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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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하면 바보, 못하면 쪼다

대한민국은 ‘연애 중’지위고하 남녀노소 불문 ‘사랑의 열병’… 대중매체는 온갖 금기 뛰어넘어 확대 재생산

  • 이나리 기자 byeme@donga.com 송홍근 기자 carrot@donga.com

    입력2004-05-13 13:5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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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 하면 바보, 못하면 쪼다
    ”상담을 원하는 중년 남녀가 가장 많이 들고 오는 주제가 ‘연애’예요. 남들은 외도라지만 이들은 연애라고 하죠. 사귀는 이가 있다, 그런데 ‘진짜’ 시작해도 되겠느냐. 결국 면죄부를 원하는 건데 이들은 이미 ‘시작’한 거죠.”

    임상심리상담가이자 영화평론가인 심영섭씨의 말이다.

    “말 그대로 연애에 목숨을 거는 겁니다. 나이 불문하고 삶의 조건 불문하고. 보면 참 평범한 사람들이거든요. 그런데 아주 지독스레 사랑의 열병을 앓고 있어요.”

    신경정신과 전문의 하지현씨(용인정신병원)도 말한다.

    바야흐로 ‘연애 만세’, 연애 열풍의 시대다.



    소설가 김영하씨는 이런 표현을 썼다.

    “마치 30, 40대들에게 낭만적 연애에 대한 지상명령이라도 떨어진 것 같아요. 자, 뛰어!”

    그래서 지금 거리는, 수많은 영화관과 레스토랑, 숙박시설 들은 삶의 의미 혹은 쾌락의 모든 것을 연애에서 찾으려는 사람들로 북적댄다. 이른바 ‘연애 산업’도 덩달아 성장일로다.

    “제가 연애 칼럼니스트라는 타이틀로 글을 쓰기 시작한 게 3년 전이에요. 그때만 해도 그런 말 쓰기가 참 쑥스러웠는데 지금 보세요. 연애 컨설턴트도 있잖아요.”

    ‘캣우먼’이란 ID로 유명한 ‘러브 패러독스’의 작가 임경선씨. 그는 “연애담론이 일종의 주류 대접을 받기 시작한 지 2년 정도 된 것 같다. 이전에야 어디 연애라는 것에 대해 그리 야단스레 떠들 수 있었나. 배웠다는 사람이 그러면 여자는 여성의식이 없는 걸로, 남자는 사회의식이 없는 걸로 치부됐다. 지금은 연애 못하는 사람이 ‘지진아’ 취급을 받는다”고 했다.

    영화, 드라마, 광고며 출판물 들에는 온갖 연애담론, 성담론이 넘친다. 그들이 전시하는 연애의 양상들은 참으로 다채롭고 심지어는 공격적이다. 1960년대 어린이들의 천진난만한 세계를 그렸다는 영화 ‘아홉살 인생’조차 메인 카피는 “그 나이에도 지키고 싶은 여자가 있다”이다. 영화 ‘스캔들’은 “통하였느냐”고 묻고, ‘바람난 가족’은 “아직도 가족(부부)끼리 자는 사람이 있느냐”고 비웃는 듯하다.

    드라마도 예외는 아니다. 이혼녀와 총각의 결합, 25년 나이 차쯤은 ‘장난’이다. 사랑 앞에 넘지 못할 산이 있을까. 이복남매, 동성간의 연애도 OK. 일단 잠부터 자고 보는 연애(‘옥탑방 고양이’), 섹스까지 양다리 걸치는 연애(‘발리에서 생긴 일’), 기혼 남녀간의 연애(‘아름다운 유혹’)도 쿨하거나 낭만적이기만 하면 ‘다 받아주어라’다.

    안 하면 바보, 못하면 쪼다

    공공장소에서 거리낌 없이 애정을 표현하는 연인들.

    금기를 뛰어넘는 연애보다 짜릿한 것은 없다. 수많은 대중매체들이 “짜릿하게, 더 짜릿하게!”를 외치는 사이 ‘싱글즈’의 당당한 독신모, ‘결혼은, 미친 짓이다’의 ‘첩 둔 유부녀’쯤은 거의 트렌드 수준이 돼버렸다. 연애에 빠진 지아비를 속수무책 바라만 보며 눈물짓는 지어미는 이제 드라마 속에 없다. ‘앞집 여자’의 유호정도, ‘애정의 조건’의 채시라도, ‘악녀와 성녀’의 서유정도 모두 새 남자를 찾아 떠나버렸다. 하지만 그들을 비난하는 것은 공평치 않다. 기혼 남성과 사랑에 빠진 요즘 드라마 속 여성들은 결코 “잘못했다”고 빌지 않는다. “사랑 없는 결혼은 빨리 끝내는 게 최선 아닌가요?”가 이들의 ‘공식 멘트’다. “세상이 뭐 이러냐”고 목소리를 높이고 싶다면 먼저 주위부터 둘러볼 일이다. 자칫 “촌스럽다”는 핀잔을 듣기 십상이다.

