군부에서 고려대에 외압을 넣었지만, 당시 김상엽 총장이 정원미달이라 떨어뜨릴 명분이 없다며 합격시켰다. 김 전 대통령은 그때 굉장히 기뻐했다고 한다. 막내아들의 청소년기에 망명, 납치, 연금, 사형선고 등 늘 고통만 안겨준 아버지이기에 죄책감과 회한도 컸다. 홍걸 씨의 대학 합격 소식은 그런 그에게 무척 큰 기쁨이었다. 그 후 김 전 대통령은 교도소 담장을 사이에 두고 아들과 편지를 주고받았다. 솔제니친과 도스토옙스키 등의 작품을 읽고 독후감을 써서 주고받은 옥중서신도 있다.”
대통령 재임기간의 알려지지 않은 얘기들도 자서전에 많이 담겨 있나.
“있다. 정치자금과 관련된 얘기인데…. 예민해서 아직은 구체적으로 말하기 곤란하다.”
어차피 공개할 것 아닌가.
“대우그룹 김우중 전 회장이 야당 총재 시절의 김 전 대통령을 직·간접적으로 많이 도왔던 것 같다. 지금 말할 수 있는 부분은 김 전 대통령이 대우그룹이 공중분해 위기에 처했을 때 끝까지 살리려고 무진 애를 썼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김 전 회장이 어느 날 갑자기 출국하는 바람에 무산됐다(반면 김 전 회장의 측근들은 김 전 대통령 측 인사들이 김 전 회장의 출국을 사실상 강요했다고 주장해왔다-편집자).
그 후에도 김 전 대통령은 금융감독위원회를 통해 방법이 있으면 살려보라고 두 차례나 ‘특별주문’했다고 한다. 하지만 금융감독위원회는 대우그룹의 재무구조 등을 고려할 때 채무가 악성이라 공적자금을 아무리 투자해도 회생 가능성이 없다는 보고를 올렸다. 김 전 대통령은 또한 부산에 공장이 있는 삼성자동차를 살리려고도 애썼다. 그룹 간 ‘빅딜’을 할 때 대우는 삼성자동차를, 삼성은 반도체를 가져가는 것으로 협의가 진행됐는데, 김 전 회장이 그룹 구조조정은 하지 않은 채 삼성자동차 인수조건으로 현금 4조원 등을 요구하는 바람에 결렬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런 기록들이 상세히 담겨 있다.”
대통령 퇴임 이후 문제가 된 5억 달러 대북송금에 대해서는 어떻게 정리됐나.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었다. 대통령 임기 당시의 얘기는 자료를 중심으로 정리했는데 주로 외환위기 극복 과정, 베이징과 싱가포르를 오가며 극비리 접촉을 시도하면서 6·15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키기까지의 과정 등을 담고 있다.”
6·15남북정상회담 성사 과정과 관련해 소개할 만한 새로운 내용이 있다면.
“그 당시 김 전 대통령은 남북정상회담 무산이라는 일촉즉발의 위기감 속에서 북한을 방문했다. 북한이 정상회담 전제조건으로 요구한 것이 김 전 대통령의 금수산기념궁전(김일성 주석의 시신이 안치된 곳) 참배, 그리고 조선일보와 KBS 기자 입북불허였는데, 두 가지 다 사전 협의가 끝나지 않은 상태였다. 확정된 사항이 하나도 없이 북한으로 향한 김 전 대통령은 지도자로서 고독한 결단의 순간들을 경험했다. 다행히 동행한 임동원 국정원장과 박지원 비서실장이 북한을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그런 드라마틱한 뒷얘기들이 담겨 있다.”
대통령 임기 말 자녀들이 연루된 각종 비리사건이 터졌다. 그에 대한 언급은 없었나.
“자녀들에 대한 회한은 7월7일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조금 했다. 늘 생사의 기로를 넘나드는 절대 권력의 경쟁자였기 때문에 자녀들은 대학을 나와도 취직할 수 없었고, 결혼도 다들 힘들게 했다. 그런 자녀들에게 아버지로서 평범한 부정(父情)도 주지 못한 채 늘 정치에 쫓긴 데 대한 미안함을 끝까지 떨치지 못했다. 특히 장남 홍일 씨가 겪은 고초는 순전히 아버지 때문이지 않은가. 요즘 홍일 씨는 거동조차 힘든 상태다. 이에 대한 죄책감을 평생 안고 사신 것 같다.”
자서전을 정리하면서 느끼기에 김 전 대통령은 어떤 사람이었나.
“성격적으로 내가 ‘좁쌀영감’이라고 부를 만큼 세심하고 겁이 많으시다. 돌다리도 늘 두들겨보고 건너는 분이다. 다른 사람을 함부로 비난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메모광이다. 소소한 것까지 다 메모한다. 대통령 재임 중에도 국무회의에서 기억해야 될 부분이 있으면 메모했다가 다음 회의 때 일일이 확인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 메모노트가 30권쯤 되는데, 언론에서는 이를 ‘국정노트’라고 불렀다. 내가 볼 때 여자처럼 세심하고 부드럽고 자상한 남자였다.”
김 전 대통령의 건강이 악화된 이유가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때문이라는 말이 있는데.
“그런 것 같다. 의료진들도 비슷한 말을 했다. 노 전 대통령 영결식 때 1시간 내내 땡볕 아래 앉아 있었고, 가슴 깊이 오열했다. 지극한 슬픔은 에너지를 굉장히 많이 쓰는 일이어서 고령인 김 전 대통령에게는 치명적이었을 수 있다. 실제로 그날 이후 건강이 급격히 악화됐다.”
일각에서는 김 전 대통령 가족 사이에 재산을 둘러싼 불화가 있고 그것이 원인이라는 말도 들린다.
“그건 사실이 아닐 것이다. 그런 비슷한 얘기를 들은 적도 없다. 김 전 대통령은 굉장히 가정적인 분이셨다. 그리고 김 전 대통령의 전 재산은 이미 김대중도서관에 위탁돼 있는 것으로 안다.”
김 전 대통령을 떠나보낸 지금의 심경은.
“생전에 그분에게 참 고마웠다. 고난의 행군을 이겨내고 결국 집권해 남북 평화의 길을 튼 데다 기초생활보장법, 국가인권위원회 등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수자 및 약자들을 위한 법률과 제도도 만들었으며, 노벨평화상까지 받지 않았나. 하이에나 같은 수구의 정글에서, 극우반공이념이 주도한 30년 비정한 역사 속에서 몇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고 그가 이룬 업적은 실로 대단한 것이다. 그래서 성공한 지도자로 보고 싶다. 노 전 대통령의 죽음과는 달리 한이 없다. 끝없이 고맙고 존경스럽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