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경력, 탁월한 언변과 글솜씨, 이론과 실무를 겸비한 현실주의자.’ 4월1일부터 제22대 한국은행 총재로 부임할 박승 중앙대 명예교수(66)에게 붙여진 수식어들이다. 한편에서는 ‘성장주의자, 관변학자, 옛 인물’ 등 사시(斜視)로 보는 사람도 적지 않다.
일단 그는 지명도나 한은 총재의 필수 덕목이라는 소신과 전문지식에서 모자람이 없다. ‘한은 출신’이며 ‘풍부한 행정경험’이란 조건을 모두 만족시킨다. 즉 정부 입맛에도 맞고 한은 내 반발도 예방할 수 있는 ‘적임자’라는 얘기다. 진념 경제부총리가 진작부터 총재감으로 강력 천거한 이유이기도 하다. 정부 요직에 전북 출신이 너무 많이 포진해 눈총 받고 있다는 점을 제외하면 무난한 인사라는 말을 듣기에 손색이 없다.
전북 김제 출신의 박 총재 내정자는 전형적 시골 출신 수재의 길을 걸어왔다. 어려운 가정 형편 탓에 이리공고를 졸업하기는 했지만 서울대 경제학과를 마치고 1961년 한은에 들어왔다. 그는 36세인 1972년 조사부 차장 당시 미 뉴욕주립대(올바니)에서 3년 만에 석·박사 학위를 모두 따냈다. 한은 근무 당시에는 자타가 공인하는 말솜씨와 필력으로 장차 ‘총재감’이란 얘기도 들었다. 그러나 귀국한 지 1년이 지난 1976년에는 유학경비까지 반납하면서 중앙대 교수로 변신한다. 지금도 그는 유학을 보내준 한은을 박차고 나온 점에 대해 미안하게 생각한다고 한다.
어쨌든 한은에서 갈고닦은 실력에다 교수라는 ‘간판’이 더해지면서 그는 이때부터 물 만난 고기가 된다. 당시 장덕진 농수산부 장관 등 관료들에게 언제든지 구미에 맞게 정책논리를 ‘OEM(주문생산)해 주는’ 몇 안 되는 학자였다. 5공 시절 한은 금융통화운영위원회를 비롯해 노동, 민생, 금융, 농정 등 각종 정부위원회에 두루 이름을 걸었다. 그런 의미에서는 애초부터 관변학자일 수밖에 없었다. 같은 한은 출신이면서도 항상 ‘삐딱했던’ 김태동 성균관대 교수(금통위원 내정자)와는 정반대 길을 걸은 셈이다. 현 정부 들어서는 제2건국위원회에 참여했고 99년 정부정책에 영향력이 큰 한국경제학회장을 지냈다. 지난해 2월부터는 공적자금관리위원회 민간위원장으로 주목받아 왔다. 한 측근에 따르면 그는 충남대 교수이자 자신의 중학교 후배인 전철환 현 총재에게 이른바 ‘한은 총재학’을 강의해 주었다고 한다. 첫째 정부와 일정 거리를 둘 것, 둘째 대통령과 독대 채널을 확보할 것 등이다. 말하자면 ‘까마귀(관료들) 노는 곳에 백로야 가지 말라’는 주문이었다. 그러나 전총재는 재임 시절 “오라는 데 어떻게 안 가느냐”며 웬만한 회의에는 모두 참석했다. 당연히 박내정자가 어떻게 처신할지 관심이 모아진다.
박내정자는 당장 몇 가지 숙제를 짊어지고 가야 한다. 최근 과열논란을 빚는 경기 상황은 새 총재에게 시작부터 콜금리 인상 여부와 관련한 어려운 선택을 강요하고 있다. 저금리 효과와 부작용 사이에서 입장을 정리할 때가 됐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최근 급등한 시장금리의 일부분은 새 총재의 ‘성향’을 모르는 데 따른 것이라는 얘기도 나온다.
