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87

2007.05.29

“컴퓨터 수색 마음대로 국민 사생활 손금 보듯”

독일 정부, 범죄 예방 명목으로 ‘빅 브라더’ 추진

  • 슈투트가르트=안윤기 통신원 friedensstifter@gmail.com

    입력2007-05-23 16: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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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컴퓨터 수색 마음대로 국민 사생활 손금 보듯”

    독일 영화 ‘타인의 삶’의 한 장면.

    올해 아카데미상을 받은 독일 영화 ‘타인의 삶’은 국가권력이 개인의 사생활을 유린하던 동독 시절을 적나라하게 그린다. 비밀경찰 비즐러는 반체제 인사로 간주되는 극작가 드라이만의 집에 도청장치와 카메라를 설치하고 24시간 그를 감시한다. 비즐러에 의해 드라이만이 여자친구와 사랑을 나누고 동독 체제를 비판하는 글을 쓰는 모습까지도 상부에 보고된다.

    이 영화가 개봉되자 비즐러 역을 맡은 배우 울리히 뮈에의 호연이 화제가 됐다. 실제 동독 출신이기도 한 그의 감동적인 연기 배후에는 자신의 쓰라린 과거가 있다. 바로 그의 아내가 동독 국가정보부 비밀정보원이었던 것. 그녀의 임무는 예술활동을 하던 남편을 감시하는 것이었다.

    독일통일 이후 국가의 사생활 침해는 이미 지나간 과거의 일 혹은 남의 일로 간주되는 듯하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최근 독일에서 벌어지는 일을 보면 ‘반체제’ 의심 인사에서 ‘테러’ 의심 조직으로 감시대상만 바뀐 것 같다. 오히려 첨단장비와 컴퓨터 프로그램까지 동원돼 과거보다 감시 수준이 높아진 듯 보인다.

    통화내용 6개월 보존 의무 법안은 승인

    지난해 독일에서는 큰 사건이 일어날 ‘뻔’했다. 유동인구가 많기로 유명한 쾰른역 승강장에 수상한 청년 하나가 트렁크를 슬쩍 버려두고 떠나는 모습이 CCTV에 잡혔다. 트렁크에는 폭발물이 들어 있었다. 경찰의 신속한 조치로 불상사는 면했지만 독일 역시 테러 위협에 무방비로 노출됐다는 사실이 만천하에 알려지면서 시민들은 불안에 떨었다. 이것이 최근 들어 독일 정부가 강도 높은 범죄 예방적 치안 대책을 펼치는 배경이다.



    한 예로 독일 정부는 지난해 가을 경찰의 개인 컴퓨터에 대한 온라인 접근을 위해 1억 유로(약 1250억원)의 비용을 들여 속칭 ‘연방 트로이목마’로 불리는 프로그램을 개발했다. 이 스파이 소프트웨어의 임무는 인터넷을 통해 개인 컴퓨터에 잠입, 하드디스크를 수색해 폭탄제조법 같은 의심스러운 자료를 찾아내는 것이다. 다행히도 독일 법원이 “컴퓨터 하드웨어 자료 수색은 가택수색과 마찬가지로 정당한 법적 절차를 밟아야 한다”고 판결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쇼이블레 연방 내무부 장관은 “치안 유지를 위한 개인 컴퓨터 비밀수색 권한이 경찰에 주어져야 한다”며 “헌법 개정까지 추진하겠다”며 강경한 태도를 굽히지 않는다.

    또한 독일 내각은 4월 초 ‘통신 데이터 보존법안’을 승인했다. 이 법안은 통신업체에 가입자의 통화내용과 인터넷 사용기록을 6개월간 보존할 의무를 부과한다. 이는 범죄 혐의자뿐 아니라 모든 통신 이용자에게 예외 없이 적용된다. 결국 전 국민을 ‘잠재적 범인’으로 취급하는 셈이다.

    그 밖에도 쇼이블레 장관의 주도로 여러 가지 ‘빅 브라더’ 성격의 조치들이 취해지고 있다. 소지자의 생물학적 정보를 담은 신(新)여권 발행, 지문 정보와 여권사진 데이터베이스 구축, 이를 이용한 디지털 얼굴인식 시스템, 유사시 여객기 격추 권한, 치안을 위해 군대를 동원할 수 있는 권한 등이 그것이다.

    쇼이블레 내무장관 1990년 범죄 피해 경험

    이러한 조치들이 의도하는 바는 단지 이미 일어난 사건을 신속하게 수사해 범인을 잡아내는 것이 아니다. 쇼이블레 장관이 목표하는 바는 범죄와 테러를 ‘예방’하는 것이다. 예방주사를 맞는 것은 ‘작은 고통’을 수반하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큰 병에 걸리지 않고 건강할 수 있듯, 강경해 보일 수 있는 각종 치안장치를 동원해서라도 범죄의 싹을 초기에 제거하는 것이 옳다는 게 그의 논리다. 그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테러 위험을 예방하는 일에는 ‘무죄추정의 원칙’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과격한 발언도 했다. 무죄추정의 원칙이 형벌을 부과하는 데서는 타당하지만 범죄를 예방하는 차원에는 해당하지 않으며, 예방을 위해서는 오히려 모든 사람을 경계와 의심의 대상으로 보고 예의주시하는 게 옳다는 것이다.

    그러나 독일 정부 관료들 모두가 쇼이블레의 생각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롤프 슈테그너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주 내무장관은 “쇼이블레의 주장은 논의할 가치조차 없다”고 잘라 말했다. 자민당의 부르크하르트 히르쉬 전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 내무부 장관도 “정권이 시민을 잠재적 범죄자로 취급한다면 시민들은 이런 정권을 계속 신임할 것인지를 진지하게 물을 수밖에 없다”고 비판했다.

    이처럼 논란의 중심에 선 쇼이블레 장관은 한때 ‘기민련의 황태자’로 불리며 헬무트 콜 총리의 후계자로까지 거론되던 인물이었다. 그런데 1990년 불의의 습격으로 심하게 다쳐 휠체어 신세를 지면서 많은 것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불운한 과거가 그로 하여금 안전한 사회, 범죄 없는 국가를 소망하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범죄를 예방하려는 국가의 정보수집 행위 앞에서 사생활은 더 많이 노출되고, 그로 인해 불안에 떨게 되는 역설이 벌어진다. 과연 이러한 국가의 개입은 적절한 것인가? ‘범죄 예방’을 모토로 점점 강해져가는 독일의 국가권력을 지켜보면서 영화 ‘타인의 삶’이 새삼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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