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우는 5월20일 자신이 작곡한 영화음악만으로 구성된 콘서트를 연다. 그는 현재 열두 번째 영화인 봉준호 감독의 ‘괴물’ 음악을 작곡하고 있다.
그 음악을 만들어낸 사람, 이제는 ‘기타리스트’보다 ‘영화음악가’라는 호칭이 더 익숙한 이병우를 오랜만에 만났다. 눈사람처럼 둥글둥글한 웃음도, 편안하고 느릿한 말투도 여전하다. 그렇지만 그는 어느새 ‘클래식과 대중음악을 아우르는 기타리스트’에서 ‘뛰어난 영화음악가’로 변신해 있었다. 5월20일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리는 ‘이병우의 영화음악 콘서트’의 연주 목록을 보니 ‘왕의 남자’를 비롯해 ‘스캔들’,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 ‘장화 홍련’, ‘연애의 목적’ 등 쟁쟁한 영화들이 가득하다. 콘서트에서는 지금까지 작곡한 열두 편의 영화음악 중 일곱 편을 현악 앙상블과 피아노, 기타로 연주한다.
사극 영화에 국악기 안 써
“‘왕의 남자’는 제가 지금껏 작업해온 영화음악처럼 주제를 하나 만들고, 계속 변주하면서 전체적인 음악을 구성했어요. 가장 먼저 작곡한 곡이 장생의 테마인 ‘가려진’이고, 나머지는 ‘가려진’의 변주곡들이에요. 이렇게 하나의 테마를 여러 가지로 변주해서 전체적인 음악을 만드는 게 제 방식인데, 가끔 어떤 감독님들은 장면마다 완전히 새로운 음악을 만들어주기를 원하세요. 하지만 그렇게 하면 정말 중구난방이 돼버려요. 음악도, 영화도요.”
이병우 자신의 표현대로라면 “가래떡이라는 재료 하나로 떡볶이도, 떡국도, 떡꼬치도 만들 수 있듯이” 영화음악은 수많은 변주의 모음이라고 한다.
“사실 ‘왕의 남자’의 등장인물들은 음악으로 표현하기에 비교적 쉬운 편이었어요. 예를 들면 연산 같은 경우는 반음계를 많이 써서 그의 불안한 심리상태를 나타내려 했지요. 공길이 어렵지 않았냐고요? 아니에요. 공길처럼 약간은 뒤틀린 인물이 음악으로 표현하기는 더 수월해요. 공길이 등장하는 장면에선 불협화음과 기타를 미묘하게 사용해 야릇한 분위기를 표현했지요.”
특이하게도 그는 사극인 ‘왕의 남자’에 가야금이나 해금, 거문고 등을 일절 사용하지 않았다. 그가 ‘왕의 남자’에서 쓴 악기는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등 현악 앙상블과 기타다. 국악기로는 유일하게 대금을 썼다. 그럼에도 그의 음악은 조선시대라는 극의 배경에 자연스럽게 녹아들면서 듣는 이의 가슴에 아릿한 생채기를 남긴다. ‘왕의 남자’라는 걸출한 작품의 완성도를 높인 요인으로 그의 음악을 손꼽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조선시대가 배경이기는 하지만 극 안에서 등장인물들이 이미 장구 같은 국악기를 연주하잖아요. 저까지 국악기를 쓰면 충돌이 일어날 것 같았어요. ‘스캔들’에서도 비슷한 이유로 국악기를 쓰지 않았지요. ‘스캔들’에서는 극의 배경과 동시대의 유럽에서 사용한 하프시코드를 사용했지요.”
이준익 감독은 장생의 테마인 ‘가려진’을 그의 기타 연주로 처음 듣고는 “서사적인 극에 쓰기에는 너무 로맨틱한 음악 아니냐”고 말해서 그를 난감하게 했다고. “그런데 어떤 음악이든 기타로 연주하면 다 로맨틱하게 들리거든요.”(웃음)
영화 한 편에 들어가는 음악을 다 작곡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보통 3, 4개월. 시나리오를 읽은 뒤 감독이 현장 편집본을 가지고 오면 그걸 보면서 작곡을 시작한다. 가장 어려운 건 관객들이 마구 웃어야 하는 장면에 들어가는 음악이다.
