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쓰리고 아픈 고난의 생을 잘도 참고 견딘 당신을 참으로 존경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당신을 뜨거운 사랑의 품안에 편히 쉬시게 하실 것입니다. 어려움을 잘 감내하신 것을 하나님이 인정하시고 승리의 면류관을 씌워주실 줄 믿습니다. 자랑스럽습니다.
-8월20일 이희호 여사가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 중에서
1 수석 입학한 목포상업학교 재학 시절. 작문 시간에 일제 식민통치를 비판하는 글을 써서 반장을 그만두게 됐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1944년 3월 졸업했다.
2 1943년 목포상업학교 재학 시절 학예회를 마친 뒤 가진 선후배, 친구들과의 기념촬영. 맨 뒷줄 오른쪽에서 세 번째에 서 있는 사람이 김대중 전 대통령이다.
3 1945년 결혼한 첫 부인 차용애 여사(1959년 사망)와 장남 홍일, 차남 홍업 씨.
4 김 전 대통령이 정치에 입문해 처음으로 금배지에 도전한 1954년 3대 민의원(국회의원) 선거 입후보 기념사진. 전남 목포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한 그는 첫 고배를 마셔야 했다.
5 1961년 5대 민의원 보궐선거에 민주당 후보로 출마해 선거 유세 활동을 벌이는 김 전 대통령. 세 차례의 선거에서 쓴맛을 본 끝에 얻은 ‘영광’이었으나 당선 사흘 만에 일어난 5·16 군사정변으로 의원 등록도 못한 채 의원직을 박탈당했다.
6 1962년 5월 김 전 대통령은 YWCA 총무이던 ‘신여성’ 이희호 여사와 재혼한다.
7 1963년 민주당 대변인이던 김 전 대통령은 전남 목포에서 6대 총선에 당선돼 드디어 금배지를 달게 됐다.
8 1964년 4월 김 전 대통령은 국회 본회의장에서 5시간19분 동안 필리버스터(의사진행 지연작전)로 김준연 의원 구속동의안 처리를 저지했다.
9 1970년 신민당 대변인으로 활약하던 김 전 대통령. 3선 개헌 반대 규탄대회에 윤보선 전 대통령, 유진오 신민당 총재 등과 참석했다.
10 1970년 9월 신민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된 김 전 대통령은 자축파티에서 함께 경합을 펼친 김영삼(오른쪽), 이철승 후보의 팔을 들어 당원들의 박수에 답했다.
11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광주에서 유세를 벌이는 김 전 대통령. 당시 선거에서 박정희 대통령과 맞대결을 펼친 끝에 95만 표차로 석패했고, 이때부터 박정희 정권의 정치 탄압이 본격화됐다.
1 1971년 5월 8대 국회의원 선거 유세 지원을 다니던 김 전 대통령은 선거 하루 전, 목포에서 광주로 이동하던 중 의문의 교통사고를 당했다. 이 사고로 고관절을 다쳐 평생 지팡이를 짚어야 했다.
2 1973년 8월 일본 도쿄의 그랜드 팔레스호텔에서 중앙정보부(국가정보원의 전신) 요원에게 납치돼 동해에 수장당할 뻔한 위기를 겪은 김 전 대통령은 129시간 만에 극적으로 생환했다. 자택으로 돌아와 이희호 여사의 간호를 받고 있다.
3 ‘3·1 명동 민주구국선언’으로 구속됐다가 1978년 12월27일 형 집행정지로 가석방돼 동교동 자택으로 들어서는 김 전 대통령.
4 1979년 김 전 대통령 뒤로 가택연금 263일째 X표가 표시된 달력이 눈에 띈다. 그해 10월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되면서 김 전 대통령은 연금 해제 및 사면 복권 조치를 받았다.
5 1980년 2월, 사면 복권 조치 소식을 듣고 자택에 몰려온 지지자들에게 손을 들어 인사하는 김 전 대통령.
6, 7 1980년 8월 전두환 군사정권 하에서 열린 ‘내란음모 사건’ 군사재판에서 김 전 대통령은 사형선고를 받고 청주교도소에 수감됐다. 그해 겨울은 유난히 추웠다.
8 1982년 12월 석방된 김 전 대통령은 이후 미국 망명길에 올라 반(反)독재 투쟁을 하다가 85년 2월 귀국했다.
9 1986년 3월5일 김대중 김영삼 민주화추진협의회 공동의장이 직선제 개헌 추진 천만인서명운동본부 현판식을 한 뒤 박수를 치고 있다. 양김(兩金)이 주도한 개헌운동은 87년 6월 6·29선언을 이끌어내기까지 한국 민주화의 대표적 움직임이 됐다.
10 1987년 12월 제13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김대중 당시 평민당 후보가 부인 이희호 여사와 함께 유세장으로 가던 중 지지자들에게 답례하고 있다.
