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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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근과 채찍´ 싣고 칭짱철도 달린다

對티베트 정책 ´양날의 칼´… 철도 개통으로 생활수준 높여주는 대신 지배력 확고히

  • 베이징=하종대 동아일보 특파원

    입력2006-07-18 10:4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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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근과 채찍´ 싣고 칭짱철도 달린다

    라싸역 인근의 칭짱철도 공사 현장.

    7월 1일 티베트 역사 이래 처음으로 철길이 놓이고 열차가 운행됐다. 중국 칭하이(靑海)성 거얼무(格爾木)와 티베트의 중심 도시이자 티베트 불교의 성지인 라싸(拉薩)를 잇는 칭짱(靑藏)철도다.

    해발고도 2744m인 백두산 꼭대기보다 평균 1500m 높은 티베트는 ‘아시아의 지붕‘ ‘제3 극지‘라고 불린다. 전체 면적 122.84만 km2에 인구는 277만명. 1km2당 2명꼴로, 중국에서 인구밀도가 가장 낮은 곳이다.

    영어로는 티베트이지만 중국어로는 시짱(西藏)이다. ‘서쪽 은둔의 땅‘이라는 뜻이다. 민족 이름도 티베트족이 아닌 ‘짱주(藏族)라고 불린다. 중국의 5개 자치구 가운데 4개는 한족(漢族)이 40~80%에 이르지만, 티베트에서는 아직 6%에도 미치지 못한다.

    중국은 이러한 ‘은둔의 땅‘에 철도를 개통하면서 대대적인 축하행사를 벌였다. 1일 첫 열차 운행에 앞서 거얼무에서 열린 기념식에는 후진타오(胡錦濤) 공산당 총서기 겸 국가 주석과 쩡페이옌(曾培炎) 국무원 부총리, 류즈쥔(劉志軍) 철도부장 등 중앙정부 간부들이 대거 참석했다. 이날 후주석은 흥분한 목소리로 ”칭짱철도는 중국 역사에 영원히 남을 것”이라고 말했다.

    중국 정부는 관영 신화(新華)통신과 중앙방송 CCTV를 동원해 철도 개통 한 달여 전부터 대대적인 선전작업을 벌였다. 신화통신은 아예 전문 코너를 두어 마치 융단 폭격하듯 선전 기사를 쏟아냈다. 중국 정부가 얼마나 티베트를 중시하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89년 독립시위 때 후 주석 강경진압

    티베트는 7세기 초 당나라 문성(文成)공주와 인연을 맺은 이후부터 청나라 말기까지 1200여 년간 중국과 평등 및 불평등 관계를 거듭해왔다. 문성공주는 당(唐) 태종(太宗)의 양녀다. 당 태종은 티베트가 가장 융성했을 때 화친을 맺기 위해 양녀를 티베트의 32대 찬보(贊普) 송찬간포(松贊干布)에게 시집 보냈다. 이후 관계가 평등했든 불평등했든, 중국과 티베트는 독립된 역사를 이뤄왔다.

    그러다 19세기 중엽 영국이 티베트에 들어와 반세기 넘게 티베트를 지배했다. 티베트가 중국으로 넘어온 것은 1951년 중국의 인민해방군이 티베트를 점령하면서부터. 이후 1965년 9월 1일 티베트는 정식으로 중국의 소수민족 자치구인 ‘시짱자치구‘가 됐다.

    티베트는 중국의 행정구역으로 편입되면서 영토가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티베트 민족이 사는 칭짱고원의 면적은 250만km2로, 중국 전체 면적의 4분의 1에 이른다. 티베트 민족이 사는 지역은 시짱자치구와 윈난(雲南), 쓰촨(四川)성의 서쪽, 칭하이성의 4분의 3 지역과 신장웨이우얼(新疆維吾爾)자치구의 남부로 엄청나게 크다. 전체 민족의 분포 지역 가운데 절반만이 자치구로 인정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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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티베트 개황
    면적 122.84만km2
    인구 277만 명
    평균 고도 4200mm
    주민 구성 티베트 족 92.2%, 한족 5.9%,
    기타 소수민족 1.9%
    칭짱철도(거얼무⇔라싸) 2기 공정
    공사기간 - 2001년 6월~2006년 6월
    총 연장 1142km
    동토 구간 550km
    해발고도 4000m 이상 구간 960km
    최초해발고도 5072m
    최고해발고도 역(탕구라산역) 5068m
    동토 최장고가철로 11.7km
    티베트행 열차 노선 .상하이↔광저우 노선은 조만간 개통 예정
    노선 거리(km) 소요시간 횟수
    베이징↔라싸 4064 48 매일 1회
    상하이↔라싸 4358 53 격일 1회
    광저우↔라싸 4980 58 격일 1회
    청두↔라싸 3300 45 매일 1회


    ´당근과 채찍´ 싣고 칭짱철도 달린다
    중국의 대(對)티베트 정책은, 어느 경우라도 티베트가 중국 영토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티베트는 1959년 중국의 지배에 불만을 품고 독립투쟁을 벌였다. 하지만 투쟁은 인민 해방군에 의해 신속히 진압됐고, 투쟁을 주도한 14대 달라이 라마는 10만여 주민과 함께 인도로 망명했다.

