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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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체장들, 교도소 담 위를 걷다

사업 추진 과정서 검은 유혹 예사 … 돈 선거 풍토 탓 본전 생각에 발 잘못 디딜 수도

  • 윤영호 기자 yyoungho@donga.com

    입력2004-05-13 14:4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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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체장들, 교도소 담 위를 걷다

    2003년 10월22일 검찰수사를 받기 위해 검찰청으로 들어가는 박광태 광주시장.

    1998년 김대중 정부가 출범한 직후의 일. 국가정보원(이하 국정원) 광주지부에서 전남 H군 부군수에게 임기 만료를 앞둔 현직 군수 J씨가 재임 시절 펼친 사업에 대한 자료를 ‘은밀히’ 요청했다. 깜짝 놀란 부군수는 ‘의리상’ J군수에게 보고했고, J군수는 자신의 후원자로 여당이 된 H군의 새정치국민회의(현 새천년민주당) K의원에게 SOS 신호를 보냈다.

    검찰 마음만 먹으면 단체장 자리 보전 힘들다?

    그 효과는 곧바로 나타났다. K의원이 이종찬 당시 국정원장에게 강력히 항의한 탓인지 국정원 광주지부 측이 J군수 뒤를 캐는 일을 중단했다. 당시 국정원 광주지부 관계자는 “본부 쪽에서 광주지부 고위 관계자들에게 ‘왜 시키지도 않은 일을 해 평지풍파를 일으키느냐’는 질책이 떨어진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당시 H군 주변에서는 이런 움직임을 두고 현 군수인 L씨 ‘군수 만들기’ 프로그램과 관련돼 있다는 분석이 파다했다. J군수를 끌어내리고 이원장과 가까운 인사로 알려진 L씨를 그 해 지방선거에서 H군 군수로 만들어 이원장에게 점수를 따려는 ‘충성경쟁’에서 비롯됐다는 것. 국정원 측의 이런 ‘공작’은 J군수의 반발로 뜻을 이루지 못했지만 L씨는 우여곡절 끝에 J군수를 제치고 국민회의 공천을 따내 지방선거에서 군수로 당선된 뒤 2002년 선거에서 연임에 성공했다.

    비록 실패하긴 했지만 국정원 광주지부의 행태는 자치단체장들의 약점을 잡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단체장이 펼치는 사업에는 ‘비리’가 스며들 여지가 많은 만큼 언제든 단체장의 숨통을 조일 수 있는 수단으로 이를 활용할 수 있다는 계산이 깔려 있었던 셈이다.



    검찰 관계자들도 “검찰이 마음만 먹는다면 광역이든 기초든 상당수 단체장들이 자리를 보전하기 힘들 것”이라고 말하곤 한다. 2002년 검찰에 구속된 한 광역단체장의 수사 과정에서도 이는 확인된다. 이 단체장은 당시 한 건설업체 사장한테서 편의를 봐달라는 명목으로 수억원을 받았다는 혐의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검찰 수사과정에서 혐의 사실을 완강히 부인하면서 자신에게 돈을 주었다고 진술한 업체 사장과의 대질을 요구했다. 결국 이 단체장의 뜻은 이뤄졌지만 이 사장은 “지금 문제가 된 건으로 수억원을 안 주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동안 인사치레 등으로 준 것을 다 합하면 수억원이 되지 않습니까”라고 받아쳤다는 후문.

    이 단체장은 1심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2심에서는 유일한 증거인 이 업체 사장의 진술이 일관성이 없고 합리성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무죄를 선고받았다. 당시 수사 과정을 잘 아는 한 변호사는 “지금에 와서 보면 이 단체장으로선 억울할 수 있겠지만 검찰이나 국민에게 단체장 이미지가 안 좋게 각인된 데 따른 업보를 진 셈”이라고 말했다.

    지방자치가 단체장 비리 때문에 위협받고 있다는 얘기가 나온 것은 오래 전의 일이다. 지역주민을 위해 일해야 할 단체장이 오히려 자신의 사복을 챙기는 등 각종 비리에 연루돼 자치행정의 신뢰성을 크게 훼손해온 것. ‘6·5’ 재·보궐선거가 실시되는 지역 가운데 부산시와 전남도의 경우 단체장이 비리 혐의로 교도소 수감 중 또는 검찰 수사 도중 자살해 보궐선거 사유가 생긴 곳이다. 또 이번 재·보궐선거 지역은 아니지만 박광태 광주시장도 비리 혐의로 구속돼 재판을 받고 있다.

