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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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용상아 저 용상아 임자 없는 용상아

두 별왕 세상 혼돈 바로잡기 위해 하늘로 … ‘아비 없음’보다는 ‘하늘신 없음’ 우회적 표현

  • 류이/ 문화평론가·연출가 nonil@korea.com

    입력2003-12-18 16:4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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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용상아 저 용상아 임자 없는 용상아

    하늘에 떠 있는 두 개의 태양 중 하나를 향해 활시위를 당기는 소별왕과 이를 지켜보는 대별왕.

    탐라신화 ‘천지왕본풀이’의 주인공은 사실상 천지왕(天地王)이라고 할 수가 없다. 쉬멩이와 싸운 것과 소별왕, 대별왕을 낳은 것 이외에 특별한 이야기가 없다. 아마도 천지왕 이야기가 많이 사라져버린 게 아닐까 한다. 그래서 이야기 후반부의 주인공은 오히려 소별왕과 대별왕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 가운데서도 소별왕이 어떻게 이승을 차지했는지가 이야기의 주요 줄거리다.

    천지왕은 하늘땅신의 이름이다. 옛사람들은 신들의 세계에도 ‘왕’ 혹은 ‘대왕’이 있다고 생각했다. 소별왕, 대별왕 할 때 ‘별왕(別王)’은 무슨 뜻일까? 별왕은 ‘별대왕(別大王)’이라고도 하는데, 무언가 큰일을 하는 ‘특별한 왕’이라는 뜻이다. 즉 하늘땅신을 이어 해와 달을 관장하고 이승과 저승을 맡아 다스리는 큰일을 하는 특별한 대왕이라는 뜻이다.

    쉬멩이와의 싸움에서 진 천지왕이 총명왕총명부인을 만나는 데서부터 이야기를 다시 시작한다.

    두 별왕의 본메본짱(신표)

    천지왕과 총명왕총명부인은 천생배필이 된 날 밤 이후 5일 밤을 함께 지낸다. 그 마지막날 밤, 그러니까 천지왕이 떠나기 전날 밤이다. 천지왕이 벽장 쪽으로 돌아누우면서 ‘후’ 하고 한숨을 쉰다. 총명왕총명부인이 한숨소리를 듣고는 “인간세상에 내려와서 인간과 밤을 지내니 답답합니까?” 한다.



    왠지 떠나는 님이 야속해서 투정 부리는 듯한 말투다.

    “아니오. 내가 아들 형제를 당신 몸에 두고 가건만 누구도 이 아이들을 천지왕 아들이라고 크게 생각해주지 않을 듯해 그럽니다.”

    혼돈의 시대에는 하늘땅신에게 별로 권위가 없었나 보다. ‘절대자’로서의 하늘땅신의 ‘말씀’을 기대하면 실망하기 십상이다.

    “아들이 솟아나거들랑 큰아들을 대별왕, 작은아들을 소별왕이라 하고, 딸 형제가 솟아나게 되면 큰딸은 대별데기, 작은딸은 소별데기라고 불러주시오.”

    천지왕은 총명왕총명부인에게 본메본짱(신표·信標)으로 박씨 한 알과 용얼래기 한 쪽을 주고는 옥황으로 올라가버렸다.

    총명왕총명부인은 천지왕과 천생배필의 연을 맺은 뒤, 아홉 달 열 달 차자 아들 형제를 낳았다. 큰아들은 대별왕, 작은아들은 소별왕으로 이름지었다. 보통 인간세계 왕들의 이름은 그가 죽고 나서 그 업적을 기려서 짓는 게 보통이다. 그런데 소별왕, 대별왕은 신들의 왕으로서 날 때부터 ‘특별한 왕’이었던 것이다.

    이 용상아 저 용상아 임자 없는 용상아

    통일신라시대의 세계수 와당(기와), 국립박물관.

    총명왕총명부인이 아들들을 기르는데 나이가 세 살이 되니 기는 것도 글발이요, 우는 것도 글소리라. 나이 일곱 살이 되니 글 한 자를 가르치면 열 자를 깨닫는다. 삼천 선비 서당에 글공부 활공부 하라 보냈는데 하도 글이 좋아서 다른 선비들이 시기하여, “밤 공다리 생긴 거여? 아니면 낮 간나이 낳은 거여?” 하며 놀린다. ‘아비 없는 호로자식’이라고 욕을 먹은 별왕 형제는 집에 와서 어미에게 줄기차게 묻는다.