11 1992년 12월 제14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또다시 낙선한 김 전 대통령은 기자회견을 통해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12 1994년 김 전 대통령은 아시아·태평양평화재단(아태재단)을 창립하고, 통일문제 연구에 전념하겠다고 밝혔다.
13 아태재단 현판식에는 코라손 아키노 전 필리핀 대통령 등 김 전 대통령과 가까운 국내외 인사들이 참석했다.
14, 15 1995년 7월 김 전 대통령은 정계 복귀를 선언했다. 그해 9월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고 초대 총재로 추대됐다.
1 1997년 11월 대통령 선거 직전 김 전 대통령은 자민련 김종필 총재와 ‘DJP 연합’을 성사, 후보 단일화에 합의했다.
2 제15대 대통령선거에서 당선이 확정된 1997년 12월19일 오전,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하기 위해 일산 자택을 나서던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와 부인 이희호 여사가 당원, 지지자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3 1998년 2월25일 제15대 대통령 취임식.
4 2000년 6월13일 오전, 분단 이후 최초의 남북정상회담을 위해 평양 순안공항에 내린 김 전 대통령은 영접 나온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손을 정답게 맞잡았다.
5 남북 정상의 역사적 만남을 보도한 2000년 6월14일자 북한 노동신문 1면.
6 2000년 12월10일 김 전 대통령은 노르웨이 오슬로 시청에서 열린 노벨평화상 수상식에서 민주화에 기여하고 남북 화해 분위기 조성에 힘쓴 공로로 평화상 증서 및 메달을 받았다.
7 2002년 6월 김 전 대통령의 차남 홍업 씨가 알선수재 혐의 등으로 구속 수감됐다. 3남 홍걸 씨 역시 권력형 부정부패 사건에 휘말려 구속되면서 DJ 정권의 커다란 오점으로 남았다.
8 2003년 2월24일 대통령 퇴임식 후 청와대를 떠나 동교동 자택에 도착한 김 전 대통령 내외가 환영 나온 주민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9 2009년 5월29일 오전 서울 경복궁 앞뜰에서 열린 노무현 전 대통령 영결식에서 헌화를 마치고 권양숙 여사와 인사를 하던 중 통곡하는 김 전 대통령.
10 2009년 6월11일 ‘6·15남북공동선언’ 9주년 기념행사의 일환으로 진행된 김 전 대통령의 특강은 그의 마지막 연설이 됐다.
11 47년간 김 전 대통령의 반려자이자 동지였던 이희호 여사가 2009년 8월18일 서울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남편의 임시 빈소에서 오열하고 있다.
-8월20일 이희호 여사가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 중에서
1 수석 입학한 목포상업학교 재학 시절. 작문 시간에 일제 식민통치를 비판하는 글을 써서 반장을 그만두게 됐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1944년 3월 졸업했다.
2 1943년 목포상업학교 재학 시절 학예회를 마친 뒤 가진 선후배, 친구들과의 기념촬영. 맨 뒷줄 오른쪽에서 세 번째에 서 있는 사람이 김대중 전 대통령이다.
3 1945년 결혼한 첫 부인 차용애 여사(1959년 사망)와 장남 홍일, 차남 홍업 씨.
4 김 전 대통령이 정치에 입문해 처음으로 금배지에 도전한 1954년 3대 민의원(국회의원) 선거 입후보 기념사진. 전남 목포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한 그는 첫 고배를 마셔야 했다.
5 1961년 5대 민의원 보궐선거에 민주당 후보로 출마해 선거 유세 활동을 벌이는 김 전 대통령. 세 차례의 선거에서 쓴맛을 본 끝에 얻은 ‘영광’이었으나 당선 사흘 만에 일어난 5·16 군사정변으로 의원 등록도 못한 채 의원직을 박탈당했다.
6 1962년 5월 김 전 대통령은 YWCA 총무이던 ‘신여성’ 이희호 여사와 재혼한다.
7 1963년 민주당 대변인이던 김 전 대통령은 전남 목포에서 6대 총선에 당선돼 드디어 금배지를 달게 됐다.
8 1964년 4월 김 전 대통령은 국회 본회의장에서 5시간19분 동안 필리버스터(의사진행 지연작전)로 김준연 의원 구속동의안 처리를 저지했다.
9 1970년 신민당 대변인으로 활약하던 김 전 대통령. 3선 개헌 반대 규탄대회에 윤보선 전 대통령, 유진오 신민당 총재 등과 참석했다.
10 1970년 9월 신민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된 김 전 대통령은 자축파티에서 함께 경합을 펼친 김영삼(오른쪽), 이철승 후보의 팔을 들어 당원들의 박수에 답했다.
11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광주에서 유세를 벌이는 김 전 대통령. 당시 선거에서 박정희 대통령과 맞대결을 펼친 끝에 95만 표차로 석패했고, 이때부터 박정희 정권의 정치 탄압이 본격화됐다.
