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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관매직 스캔들 영국 정가 회오리바람

블레어에게 돈 빌려준 사람들 상원의원 지명 야당도 돈거래 파문 … 선거법 개편 촉발

  • 코벤트리=성기영 전 동아일보 기자 sungkiyoung@gmail.com

매관매직 스캔들 영국 정가 회오리바람

국회의원직을 돈 주고 샀다? 민주주의 역사가 일천한 신생 독립국도 아니고, 의회정치의 선진국인 영국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면 믿을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러나 노동당에서 시작해 야당인 보수당까지 덮친 영국 정치권의 ‘매관매직’ 의혹은 결국 선거자금 및 선거법 개편 논의로까지 확대되면서 한 달 가까이 이어지고 있다.

영국 언론은 정가에 회오리바람을 몰고 온 이번 정치자금 스캔들을 ‘캐시 포 피어리지(cash for peerage)’라고 부른다. ‘돈을 주고 (상원의원) 작위를 샀다’는 것이다. 한국에서도 비례대표 의원의 기부금 관행을 빗대 ‘전국구(錢國區)’라는 말이 유행한 적이 있다. 그러나 영국 의회의 상원의원은 종신명예직이라는 점에서 우리나라 4년 임기의 비례대표와는 차원이 다르다.

문제의 발단은 노동당에서부터 시작됐다. 토니 블레어 총리가 지난해 총선 직전 10여 명의 지지자들에게서 총 1400만 파운드(약 240억원)를 빌려 선거자금으로 사용한 뒤 이들에게 총리 지명직 상원의원 자리를 내주었다는 의혹이 불거진 것이다. 상원의원으로 지명된 거액 대부자들은 대부분 100만 파운드(약 17억원) 이상을 빌려준 기업인들로 드러났다.

특히 차기 노동당 당수 승계가 확실시되는 고든 브라운 재무장관은 물론 노동당 재정책임자 등도 거액의 선거자금을 빌린 사실을 모르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면서 블레어 총리는 당 내에서도 궁지에 몰리는 형편이 됐다. 물론 블레어 총리는 ‘될 만한 사람이 된 것’이라며 상원의원 지명에 대가성이 없음을 강조했다.

블레어, 240억원 선거자금으로 빌려



하지만 그는 여론의 압력에 밀려 노동당에 선거자금을 빌려준 12명의 명단을 공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노동당이 공개한 대부자 명단에는 부동산 개발업체 대표, 대형 병원장, 현직 각료 등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유명인사들이 포진해 있었다.

영국의 현행 정치자금법은 5000파운드(약 850만원) 이상의 정치자금 기부자에 한해서만 실명을 밝히도록 하고 있다. 이러한 규정은 블레어 총리가 투명한 정치문화를 역설하며 도입한 것. 그러나 기부가 아닌 ‘대출’인 경우 이러한 제약을 받지 않기 때문에 블레어 총리가 정치자금을 빌렸다고 해서 법적으로 문제 삼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자신이 치적으로 내세우는 정치자금법 개혁안의 허점을 노렸다는 점이 오히려 블레어에게 더 큰 정치적 상처로 남을 수밖에 없다.

사정은 보수당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었다. 노동당에서 시작된 정치자금 스캔들의 와중에서 보수당 역시 모두 16명의 지지자에게서 노동당보다 많은 1600만 파운드(약 270억원)를 빌린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특히 얼마 전 당사 마련 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엄청난 빚을 진 보수당 처지에서는 이번 사태의 파장이 어디까지 갈지 촉각을 곤두세우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지난해 말 보수당 당수에 당선된 데이비드 캠런은 보수당이 거액 대출금을 끌어올 당시 당수 자리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블레어보다는 상대적으로 비난의 화살로부터 자유롭다. 그러나 젊음과 참신성을 무기로 ‘30대 돌풍’을 일으켜 역대 최연소 보수당 당수에 오른 캠런으로서도 돈과 관련된 잡음이 자신의 이미지에 도움 될 것이 전혀 없다. 블레어 총리와의 전격 회동에서 캠런이 “영국에서 정치자금 개혁을 제안할 수 있는 지도자는 나뿐”이라며 블레어와의 차별화에 나선 것도 이런 맥락이다.

노동당의 ‘우향우’와 보수당의 ‘좌향좌’로 인해 여야로 갈려 있으면서도 정책별 공조를 즐기고 있는 블레어와 캠런은 정치자금 문제에서도 일단 한목소리를 냈다. 가능하면 거액 기부금을 줄이고 정부가 선거자금을 관리하자는 것이다. 물론 두 사람의 긴급회동은 일부 소수당이 이 사건에 대한 사법당국의 조사를 요청하고 있는 데 대한 ‘물타기’ 성격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블레어·캠런 정치자금 문제 한목소리

그러나 블레어 총리가 이미 1999년 귀족 작위를 갖는 세습직 상원의원을 수술대에 올린 경력을 갖고 있는 데다 캠런 역시 ‘개혁 이미지’를 무기로 삼고 있어 두 사람 모두 어떤 형태로든 선거자금 개혁안을 내놓아야 한다는 부담을 안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기선 잡기에 나선 캠런은 블레어와의 긴급회동에서 개인이건 단체건 간에 한 사람이 5만 파운드(약 8500만원) 이상을 기부하지 못하도록 법정한도액을 두자는 방안을 내놓았다. 그러나 노동당은 이에 대해 신중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노동당이 망설이는 이유는 대형 노조의 기부금에 제약을 가할 경우 노동당의 전통적 지지기반인 노조 세력의 영향력이 줄어들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다. ‘정당과 선거자금’이라는 연구보고서를 펴낸 케이스 윙 박사에 따르면 지난 임기 4년 동안 노동당 기부액의 3분의 2가량을 노조 기부금으로 충당한 것으로 드러났다. 그중에서도 공공부문 통합노조(UNISON), 일반 운수노조(TGW) 등 4대 노조 연합체의 기부금 비중이 절반 정도를 차지한다.

당장 캠런의 제안대로 5만 파운드라는 기부금 상한액을 둘 경우 그동안 3000만 파운드(약 510억원)를 기부했던 4대 노조의 기부금은 20만 파운드(약 3억4000만원)를 넘지 못하게 된다. 노동당의 최고 지지기반이었던 노동조합 세력이 정치적 영향력을 잃을 것은 뻔한 일.

노조 관계자들도 정부의 선거 보조금을 늘리는 방안에 대해 부정적이다. 정부 보조를 늘릴 경우 그 부담을 고스란히 떠안게 될 납세자들도 선거공영제 방안에 그리 호의적인 것 같지는 않다. 노동당과 보수당이 자신들을 덮친 ‘매관매직’ 의혹에서 벗어나기 위해 선거공영제라는 카드를 빼 들기는 했지만, 앞날이 순탄치 않을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는 이유다.



주간동아 531호 (p58~59)

코벤트리=성기영 전 동아일보 기자 sungkiyoung@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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