    영페미니스트 김신현경씨는 “드라마가 전 세대를 망라하는 국민적 감수성을 재현하는 것이라면 영화는 특정 젊은 세대의 감수성을 재현한다”고 했다. 그래서 드라마 속 연애는 으레 결혼으로 이어지고, 성은 가족간 애증의 씨앗으로 묘사되곤 한다는 것. 하지만 2000년대식 드라마는 다르다. ‘성과 연애에서 가족의 모습은 지운 채 제 갈 길을 가는 형태’로 방향을 잡아가고 있는 것이다.

    김영하씨는 “소설도 그렇다. 연애소설의 묘미는 금기를 넘는 데 있다. 하지만 소설에는 더욱 엄격한 도덕적 잣대가 들이대어지곤 한다. 소설이 당대의 도덕을 정확하게 묘사하면 퇴폐적이라는 얘기를 듣게 된다. 요즘 소설에 등장하는 온갖 형태의 연애를 보라. 아직도 묘사되지 않은 진정 ‘불온한 연애’라는 것이 얼마나 있나. 그것은 이미 당대의 모럴”이라고 말했다. 그는 “그런 면에서 김기덕 감독은 정말 저널니스틱한 감각이 뛰어난 사람이다. ‘사마리아’에서 마침내 ‘롤리타식 연애’라는 새 금단의 영역을 발굴해내지 않았느냐”고 덧붙였다. 어쨌든 그렇게 현실과 영화, 현실과 소설, 현실과 드라마는 서로 물고 물리며 오늘의 신(新)연애지상주의를 확대 재생산하고 있다.

    이제 초등학생에게도 커플이니 연애니 하는 말은 낯선 이야기가 아니다. 라디오 프로그램에 “아직 키스를 못 해봐 부끄럽다”는 6학년 여학생의 사연이 버젓이 소개되는 세상이다. 회사원 김모씨는 “초등학교 5학년인 딸이 최근 남자친구와 헤어졌다. 이유를 물으니 ‘차일 것 같아 먼저 찼다’고 하더라”며 허허 웃었다. 안 풀리는 연애로 가슴앓이하는 초등학생 자녀에게 “공부나 하라”고 윽박지르는 이는 그야말로 ‘간 큰 부모’다.

    신의진 연세대 의대 교수(소아정신과)는 “중학교 1학년인 아들에게 ‘사귀자’는 여자아이가 있어 ‘지금은 공부가 더 중요하니 힘들어도 참아달라’고 부탁했다. 아들이 받아들여줘 너무 고맙고 기특하다”고 했다.

    그러나 주류는 이렇게 ‘고맙고 기특한’ 아이들이 아니다. 5월7일 서울 종로3가의 한 패스트푸드점에서 만난 김지훈군(15)과 한 살 아래의 여자친구. 김군은 “범생이(모범생) 몇 명하고 진상(‘꼴불견인 사람’을 가리키는 은어)들 빼곤 다 애인이 있다”고 주장했다. 김군의 여자친구 또한 “요새 남자친구 없으면 학교에서 왕따당한다. 그게 싫어 친구들한테 돈까지 줘가며 ‘일일 애인’을 구하는 애들도 있다”고 했다.

    서울 정동의 멀티플렉스 극장 ‘스타식스정동’ 앞. 모델 뺨치는 패션 감각을 자랑하는 앳된 청년이 교복치마를 입은 소녀와 팔장을 낀 채 걷고 있다. 정우준군(19)은 재수생, 조수진양(18)은 고3 학생이다.

    “교복 입고 팔짱 끼면 안 된다는 법이라도 있나요. 어차피 오늘은 공부 제끼는 날인데요, 뭐.”

    이렇게 말하는 조양은 ‘날라리’가 아니다. 보통의 고3 수험생들처럼 오전 8시부터 자정 넘어서까지 입시 준비에 매달린다. 성적은 상위권. 남자친구인 정군도 서울대 법대를 목표로 재수를 택한, 조양의 표현대로라면 ‘공부기계’란다.

    안 하면 바보, 못하면 쪼다

    초등학교 앞 문방구에서 파는 커플링. 친구들에게 공식 커플임을 인정받는 일종의 상징물이다.

    “반 친구 중 절반쯤은 연애를 해요. (남자친구는) 동갑내기랑 연상이 반반이고요. 25, 26살 아저씨랑 사귀는 애들도 몇 명 있어요. 나이 많은 남자가 편하잖아요. 애인 없는 애들은 바보 취급받아요. 공부도 못하는 게 애인도 없다고. 공부 잘하고 남자친구까지 있으면 최고죠. 1, 2등 하는 애들도 남자친구 사귀려고 얼마나 노력하는데요.”