    한동안 잠잠했던 티베트는 1980년대 말부터 동요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1989년 3월에 대대적인 독립 시위가 있었다. 후 주석이 티베트와 인연을 맺기 시작한 것은 바로 이때다. 후주석은 시위 직전이 1988년 말 티베트 당서기로 임명됐다.

    온화한 분위기의 외모와 달리 후 주석은 티베트의 독립투쟁을 매우 강경하게 진압했다. 티베트를 반드시 중국의 행정구역 안에 둬야 한다는 중국의 기본정책에 충실한 조치였다. 이는 후 당시 당서기가 덩샤오핑(鄧小平)등 중국 중앙지도부의 신임을 굳건히 하는 계기가 됐다. 당시 그가 작성한 ‘티베트의 현 국면과 이에 당면한 우리의 임무‘라는 보고서를 보면 그의 티베트 정책의 골자를 금방 알 수 있다.

    ”1987년 9월 27일 이래 라싸에서 여러 차례 소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역사적인 배경이 있었던 데다, 국제적인 검은손의 막후 조정으로 심각정을 더했다. 중국이 분열되고 사회주의가 전복될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중략) 이 같은 상황에서 안정과 평화는 티베트의 첫 번째 임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반(反)분열 투쟁이다.”

    후 당시 당서기는 독립시위를 진압한 뒤 티베트의 경제 수준을 높이는 정책을 펼쳤다. 티베트의 생활수준을 높임으로써 티베트 주민의 불만을 줄인다는 의도였다. 이 같은 후 주석의 대(對)티베트 정책을 ‘양수경(兩手硬)정책” 이라 불린다. 당근과 채찍을 겸비해야 티베트가 중국에 영속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후 주석이 티베트 당서기로 있는 4년 동안 농업 등 티베트의 생산력은 상당히 발전했다.

    그러나 후 주석은 평균고도 4200m에 이르는 티베트의 고산기후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자주 베이징에서 치료를 받았고, 상당 기간을 라싸에서 나와 쓰촨성의 성도인 청두(成都)에서 근무했다.

    칭짱철도 역시 후 주석의 양수경 정책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칭짱철도를 부설함으로써 티베트의 독립투쟁이 일어날 경우, 즉각 인민해방군을 투입해 다른 외국 세력이 손을 뻗치기 전에 시위를 진압할 토대를 마련한 것이다. 또한 철도 개통으로 인해 관광객이건 이주민이건 티베트에 한족이 대거 들어가게 됐다. 여기에는 티베트 생활문화 자체를 많이 한족화(漢族化)함으로써 티베트 민족의독립 의지를 꺾어놓겠다는 계산도 담겨 있다.

    문제 생기면 철도로 즉각 軍 투입 가능

    이와 함게 중국은 동남아시아를 에둘러 가지 않고서도 곧바로 인도양으로 나갈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1962년 국경분쟁 이후 44년간 봉쇄했던 중국과 인도의 나투라 교역로를 7월6일 재개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해발 4545m 높이에 위치한 나투라 고개는 고대 실크로드 대동맥의 하나였으며, 60년대 이전까지 이 길을 통한 양국 간 무역이 매우 활발했다.

    결국 칭짱철도는 티베트 민족에게 한편으로는 생활수준을 높일 수 있는 계기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중국의 실질적인 지배를 확실히 하는 ‘양날의 칼‘이 될 전망이다.

    중국 언론은 앞으로 매년 관광객이 90만 명 이상으로 증가해 소득 증대를 가져올 것이라는 등 긍정적인 면만 부각시키고 있다. 그러나 홍콩 언론과 서방국가는 칭짱철도가 중국의 티베트 지배를 강화함으로써 결국 티베트의 독립 여망이 사실상 사라지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현재 47년째 망명생활을 하며 독립투쟁을 이끌고 있는 달라이 라마도 시간이 흐를수록 중국의 힘을 인정하는 쪽으로 가고 있다. 독립을 주장하던 그는 최근 국방과 외교를 제외한 고도의 자치권만 줘도 좋다는 메세지를 중국 정보에 보낸 바 있다.

    그러나 중국 정보는 다른 자치구와 달리 티베트에만 더 많은 자치를 허용할 수 없다는 태도다. 대신 칭짱철도 부설 등 중국의 실질적 지배력을 높여 독립 세력의 힘이 저절로 약화 되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칭짱철도는 독립을 바라는 티베트인에게는 ‘보약이 아닌 독약‘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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