    물론 세 사람의 비리 혐의는 성격이 약간 다르다. 박태영 전 전남지사의 경우 지사 당선 전 건강보험관리공단 이사장 재직시의 비리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고 있었다. 박광태 시장 역시 시장 당선 전 국회의원 신분이었을 때 현대 비자금을 받은 혐의를 받고 있었다. 반면 안상영 전 부산시장의 경우 시장 재임 시절 업무와 관련해 건설업체에서 1억원을 받은 혐의가 문제가 됐다.

    모범적인 자치행정을 통해 지방자치의 의미를 잘 살리고 있는 단체장들이 훨씬 많다. 그러나 잊을 만하면 터져나오는 게 단체장들의 비리사건인 것도 사실이다. 여기에 노무현 정부 들어서서는 검찰이 청와대 등 권력 핵심의 ‘통제’를 벗어나 독자적인 판단으로 수사를 할 수 있게 되면서 단체장들을 겨눈 칼날이 더욱 날카로워졌다. 이 때문에 앞으로도 단체장들의 비리는 종종 터져나올 것으로 보인다.

    이 같은 단체장 비리는 구조적인 문제 때문에 양산되고 있다는 게 중론이다. 관선 단체장과 부단체장을 역임한 적이 있는 정부의 한 고위관료는 “17대 총선에서는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적어도 그 이전까지는 단체장이 ‘돈 선거’로 얽힌 비리 사슬의 한 축을 담당한 경우가 없지 않았다”고 말했다. 국회의원들이 돈을 써야만 당선될 수 있는 상황에서 돈을 받고 단체장 후보를 공천해주는 경우도 있었는데, 이럴 경우 당선된 단체장은 ‘본전 뽑기’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는 것 아니냐는 얘기다.

    단체장이 돈을 마련하는 데 가장 손쉬운 방법은 관급공사 발주 및 인사와 관련된 금품 수수. 앞의 고위관료는 “관급공사와 관련해 중앙정부는 발주 관청의 자의성을 없애는 방향으로 제도 개선을 해왔지만 건설업자가 이를 회피할 수 있는 방법까지 마련해 제시하면서 ‘도와달라’고 말할 때 이런 유혹을 뿌리칠 수 있는 단체장이 몇 명이나 될지 의문이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 최근 민자유치 사업이 도마에 오르고 있다. 민자유치 사업이란 말 그대로 민간업체가 인프라 시설의 사업성을 보고 먼저 사업을 제안하면 일정한 심사를 거쳐 사업 시행자를 선정해 행하는 사업을 말한다. 그러나 일부 단체장은 먼저 특정업체에 해당 사업을 민자사업으로 제안해보라고 지시해 그 업체를 주간사로 하는 컨소시엄에 사업을 맡기면서 돈을 받은 경우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때 단체장은 이 컨소시엄에 참여하기를 원하는 다른 업체에서도 돈을 받곤 한다는 것.

    단체장 역시 할 말이 전혀 없는 게 아니다. 검찰의 공명심 때문에 단체장이 검찰 수사의 타깃이 되는 경우가 없지 않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검찰 관계자들은 펄쩍 뛴다. 지청장을 역임하다 검찰을 떠난 한 변호사는 “솔직히 지방에서 단체장을 내사한다고 관련 자료를 요청하는 순간 평소 기관장 모임 등을 통해 안면을 익힌 단체장이 전화를 해오면 웬만한 각오 없이는 내사를 계속 진행하기 힘든 것도 사실”이라면서 “엄밀하게 말하면 오히려 검찰이 ‘직무유기’를 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단체장들은 또 현실적으로 선거를 치르기 위해서는 돈이 드는데, 국회의원과 달리 후원회도 인정해주지 않는 것은 그야말로 검은돈을 받으라는 얘기나 마찬가지 아니냐고 주장한다. 전남의 한 기초단체장은 “선거 때 도와준 사람의 편의를 봐줄 수밖에 없는 게 단체장의 현실”이라면서 “앞으로 지방선거도 17대 총선처럼만 깨끗하게 치른다면 굳이 단체장들이 교도소 담 위를 걷는 위험을 무릅쓰고 돈을 받겠느냐”고 반문했다. 결국 돈 안 드는 선거 풍토 조성이 지방자치 정상화의 출발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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