    “우리 아버지가 누구예요? 네? 어서 찾아줘요.”

    자신을 버리고 떠나버린 지아비 이야기를 하는 지어미의 심정은 어땠을까? 이혼을 하고 혼자 사는 여성도 아니고…. 아이를 키우면서 평생을 기다리는 어미여! 속으로 흐르는 피눈물을 아이들에게 보일 수야 없겠지.

    “옥황상제 천지왕이 너희들 아버지란다!”

    “그렇다면 아버지가 본메본짱도 아니 두고 갔어요?”

    “그게 무슨 말이냐? 왜 아니 두고 갔겠느냐! 박씨 한 알 하고 용얼래기 한 쪽을 두고 갔지.”

    “그럼 이리 내어놓아요. 보게!”

    총명왕총명부인이 아들들에게 본메본짱을 내어준다. 어미는 아이들이 한 번 떠나고 나면 끝이라는 걸 알고 있다. 그러나 내색하지 않는다.

    이것이 소별왕 신화의 출발점이다. 별왕 형제는 아비가 남긴 본메본짱인 ‘박씨 한 알과 용얼래기 한 쪽’으로 하늘로 가는 길을 연다.

    우주나무 박나무 박줄을 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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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군신화에서 ‘쑥과 마늘’이 신으로의 변신을 보증하는 매개체이듯이, 여기서는 ‘박씨 한 알’이 그러하다. 이것이 없이는 신으로 변신하지 못한다. 물론 여기 나오는 ‘박줄’은 박의 덩굴로 땅과 하늘을 이어주는 우주나무다.

    박의 덩굴이 하늘까지? 재미있는 발상이다. 하늘로 올라가는 것은 분명 박 덩굴일 것이라는 것은 옛 농부의 상상력 아닌가? 게으름뱅이 잭이 하룻밤 사이에 하늘까지 자란 콩나무를 타고 하늘나라에 올라갔다는 영국의 동화도 같은 종류의 상상력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 상상력으로 지붕 위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박이 노랗게 익어가고 있는 시골마을의 초가집을 그려서는 안 된다. 신화는 신화로 읽어야 한다. 하늘나라를 올라갈 정도라면 얼마나 클까 이미지로 그려보시라. 미리내(은하수)를 옆에 끼고 우주를 가로질러 가야 하니 크기를 가늠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무처럼 생긴 것이니까 나무라고 하되, 그냥 나무라고 할 수는 없으니까 ‘우주나무’라고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우주나무가 쓰러지지 않으려면 얼마나 땅속 깊이 뿌리를 내려야 할까? 여러분의 상상에 맡길 수밖에 없다. 북유럽신화에는 우주를 떠받들고 있는 위그드라실이라는 거대한 물푸레나무가 등장한다. 우주나무가 뿌리내리고 자란 곳이 세계의 중심이 될 수밖에 없다. 두 별왕 형제가 박씨를 심은 ‘옛돌 아래’가 우주의 중심이 되는 것이다. 물론 두 형제가 ‘어마어마한’ 박줄을 이 가지 저 가지 타고 넘어 하늘로 올라간다는 것 자체가 보통 일이 아닐 터다. 그야말로 신화적 상상력으로 읽을 수밖에! 그 ‘줄타기’는 인간이 신으로 변신하기 위한 통과의례가 아닐까 한다. 죽음과 삶의 경계를 수없이 넘나드는, 죽음과 삶을 초월하는 줄타기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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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늘에는 하늘신이 없다

    얼마나 극적인 상황인가? 하늘에 올라갔더니 하늘신이 없다! 뜬눈으로 밤을 새우며 소별왕신화에서 이 이야기마디를 새롭게 읽어내면서 난 얼마나 흥분했는지 모른다. 창으로 희미하게 스며드는 새벽빛을 받으며 작업실을 수십 번이나 빙빙 돌며 생각에 잠겼었다. 도대체 이 상황은 무엇을 이야기하는 것인가? ‘아비 없음’인가 ‘하늘신 없음’인가?

