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중심당 서울시장 후보로 출마한 성악가 임웅균 씨.
“1000만 기독교인 표만 해도 당선이 확실한데 언론에서 나를 무시하고 있다”고 말문을 연 그는 1971년 7대 대선 당시 3등을 했던 자신의 경력과 선거 뒷이야기를 장황하게 늘어놨다. 그러면서 ‘1노 3김’과 같은 분량의 인터뷰 기사를 실어주지 않는 신문사를 고소하겠다는 ‘협박’과 함께 “기사를 실어주면 맥주 3병을 사주겠다”는 ‘순진한’ 제안도 제시했다. 1시간여 만에 간신히 자리를 빠져나온 기자는 그 뒤 그의 기사를 가십으로 처리했다, 그가 출마를 포기할 때까지 전화 협박(?)에 시달려야만 했다.
‘카이젤 수염’으로 유명한 진복기 씨는 박정희, 김대중 전 대통령이 한판승부를 벌였던 1971년 대선 때 정의당 후보로 나와 1%인 12만2914표를 얻어 후보 5명 중 3등을 했다. 그는 이를 밑천으로 직선제 대선이 부활한 87년부터 대선이 있을 때마다 언론사를 찾아다니며 출마를 선언했지만 정작 선거에 나선 적은 없었다.
진 씨 못지않게 독특했던 인사는 1992년 14대 대선에 무소속 후보로 나섰던 남장(男裝) 여성 김옥선 씨다. 75년 유신체제 반대에 앞장서다 국회의원직을 잃은 그는 당시 얻은 전국적 지명도를 앞세워 홍일점 후보로 출마해 ‘무(無)공약’을 공약으로 내세우고, 유세차량도 없이 핸드마이크로 거리유세를 벌이는 등 색다른 선거운동을 펼쳤다. 그러나 결과는 유효투표 가운데 0.36%(8만6292표)를 얻어 7명 중 6등을 하는 데 그쳤다.
당시 무소속 후보였던 민중운동가 백기완 씨는 중도에 포기했으나, 1987년 대선 때도 출마했을 정도로 대선에 집착했던 인사다. 기탁금 부족으로 집을 팔겠다는 광고를 내기도 했던 그는 대학생들의 긴급 모금에 힘입어 후보 등록 마감일에 가까스로 등록을 마쳤다. 그리고 선거운동 기간에 1인당 1만원씩 내는 ‘만원 계조직’으로 비용을 추렴하며 유세를 펼쳤으나 성적표는 5등에 그쳤다.
각종 선거 때마다 당선 여부보다는 출마 자체가 화제인 인사들이 항상 존재했다. 그리고 이들은 여야 대결이 극한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는 선거 국면에서 국민들에게 웃음과 여유를 선사하는 ‘약방의 감초’ 구실을 해왔던 게 사실이다.
5월10일 국민중심당 서울시장 후보로 출마 선언을 한 성악가 임웅균 씨가 화제다. 출마 선언 자리에서 2002년 한일월드컵 당시 자신이 취입했던 ‘월드컵’이란 노래를 개사한 선거 로고송 ‘브라보 서울’의 세 소절을 직접 부른 그는 “오래전부터 문화부 장관이나 국립극장장 같은 행정가를 꿈꿔왔으며, 시장도 그 꿈 가운데 하나였던 만큼 준비 없이 갑자기 출마한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의 갑작스런 출마를 바라보는 유권자들의 시각은 조금 다른 듯하다. 유세에서 부를 그의 노래가 열린우리당 강금실 후보와 한나라당 오세훈 후보 간 달아오를 대로 달아오른 선거 열기를 식히는 청량제 구실을 해주길 바라는 게 유권자들의 속마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