    20, 30대 미혼 남녀의 연애는 우리가 항용 알고 있는 ‘그 연애’에 가장 가까운 모습을 띠고 있다. 최근의 큰 변화라면 ‘연애=결혼’의 등식에 연연해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연애’ 하면 자연스레 ‘성관계’와 ‘동거’를 떠올린다는 것이다.

    “연애의 핵심이 순수한 사랑의 감정에서 육체를 통한 자아정체성의 재발견이라는 쪽으로 많이 옮아간 것 같아요. 특히 여성의 경우가 그러한데, 결혼을 싫어하는 여자들이 요즘 얼마나 많아졌나요. 그들이 갈망하는 건 결점 많은 결혼제도에의 무조건적 편입도, 낭만적 팬터지에 사로잡혀 제 발등 제가 찍는 식의 너절한 연애도 아닌 거죠. 영화 속 헤로인들처럼 욕망에 당당하면서 쿨하게 맺고 끊는 능력 있는 여자가 되고 싶은 거예요. 뭐, 실제로 그렇게 될 수 있냐 하는 건 또 다른 문제지만.”

    심영섭씨의 말이다.

    반면 일이 좋고 꿈이 많아, 끈적끈적한 감정의 뒤엉킴이 싫어, 연애 없이도 충분히 행복한 까닭에 사랑 찾기에 열성을 보이지 않는 이들은 “연애 안 하면 바보, 못하면 쪼다로 보는 시각이 너무 싫다”고 말한다. 대학 교직원인 정미현씨(33·여)는 “요즘 젊은이들의 삶이란 게 다 거기서 거기 아닌가. 대중문화가 기획하고 유포한 시나리오에 맞춰 뭣도 모르고 춤추는 꼴이다. 연애지상주의는 또 하나의 사회적 폭력”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기혼 남녀 불륜 죄의식 무너져도 쿨한 연애 시기상조

    안 하면 바보, 못하면 쪼다

    2003년 사법연감에 따르면 매일 130쌍이 이혼을 했다. 그 사유 중 47.3%는 ‘배우자의 부정 행위’다.

    30대 이후 기혼 남녀의 연애에 대해서는 너무도 많은 사례와 담론, 객관적 수치들과 ‘전설’이 난무하는 까닭에 덧붙여 길게 말할 거리가 별반 없다. 분명한 건 “불륜은 천벌 받을 일”이라는 ‘사회문화적 합의’ 내지 도덕률이 허무하다 싶을 만큼 전면적으로 깨져나가고 있다는 점이다. ‘나쁜 짓’이긴 해도 ‘못할 짓’은 아니라는 인식이다.

    “세상에 연애만큼 좋은 게 있나요. 살아 있음을 그렇게나 생생하게 느끼게 해주는 것이 또 있나요. 그 이상 사람과 사람 사이에 완벽한 소통을 가능케 하는 것이 있나요. 사랑과 인정을 주고받고픈 인간의 원초적 욕구를 연애만큼 충족시켜주는 것이 어디 있나요.”

    논술학원 원장 정모씨(42·여). 30대 후반 2년 동안 직장 상사와 열애를 나눴다는 그의 열띤 토로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는 “시작해서 중간까지는 참 좋지만 연애의 끝은 씁쓸하더라”고 했다. “원래 낭만이라는 게 뒤집어보면 대충 사기잖아요. 감정에 놀아나는 거니까. 한창 좋았을 때 생각하면 지금도 등이 저릿저릿한데 아휴, 이젠 힘들어 못하겠어요.”

    그런 면에서 대중매체가 유포하고 수많은 이들이 동경하는 ‘쿨한 연애’란 그 자체로서 모순일 수 있다. 19세기에 ‘발견’돼 20세기에 전 세계를 휩쓴 고전적 연애의 핵심은 목숨마저 내던질 수 있는 지고지순한 사랑. 그런데 우리가 아는 쿨한 연애의 모토는 ‘책임이나 정절 따위 묻지 않고 헤어질 땐 깔끔하게’다.

    임경선씨는 “아직 우리나라에서 쿨한 연애는 시기상조”라고 말했다. “그러려면 사랑이란 감정과 연애를 분리할 수 있어야 하거든요. 그런데 우리가 생각하는 연애는 아직까진 몸, 마음, 생활이 같이 가는 거잖아요. 모르죠, 10년 뒤는 또 어떨지. 미국이나 유럽은 이미 그렇게들 하고 있으니까요.”

    그렇다. 10년 뒤 연애는 대체로 그러할지 모른다. 종로 거리에서 만난 15살 김지훈군에게 물었다. 앞에서 밝혔듯 그의 곁에는 14살 난 여자친구가 있었다.

    “지금 둘이 연애하는 건가요?”

    김군이 답했다.

    “사랑하지는 않고 연애만 해요.”

    대한민국의 연애는 오늘도 ‘진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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