정부와의 관계에서 어떻게 견제와 균형의 무게중심을 잡아나갈 것인지의 문제는 한은 총재라면 늘 고민할 수밖에 없는 원죄 같은 것이다. 정부와 관계가 아무리 매끄럽다고 해도 한은의 논리나 자신의 ‘총재학’대로라면 상당한 거리를 둬야 한다. 그동안 진념 부총리는 틈만 나면 정부대책회의 등에 한은 총재를 불러냈다. 이런 고민들을 해결하다 보면 1년 뒤에는 새로운 정권과 새로운 관계를 맺어야 한다. 한은 독립이 명문화돼 총재를 마음대로 교체할 수 없다고는 해도 분명 미묘한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일단 그는 지명도나 한은 총재의 필수 덕목이라는 소신과 전문지식에서 모자람이 없다. ‘한은 출신’이며 ‘풍부한 행정경험’이란 조건을 모두 만족시킨다. 즉 정부 입맛에도 맞고 한은 내 반발도 예방할 수 있는 ‘적임자’라는 얘기다. 진념 경제부총리가 진작부터 총재감으로 강력 천거한 이유이기도 하다. 정부 요직에 전북 출신이 너무 많이 포진해 눈총 받고 있다는 점을 제외하면 무난한 인사라는 말을 듣기에 손색이 없다.
전북 김제 출신의 박 총재 내정자는 전형적 시골 출신 수재의 길을 걸어왔다. 어려운 가정 형편 탓에 이리공고를 졸업하기는 했지만 서울대 경제학과를 마치고 1961년 한은에 들어왔다. 그는 36세인 1972년 조사부 차장 당시 미 뉴욕주립대(올바니)에서 3년 만에 석·박사 학위를 모두 따냈다. 한은 근무 당시에는 자타가 공인하는 말솜씨와 필력으로 장차 ‘총재감’이란 얘기도 들었다. 그러나 귀국한 지 1년이 지난 1976년에는 유학경비까지 반납하면서 중앙대 교수로 변신한다. 지금도 그는 유학을 보내준 한은을 박차고 나온 점에 대해 미안하게 생각한다고 한다.
어쨌든 한은에서 갈고닦은 실력에다 교수라는 ‘간판’이 더해지면서 그는 이때부터 물 만난 고기가 된다. 당시 장덕진 농수산부 장관 등 관료들에게 언제든지 구미에 맞게 정책논리를 ‘OEM(주문생산)해 주는’ 몇 안 되는 학자였다. 5공 시절 한은 금융통화운영위원회를 비롯해 노동, 민생, 금융, 농정 등 각종 정부위원회에 두루 이름을 걸었다. 그런 의미에서는 애초부터 관변학자일 수밖에 없었다. 같은 한은 출신이면서도 항상 ‘삐딱했던’ 김태동 성균관대 교수(금통위원 내정자)와는 정반대 길을 걸은 셈이다. 현 정부 들어서는 제2건국위원회에 참여했고 99년 정부정책에 영향력이 큰 한국경제학회장을 지냈다. 지난해 2월부터는 공적자금관리위원회 민간위원장으로 주목받아 왔다. 한 측근에 따르면 그는 충남대 교수이자 자신의 중학교 후배인 전철환 현 총재에게 이른바 ‘한은 총재학’을 강의해 주었다고 한다. 첫째 정부와 일정 거리를 둘 것, 둘째 대통령과 독대 채널을 확보할 것 등이다. 말하자면 ‘까마귀(관료들) 노는 곳에 백로야 가지 말라’는 주문이었다. 그러나 전총재는 재임 시절 “오라는 데 어떻게 안 가느냐”며 웬만한 회의에는 모두 참석했다. 당연히 박내정자가 어떻게 처신할지 관심이 모아진다.
박내정자는 당장 몇 가지 숙제를 짊어지고 가야 한다. 최근 과열논란을 빚는 경기 상황은 새 총재에게 시작부터 콜금리 인상 여부와 관련한 어려운 선택을 강요하고 있다. 저금리 효과와 부작용 사이에서 입장을 정리할 때가 됐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최근 급등한 시장금리의 일부분은 새 총재의 ‘성향’을 모르는 데 따른 것이라는 얘기도 나온다.
정부와의 관계에서 어떻게 견제와 균형의 무게중심을 잡아나갈 것인지의 문제는 한은 총재라면 늘 고민할 수밖에 없는 원죄 같은 것이다. 정부와 관계가 아무리 매끄럽다고 해도 한은의 논리나 자신의 ‘총재학’대로라면 상당한 거리를 둬야 한다. 그동안 진념 부총리는 틈만 나면 정부대책회의 등에 한은 총재를 불러냈다. 이런 고민들을 해결하다 보면 1년 뒤에는 새로운 정권과 새로운 관계를 맺어야 한다. 한은 독립이 명문화돼 총재를 마음대로 교체할 수 없다고는 해도 분명 미묘한 대목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