1 1971년 5월 8대 국회의원 선거 유세 지원을 다니던 김 전 대통령은 선거 하루 전, 목포에서 광주로 이동하던 중 의문의 교통사고를 당했다. 이 사고로 고관절을 다쳐 평생 지팡이를 짚어야 했다.
2 1973년 8월 일본 도쿄의 그랜드 팔레스호텔에서 중앙정보부(국가정보원의 전신) 요원에게 납치돼 동해에 수장당할 뻔한 위기를 겪은 김 전 대통령은 129시간 만에 극적으로 생환했다. 자택으로 돌아와 이희호 여사의 간호를 받고 있다.
3 ‘3·1 명동 민주구국선언’으로 구속됐다가 1978년 12월27일 형 집행정지로 가석방돼 동교동 자택으로 들어서는 김 전 대통령.
4 1979년 김 전 대통령 뒤로 가택연금 263일째 X표가 표시된 달력이 눈에 띈다. 그해 10월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되면서 김 전 대통령은 연금 해제 및 사면 복권 조치를 받았다.
5 1980년 2월, 사면 복권 조치 소식을 듣고 자택에 몰려온 지지자들에게 손을 들어 인사하는 김 전 대통령.
6, 7 1980년 8월 전두환 군사정권 하에서 열린 ‘내란음모 사건’ 군사재판에서 김 전 대통령은 사형선고를 받고 청주교도소에 수감됐다. 그해 겨울은 유난히 추웠다.
8 1982년 12월 석방된 김 전 대통령은 이후 미국 망명길에 올라 반(反)독재 투쟁을 하다가 85년 2월 귀국했다.
9 1986년 3월5일 김대중 김영삼 민주화추진협의회 공동의장이 직선제 개헌 추진 천만인서명운동본부 현판식을 한 뒤 박수를 치고 있다. 양김(兩金)이 주도한 개헌운동은 87년 6월 6·29선언을 이끌어내기까지 한국 민주화의 대표적 움직임이 됐다.
10 1987년 12월 제13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김대중 당시 평민당 후보가 부인 이희호 여사와 함께 유세장으로 가던 중 지지자들에게 답례하고 있다.
11 1992년 12월 제14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또다시 낙선한 김 전 대통령은 기자회견을 통해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12 1994년 김 전 대통령은 아시아·태평양평화재단(아태재단)을 창립하고, 통일문제 연구에 전념하겠다고 밝혔다.
13 아태재단 현판식에는 코라손 아키노 전 필리핀 대통령 등 김 전 대통령과 가까운 국내외 인사들이 참석했다.
14, 15 1995년 7월 김 전 대통령은 정계 복귀를 선언했다. 그해 9월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고 초대 총재로 추대됐다.
1 1997년 11월 대통령 선거 직전 김 전 대통령은 자민련 김종필 총재와 ‘DJP 연합’을 성사, 후보 단일화에 합의했다.
2 제15대 대통령선거에서 당선이 확정된 1997년 12월19일 오전,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하기 위해 일산 자택을 나서던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와 부인 이희호 여사가 당원, 지지자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3 1998년 2월25일 제15대 대통령 취임식.
4 2000년 6월13일 오전, 분단 이후 최초의 남북정상회담을 위해 평양 순안공항에 내린 김 전 대통령은 영접 나온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손을 정답게 맞잡았다.
5 남북 정상의 역사적 만남을 보도한 2000년 6월14일자 북한 노동신문 1면.
6 2000년 12월10일 김 전 대통령은 노르웨이 오슬로 시청에서 열린 노벨평화상 수상식에서 민주화에 기여하고 남북 화해 분위기 조성에 힘쓴 공로로 평화상 증서 및 메달을 받았다.
7 2002년 6월 김 전 대통령의 차남 홍업 씨가 알선수재 혐의 등으로 구속 수감됐다. 3남 홍걸 씨 역시 권력형 부정부패 사건에 휘말려 구속되면서 DJ 정권의 커다란 오점으로 남았다.
8 2003년 2월24일 대통령 퇴임식 후 청와대를 떠나 동교동 자택에 도착한 김 전 대통령 내외가 환영 나온 주민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9 2009년 5월29일 오전 서울 경복궁 앞뜰에서 열린 노무현 전 대통령 영결식에서 헌화를 마치고 권양숙 여사와 인사를 하던 중 통곡하는 김 전 대통령.
10 2009년 6월11일 ‘6·15남북공동선언’ 9주년 기념행사의 일환으로 진행된 김 전 대통령의 특강은 그의 마지막 연설이 됐다.
11 47년간 김 전 대통령의 반려자이자 동지였던 이희호 여사가 2009년 8월18일 서울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남편의 임시 빈소에서 오열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