    자, 이야기를 더 따라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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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용상아 저 용상아 임자 없는 용상아

    쉬멩이. 천지왕의 자리 비움은 쉬멩이와의 싸움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두 별왕은 아비가 없는데도 아비를 찾아볼 생각도 하지 않고, 해와 달을 조정하고 이승과 저승의 질서를 바로잡는 일에 바로 착수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당장 의문이 든다. 두 별왕이 아비를 찾아 하늘로 올라온 것이 아니란 말인가?

    신녀가 이 부분에서 중요한 이야기마디를 빠뜨리지 않았다고 가정한다면 두 별왕은 아비를 찾아온 것이 아니고, 세상의 혼돈을 바로잡기 위해 천지왕을 만나러 온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당연히 이 부분에서 ‘아버지의 부재’와 같은 정신분석학적인 잣대를 들이댈 일이 아니다. ‘아비 없음’이 아니라 ‘하늘신 없음’이 중요한 측면인 셈이다.

    이 시점에서 이야기를 되새겨보자. 원래 천지왕이 총명왕총명부인한테 와서 서로 결연하여 대별왕과 소별왕을 낳은 것은 그 두 별왕으로 하여금 세상의 혼돈을 바로잡게 하기 위해서다. 천지왕이 해와 달을 삼키는 태몽을 꾸고서 총명왕총명부인을 맞이하지 않았던가? 대별왕과 소별왕이 바로 그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어느새 두 별왕은 신이 되어 천지왕도 하지 못한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자, 그렇다면 두 별왕이 옥황에 도착해서 천지왕이 없는 것을 보고, “이 용상아, 저 용상아, 임자 모르는 용상이로구나!” 하고 소리를 내지른 이유가 보다 분명해지지 않는가?

    그것은 결단의 목소리였던 것이다. 해와 달을 조정한다는 엄청난 일에 도전하기 위한 목소리였던 것이다. 귀신을 부르면 생인이 대답하고 생인을 부르면 귀신이 대답하며, 인간이 가지나무에 목매어 죽고 접시 물에 빠져 죽고, 나무와 돌과 풀과 새가 말을 하는, 극에 달한 혼란을 바로잡기 위해 용기를 내는 소리였던 것이다.

    그래서 봉의 눈을 치뜨고 팔뚝에 힘을 넣어가며 두 주먹을 꽉 움켜쥐고 스스로에게 소리를 ‘내울리는’ 것이다. 물론 그 소리를 옥황에 있는 모든 신들이 다 들었을 것임이 분명하다. 옥황의 모든 군사들이 다 들었을 것임이 틀림없다.

    그렇다. 용상의 임자는 바로 두 형제였던 것이다. 그것을 깨닫고 지르는 소리였던 것이다.

    하늘에 하늘신이 없다는 것은 ‘용상의 비어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아비 없음’은 옥황 쟁탈전의 흔적일 수도 있다.

    우리 신화에서는 옥황 쟁탈전의 원인과 과정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이야기마디가 모두 사라졌다고 봐야 할 것이다. 아비의 권력을 빼앗는다는 사실 자체를 용납할 수 없는 유교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던 사회에서는 있을 수 있는 일이 아니었을까? 아비와 아들 사이인 천지왕과 두 별왕의 권력투쟁은 그래서 묻혀버렸을 수도 있다. 천지왕은 그리스신화의 크로노스(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올림포스의 주신(主神) 제우스의 아버지)처럼 어딘가에 유폐되었거나 아니면 천하를 떠도는 신세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것도 아니라면 쉬멩이와의 싸움에서 져서 사라졌든가! 아니, 늘 그렇듯이 신들의 세상에조차 염증을 느껴 산으로 들어가 신선이 되었을 수도 있다. 탐라신화, 고려신화에서 창세의 여신 마고가 사라져갔듯이 하늘땅신인 천지왕도 사라져간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늘신 없음’의 의미가 아닐까 한다.

    임자 모르는 용상

    용상의 왼뿔을 부러뜨린 것을 기념하기 위해 왼뿔 없는 용상을 타는 전통이 생겼다는 것도 의미심장한 이야기다. 용상의 임자를 몰랐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것인가? 임자가 없었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것인가? 아니다. 용상에 오른 결단을 기억하라는 뜻이리라.

    한편, ‘임자 없는 용상’이 아니라 ‘임자 모르는 용상’이라고 한 말도 무언가를 암시하고 있다. 아직은 임자가 누군지 모르지만 영원히 모를 수는 없으므로, 그것은 용상을 둘러싼 소별왕과 대별왕의 싸움을 예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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