이병우가 음악을 맡은 영화들. ‘스캔들’ ‘왕의 남자’ ‘호로비츠를 위하여’(위부터).
그럼 작업하기 좋은 장면은? “정사 장면이요. 하하하, 농담이고요. 사랑하는 장면도 좋아요. 저는 슬픈 음악이 잘 나오는 편이에요. ‘스캔들’도 등장인물들이 죽고 몰락하는 후반부 음악을 가장 먼저 썼지요. ‘분홍신’이나 ‘장화 홍련’ 같은 공포물의 경우도 비슷한데, 공포물의 내용은 잘 되짚어보면 대부분 슬픈 줄거리거든요. 제 음악이 슬프게 들린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래서 공포 영화도 몇 편 하게 됐나 봐요.”
그는 영화음악 작업을 할 때 자기주장을 잘 내세우지 않는다. 감독이 ‘음악을 이러저러하게 바꿔달라’고 하면 대부분 감독 의견을 따른다고. “기본적으로 영화는 감독의 작품이라고 생각해요. 제 음악은 또 제 음반에서 들려주면 되니까요.”
지금껏 작곡한 영화음악 가운데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이 뭐냐고 묻자 그는 “내 음악 가지고 잘했다 못했다 말하기는 좀 그렇고…. 이번에 진행하고 있는 봉준호 감독의 ‘괴물’이 아주 대단한 영화 같아요”라고 말을 돌린다. 작업한 영화가 극장에 걸리면 바로 보러 가지는 못하고 시간이 좀 흐른 뒤 슬쩍 보러간단다. 극장에 앉아서 보면 음악의 결점이 너무 많이 들려서 안절부절못하게 된다고.
“슬픈 음악 잘 나와 코미디 못해요”
2001년, 이병우가 애니메이션 ‘마리이야기’의 음악으로 처음 영화음악계에 발을 들여놓을 때만 해도 아무도, 그 자신도 영화음악가로 변신할 거라는 예상은 하지 못했다. 그러나 ‘마리이야기’가 2002년 대한민국 영화대상 음악부문상을 수상하고, 연이어 ‘스캔들’ ‘장화 홍련’ ‘연애의 목적’ 등의 음악 요청이 줄줄이 이어지면서 그는 어느새 최고의 영화음악가가 되어 있었다. 80년대에는 김민기, 조동진, 들국화 등 당대 가객들의 세션맨으로 활약하다가 훌쩍 유학을 떠나 빈 국립음대와 미국 피바디 음대에서 10년간 클래식 기타를 전공하고 돌아온 이병우가 또 한번의 변신을 보여준 셈이다.
“뭐 하는 사람이냐고 물으면 그냥 기타 치는 사람, 음악 하는 사람이라고 대답해요. 이 두 가지가 크게 다른 것 같지는 않거든요. 일을 굳이 찾아다니지 않아도 일이 들어와 준다는 게 참 고맙다는 생각도 들고요. 앞으로 제 연주음반도 내고 공연도 해야겠지만 영화음악 일 역시 마음 맞는 감독들과 즐겁게 해나갈 수 있을 것 같아요. 감독들이 다 재미있는 분들이거든요.”
인터뷰 도중, 그는 이리저리 자신의 음악을 설명하다가 “어휴, 제가 원래 말을 잘 못해요” 하면서 옆에 있는 기타를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그러고는 “장생의 테마는 이렇게 작곡했고요. 자, 이걸 이렇게 변주하면 다른 테마가 되고…” 하면서 ‘왕의 남자’의 몇몇 음악을 기타로 연주해 보였다. 신기해라. 말보다 기타 연주가 더 자연스럽다니. 빙그레 웃고 있는 그의 얼굴에 예술가의 혼이 언뜻 스쳐간다. 그 순간, 그가 진심으로 부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