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저리그의 전설적인 투수 사이 영.
아무튼 야구에서 승패가 가려지면 타자에게는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지만 투수에게는 반드시 승리와 패전이라는 기록이 남는다. 1승은 공 1개 던지고도 올릴 수 있지만 150개 이상을 던지고도 올리지 못할 수도 있다. 실력과 함께 운도 따라주어야 승리투수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프로야구에서 무려 511승을 올린 투수가 있다.
메이저리그의 전설적인 투수 사이 영이 바로 그. 사이 영은 풀타임 선발로 22년간 활약하면서 단 한 번도 부상을 입지 않았으며, 최다승(511승) 최다패(316) 최다선발등판(815) 최다이닝(7354⅔) 최다완투경기(749) 등 각종 ‘최다’ 기록을 갈아치웠다.
단 한 번도 부상 없이 철저한 몸관리
그는 30승 이상을 5차례나 달성했으며, 20승 이상은 15차례나 올렸다. 오히려 20승에 실패한 시즌이 7차례로 더 적었다. 하지만 강한 투수의 척도라고 할 수 있는 방어율과 탈삼진에서 1위에 오른 것은 각각 두 번에 그쳤으며, 최다완봉에서도 역대 1위가 아닌 4위(76)에 올라 있다.
사이 영의 본명은 덴턴 트루 영(Denton True Young)이다. ‘사이’는 사이클론(cyclon·폭풍)의 줄임말로, 1899년 그의 공을 받던 포수가 “공이 사이클론처럼 빠르네”라고 말한 데서 비롯했다.
사실 사이 영은 파워피처라기보다 컨트롤 위주의 투수였다. 22시즌 중에서 최소 볼넷 허용률 1위에 14차례나 올랐으며, 통산 9이닝당 볼넷 수가 1.48에 지나지 않는다. 사이 영은 두뇌피칭의 일인자였으며, 팔의 각도를 바꿔 던지는 ‘다양한 커브’로 타자들을 농락했다.
1890년 내셔널리그 클리블랜드 스파이더스에서 데뷔한 그는 이듬해 27승을 거두며 팀의 에이스로 뛰어올랐다. 당시 최대 라이벌은 현재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인 보스턴 비네이터스의 키드 니콜스. 1895년 클리블랜드는 정규 시즌에서 2위를 차지한 뒤 ‘탬플 컵 시리즈’에서 1위 보스턴을 누르고 우승을 거머쥐었다. 사이 영은 1898년 시즌까지 9년간 클리블랜드에서 241승을 올렸다.
재정위기에 빠진 클리블랜드가 주축 선수들을 모두 내다 팔면서, 사이 영은 세인트루이스 퍼펙코스(현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로 이적했다. 사이 영은 세인트루이스로 팀을 옮겼으나 샐러리캡(연봉총액 제한 제도)으로 인한 적은 연봉이 늘 불만이었다. 그는 2년 뒤 당시로는 최고액인 3000달러의 연봉을 받고 신생팀이었던 아메리칸리그의 보스턴 필그림스(현 보스턴 레드삭스)로 옮겼다.
1회 월드시리즈 초구 행운도
보스턴으로 갈 때 사이 영의 나이는 34살로 노장이었다. 그러나 전성기는 계속 이어져 첫 시즌이었던 1901년 트리플크라운(다승 방어율 삼진왕)을 차지했고, 33승으로 팀 승리를 40% 넘게 이끌었다. 사이 영은 처음 3년간 93승(30패)을 거두며 다승왕을 3연패했고, 1903년에는 아메리칸리그 우승팀과 내셔널리그 우승팀이 9전5선승제로 우승팀을 가리는 제1회 월드시리즈에서 초구를 던지는 영광을 누렸다.
사이 영은 보스턴에서 8년간 192승을 올려, 보스턴이 아메리칸리그의 명문팀으로 자리매김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1904년은 가장 화려한 시즌이었다. 사이 영은 4월 중순부터 5월 중순까지 44이닝 연속 무실점과 24⅓이닝 연속 무안타 기록을 세웠다. 5월5일에는 당대 최고의 왼손투수였던 필라델피아 어슬레틱스의 루브 웨델과 격돌해 생애 유일의 퍼펙트게임을 따냈다. 타자로서의 능력도 뛰어났던 그는 그해 3할2푼1리의 높은 타율을 기록하기도 했다.
1908년 41살의 영은 뉴욕 하이랜더스(현 뉴욕 양키스)를 상대로 생애 세 번째 노히트노런을 달성했다. 하지만 시즌 뒤 보스턴은 1만2500달러를 받고 사이 영을 클리블랜드에 팔아넘겼다. 클리블랜드에 복귀한 첫 해인 1909년에 17승을 올렸지만, 이듬해 7승에 그쳐 20년 만에 10승 달성에 실패했다. 1911년 시즌 중 다시 내셔널리그 보스턴 브레이브스(현 애틀랜타 브레이브스)로 이적한 사이 영은 마지막 등판 경기에서 1대 0으로 이겨 511승째를 따냈다.
1936년 메이저리그에 명예의 전당이 처음 생기고 타이 콥, 베이브 루스를 비롯한 ‘최초의 5인’이 첫 번째 헌액의 영광을 안았지만, 그 안에 사이 영은 포함되지 못했다. 사이 영은 이듬해인 1937년 76.12%의 비교적 낮은 투표율로 명예의 전당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