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12월22일 노무현 대통령 주재로 청와대에서 열린 대·중소기업 상생협력 간담회 모습. 구속된 정몽구 현대자동차 회장의 웃는 모습도 보인다.
A그룹 구조조정본부의 고위 관계자 C 씨의 넋두리다. 요즘 그는 5월24일 노무현 대통령 주재로 열리는 ‘대·중소기업 상생협력 간담회’ 때문에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사회 분위기를 생각하면 거액의 사회기금을 내놓는 게 마땅하다. 중소기업을 위한 대책도 스스럼없이 제시해야 ‘좋은’ 기업으로 평가받을 수 있다. 하지만 내부사정을 들여다보면 나오는 것은 한숨뿐이다. 대외신인도 때문에 내놓고 말은 못하지만, 현금 유동성에 붉은 신호등이 켜진 지 오래다. ‘내 코가 석자’라는 그의 하소연을 엄살로만 볼 수 없는 이유다.
거액 기부 요구하는 사회 분위기
비슷한 사례는 또 있다. B그룹 고위 관계자 J 씨는 요즘 정치권, 특히 청와대 사정에 밝은 기자들을 수시로 찾아 밥을 산다. 상생협력 간담회 정보를 얻기 위한 ‘발품’이다.
청와대가 설정한 ‘가이드라인’을 알아내기 위해 뛰는 J 씨는 정치부 기자들이 그 답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그래서 기자들에게 던지는 그의 질문은 항상 비슷하다. “다른 기업은 (상생협력 간담회를) 어떻게 준비하며, 우리는 어느 정도 하면 되는가.”
제법 정보가 있어 보이는 기자에게는 ‘기업의 기부문화 확산이 노무현 대통령의 뜻인지’를 궁금해하는 오너의 관심사를 체크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J 씨는 하루 종일 뛰어다녀 얻은 정보를 다음 날 중역회의에서 보고한다. 그는 요즘 스스로를 ‘상생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샐러리맨’이라고 부른다.
5월24일 청와대에서 열리는 ‘대·중소기업 상생협력 간담회’에 참석 요청을 받은 기업은 삼성, 현대자동차, SK 등 25대 그룹이다. 이들 대부분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중소기업 지원을 위해 ‘어떤 선물 보따리를 꾸려야 할 것인가’를 놓고 고민에 빠져 있다.
분위기로만 본다면 뭔가 신선하고 파격적인 프로그램을 내놓아야 한다. 상생협력에 대한 정부 의지가 워낙 굳건하기 때문이다. 노 대통령은 연초부터 양극화 해소를 국정의 핵심 기조로 내걸었고, 정세균 산업자원부 장관은 현대차의 1조원 헌납 직후 “사회공헌은 평소에 하는 것”이라며 친절한 충고를 아끼지 않았다.
국가정보원의 움직임도 기업인들의 신경을 건드린다. 국정원은 지난해 5월과 12월 상생협력 간담회에서 거론된 내용 등과 관련해 최근 몇몇 기업에 전화를 걸어 추진상황과 추진계획 등을 확인했다. 전화를 받은 F그룹의 한 관계자는 “약속했던 100%를 모두 실천할 수는 없는 것 아니냐”며 심적 부담감을 토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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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원의 설명은 물론 다르다. 통상적인 정보활동을 기업들이 오해했다는 것. 공보실의 한 관계자는 5월11일 전화통화에서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상생 문제가 국가적 현안으로 대두됨에 따라 통상적인 정보활동 차원에서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어려움을 파악한 것이 와전된 것 같다”고 해명했다.
재벌 관계자들은 지난해 삼성그룹이 곤욕을 치르는 과정과 올해 현대자동차 정몽구 회장이 구속되는 장면을 지켜봤다. 특히 현대자동차가 연초 협력업체 납품단가 인하 압력으로 곤경에 처한 뒤 정 회장이 구속된 정황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재계 일각에서 ‘괘씸죄’라는 정치적 해석이 그래서 나왔다.
산자부 “부담 느낄 이유 없어”
심적 부담감이 배가되는 것은 정부의 기대치와 기업이 준비 중인 상생 방안에 편차가 있기 때문이다. 정부는 더 많은 대기업의 양보를 유도해내려는 눈치다. 그러나 대기업은 지난해 이미 웬만한 카드는 다 써먹은 상태라 곤혹스러워하는 표정이다. “실현 가능한 방안들은 다 내놨기 때문에 새로 내놓을 것이 없다”는 것. 그렇다고 상생협력 어젠다를 외면할 수도 없는 형편인 만큼 F그룹은 지난해 내놓은 방안을 새로 포장해 재탕하는 방법을 연구 중이다. 다른 몇몇 기업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청와대 초청장을 받아든 기업 관계자들은 2월 삼성의 8000억원 헌납과 현대자동차의 1조원 사회공헌기금이라는 전례에 주목한다. 상생협력 방안의 가이드라인이 사회공헌기금으로 정형화되는 것은 아닌지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것. 한편으로는 실현 가능한 범위 내에서 상생 프로그램을 실천에 옮기려는 움직임도 보인다(도표 참조).
불만이 없을 리 없다. 10대 그룹에 몸담고 있는 한 관계자는 “기업은 이윤 창출을 위해 있는 것이지 사회공헌 때문에 있는 건 아니지 않느냐”며 하소연했다. 그는 “사회공헌이나 상생경영은 기업이 알아서 스스로 할 때 효과가 더 크다”며 정부 개입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반면 산업자원부의 한 관계자는 11일 전화통화에서 “상생협력 간담회는 정부와 대기업, 그리고 중소기업의 공감대를 넓히기 위해 마련된 행사”라며 “기업들이 부담을 느낄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문제는 공감대 조성이 대기업의 희생과 부담을 전제로 한다는 점. 하지만 산자부 관계자는 “지금 당장에는 대기업에 부담이 되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품질 향상 등을 통한 이익이 대기업에도 돌아갈 것”이라고 밝혔다. 결국 윈윈을 위한 과도기적 진통이라는 주장이다.
환율은 연일 급락하고 유가는 천정부지로 치솟는 시대, 기업의 사회공헌을 요구하는 목소리에 한국 기업들은 울고 싶은 심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