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6월13일 오전 남북정상회담을 위해 평양 순안공항에 내린 김대중 대통령이 영접 나온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손을 맞잡고 있다.
현대 한국 정치사에서 김대중 정권의 역사적 좌표는 무엇이었나. 1948년 탄생한 대한민국 정부에게 주어진 과제는 빈곤의 탈출, 민주적 정치체제로의 이행, 그리고 분단의 극복이었다.
1998년 ‘국민의 정부’라는 이름을 내걸고 출범한 김대중 정권은 박정희 시대의 압축성장을 통한 경제발전, 1987년 6월항쟁 이후 민주화 성취라는 두 가지 역사적 과제가 선결된 후 등장한 정권이었다.
따라서 민주주의 공고화, 개혁을 통한 경제발전의 내실화 못지않게 중요한 과제는 분단 극복을 위한 남북관계의 변화였다. 그 역사적 맥을 제대로 짚은 것이 김대중 정권이었기에 김대중 정권에게 대북정책의 전환을 통한 냉전형 남북관계의 변화 시도는 어쩌면 필연이었다. 1998년 이전의 시대를 ‘냉전적 관리형 질서’라고 규정한다면 김대중 정권이 모색하려 한 새로운 질서는 ‘평화적 공존 질서’였다. 김대중 정권은 이 목표를 일정 정도 성취했다.
그는 정치일생 줄곧 ‘용공주의자’라는 의구심과 음해에 시달렸다. 그랬던 만큼 정치인 김대중으로서는 남북관계를 진전시키려는 시도 자체가 커다란 위험부담을 안고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남북관계는 그가 평생을 통해 축적해온 정치적 이상과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영역이기도 했다.
‘평화적 공존질서’ 어쩌면 역사적 필연
김대중 정권 시기의 대북정책은 냉전적 분단구조를 해빙시키는 것에 일차 목표를 뒀다. 그리고 그 방법은 무력통일이나 흡수통일이 아니라 남북한 화해협력 구도를 만들어나가는 것이었다. 분단 극복의 최종 도달점이 통일이라면 한반도 통일을 향한 첫 단추를 제대로 끼우는 것에 정책적 목표를 둔 것이다. 그 구상은 북한 붕괴론의 유혹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던 전임 김영삼 정부에 대한 비판이기도 했다.
‘햇볕정책’으로 상징되는 김대중의 대북정책은 흡수통일 배제, 무력사용 불용, 화해협력 추진 세 가지 목표를 갖고 있었다. 불신 구도를 화해협력 구도로 전환시킴으로써 남북관계를 안정적으로 관리하려는 데 목표를 뒀고, 북한을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진입시키고 접촉과 협력을 통해 경직된 북한체제를 변화시키고자 했다.
이러한 정책 구상은 탈(脫)냉전기 클린턴 행정부의 연착륙(soft-landing) 전략과도 맥을 같이했다. 선경후정(先經後政), 즉 정치와 경제를 전략적으로 분리시키고 비정치 분야에서의 교류 협력을 확대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정치·군사 분야의 신뢰구축을 도모하려 했다. 이런 점에서 김대중 정권의 햇볕정책은 기능주의적 통합이론에 기반을 둔 정치적 실천이기도 했다. 정주영 회장의 소떼 방북으로 시작된 남북관계의 해빙은 김대중 정권 5년 동안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남북회담이 60차례나 열렸고 공동보도문 18건, 합의서 22건이 채택됐다.
1998년 6월10일 김대중 대통령은 백악관에서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했다.
특히 금강산 관광이 개시되면서 동해선 철도·도로가 연결됐고, 비무장지대에서 철책과 지뢰가 일부 제거되고 군사 핫라인이 개설되는 등 남북한 군사신뢰 구축도 어느 정도 성과를 보였다.
햇볕정책의 하이라이트는 2000년 6월에 열린 남북한 정상회담이다. 이 회담에서 남북 정상은 6·15 남북공동선언을 통해 ‘통일문제 자주적 해결’ ‘연합제와 낮은 단계의 연방제 안의 공통점 상호 인정’ ‘가족·친척 방문단 교환’ ‘협력과 교류 활성화’ 등을 합의했다.
분단 이후 최초로 협력과 공생의 관계를 모색해 남북관계를 진전시켰다는 점에서 김대중 정권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실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그러나 성과 위주의 조급한 대북정책을 추진했다는 비판에도 직면했다. 이른바 ‘퍼주기’ 논란, 5억 달러 비밀 송금 등의 논란이 그것이다. 지나치게 발빠른 행보는 대통령 5년 단임제의 구조적 문제에서 기인한 것이기도 하지만, 오랜 냉전시대의 인식적 관성이 우리 사회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간과한 데다 정책전환으로 사회적 인식 변화를 선도해나갈 수 있다는 자신감 때문에 남남갈등의 원인을 제공하기도 했다.
김대중 정권 기간에 대미관계는 대북정책의 변화를 중심으로 전개됐다. 그러나 클린턴 행정부와 부시 행정부 두 시기 동안 김대중 정권의 대미관계는 극명한 온도차를 보였다. 민주당 클린턴 행정부와는 정책 공조를 통해 남·북·미 삼각관계의 선순환 구도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클린턴 행정부 시기, 김대중 정권은 ‘한반도 냉전구조 해체를 위한 포괄적 접근전략’으로 긴밀한 공조체제를 유지할 수 있었다.
대북정책 변화를 중심으로 대미관계 전개
1998년 대포동 발사 이후 위기에 봉착한 북미 합의구조를 ‘페리-프로세스’(윌리엄 페리 전 미 국방장관이 한반도 냉전구조 해체를 추진한 구상)로 반전시킨 것도 김대중 정권의 성과다. 이후 북미관계는 급물살을 탔고 북미 간 베를린 합의 도출→조명록 북한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의 워싱턴 방문→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전환하는 것에 합의한 북미 공동커뮤니케 발표→올브라이트 미 국무장관의 방북 등으로 햇볕정책의 외곽적 환경이 거의 완성되는 듯 보였다.
그러나 2000년 11월 부시 대통령과 네오콘(신보수주의자)의 등장은 김대중 정권에게, 또 햇볕정책에 중대한 시련을 가져왔다. 클린턴 정책 뒤집기(ABC, Anything But Clinton)에 몰두했던 네오콘들은 북미 기본합의가 북한의 협박에 굴복한 결과라며 비판했고, 미국 정부가 북한에 대해 강경한 태도로 선회하도록 유도했다. 이에 따라 한미 간 정책공조도 위기를 맞았다. 특히 9·11 테러 이후 미국은 북한을 이라크, 이란과 함께 ‘악의 축’으로 규정하기에 이르렀다.
부시-네오콘 대결의 중심적 세계관을 제대로 읽지 못한 김대중 정권은 햇볕정책의 정책적 정당성 논리를 오히려 강화했고, 그 결과 한미관계에 파열음이 생기는 것은 불가피했다. 대표적인 위기가 고농축 우라늄 프로그램(HEUP)을 둘러싼 ‘2차 핵위기’다. 김대중 정권이 구상한 남북관계의 해빙도, 북핵 문제의 평화적 해법도 모두 노무현 정부에 정치 유산으로 이양됐다.
남북한 냉전구도를 정책적 전환으로 변화하려 한 김대중 정권, 그 공과(功過)에 대해서는 훗날 남북관계의 변화 양상에 따라 또 다른 평가가 내려질 것이다. 다만, 적어도 그의 시대에 남북한 평화적 공존을 위한 정책적 시도가 탈냉전기 국제정치 환경변화에 조응하는 방향에서 전개됐다는 점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