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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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봉에 파리 목숨 프리랜서 한숨 ‘on’

방송제작 기여도 큰 ‘구성작가’ 소모품 취급 …‘묻지마 계약’ 풍토 돈 얘기는 금기시

  • 이남희 기자 irun@donga.com

    입력2004-05-13 16: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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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봉에 파리 목숨 프리랜서 한숨 ‘on’

    한 시트콤 프로그램의 제작을 위해 회의를 하고 있는 방송작가들.

    4년차 방송작가인 김주영씨(가명·27·여)는 지난해 말 새 라디오 프로그램의 구성작가로 합류했으나, 프로그램이 갑자기 없어지는 바람에 실업자가 됐다. 문제는 함께 일하던 PD가 김씨에게는 프로그램 중단 사실을 미리 알려주지 않았다는 것. 방송국 정규직인 PD는 월급을 받으며 얼마든지 다른 프로그램을 구상할 수 있지만, 작가는 프로그램이 사라지면 바로 일자리를 잃는다. 미처 새 둥지를 찾지 못한 김씨는 올 4월 개편 때까지 아르바이트로 전전해야만 했다.

    감동적인 글로, 때론 사회를 꼬집는 위트 있는 멘트로 시청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방송작가는 많은 사람들이 동경하는 직업 가운데 하나다. ‘사랑이 뭐길래’의 김수현 작가에서부터 ‘모래시계’의 송지나 작가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영역을 세운 유명 드라마 작가들은 ‘부와 명예’를 한꺼번에 거머쥔다.

    하지만 ‘프리랜서’란 허울 좋은 이름을 가진 많은 방송작가들은 비정규직의 설움을 호소한다. 대부분 계약이 구두로 이뤄져 고용이 불안정하고, 연차가 낮은 작가일수록 노동 강도가 높아 실질적으로 한 프로그램에만 매달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아이템 선정에서 자막 달기까지 중노동

    특히 작가 지망생으로 방송 일을 시작해 아직 메인작가로 올라서지 못한 보조작가들은 작가가 되겠다는 꿈을 볼모로 강도 높은 중노동에 시달리고 있다. 자료조사원, 스크립터, 취재작가, 섭외작가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는 보조작가들은 대부분 4년제 대학을 졸업한 뒤 방송아카데미 등 전문가 과정을 수료한 재원들. 그러나 하루 10시간 넘게 일에 매달리는 이들이 받는 수당은 한 달에 100만원 안팎이다. PD와 함께 프로그램 제작의 모든 과정에 관여하고 있지만, 기여도에 비해 방송작가의 위상은 너무나 낮다.



    박봉에 파리 목숨 프리랜서 한숨 ‘on’

    서울 여의도에 자리잡은 KBS, MBC, 구 SBS 사옥(위부터).

    “방송 구성작가는 소모품이에요. 사실 방송 현실에서 더 많은 일을 떠맡은 사람은 PD가 아니라 작가죠. 아이템 선정부터 취재와 편집, 심지어 PD의 고유 영역인 자막 달기까지 작가가 하고 있으니까요.”

    쇼 오락 프로그램에서 5년간 방송 구성작가로 활동해온 이지은씨(가명 ·28·여)는 자신의 일상을 이야기해달라는 요청에 한숨부터 내쉬었다. 글을 쓰는 고유업무보다는 PD의 보조자로 전방위적 영역의 일을 모두 떠안아야 하기 때문이다. 얼마 전까지 한 방송국의 요리 쇼 프로그램을 만들었던 그는 대본 쓰는 일은 물론 촬영과 편집에까지 관여했다. 어떤 요리를 선보일지 선정하고, 각종 맛집을 찾아다니며 방송에 나올 집을 결정한다. 출근시간은 오전 10시로 일정하지만 퇴근시간은 정해져 있지 않다. 외주 섭외와 진행은 대부분 작가의 몫이다. 스튜디오 녹화는 PD가 진행을 이끌지만, 작가는 요리를 위해 준비된 가스가 가정용이 아니라 영업용이라는 사실까지 확인해야 할 정도로 세심한 부분까지 챙겨야 한다. 주말에 모처럼 쉬고 있을 때도 “자막을 달아 달라”는 PD의 전화에 회사로 불려나가기도 한다. 야근수당이 있는 것도, 원고료가 많은 것도 아닌데 PD의 잔심부름까지 도맡아하는 게 당연시돼버렸다. 그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해 일주일에 받는 급여는 35만원. 빠듯한 급여에 다른 프로그램도 해볼까 생각해봤지만, 도통 시간이 나지 않았다. “힘들지만 방송작가를 해보겠다”고 찾아오는 후배들을 도시락 싸들고 다니며 말리고 싶은 심정이다.

    ‘열악한 처우’ 반영 90%가 여성

    그는 5, 6년만 더 참으면 진정한 프리랜서로 거듭날 수 있다는 희망마저 버렸다. 8, 9년 경력의 능력 있는 선배들이 “몸값이 비싸다”는 이유로 6, 7개월간 일을 못 구하는 경우를 많이 보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1회분 오락 프로그램의 제작 비용에서 작가 급여로 책정된 금액은 200만~350만원 정도로 한정돼 있다. 이씨는 “PD들은 회당 70만원을 받는 경력이 많은 작가 한 명을 고용하는 것보다 마음대로 부릴 수 있고 30만원 정도만 주면 되는 3, 4년차의 작가 두 명을 고용하길 원한다”면서 작가를 단순히 소모품처럼 활용하는 현실에 불만을 토로했다.

    이러한 현실은 한국방송작가협회(이하 작가협회)가 조사한 통계에서도 드러난다. 2002년 작가협회가 방송3사의 구성 다큐멘터리 작가를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응답 작가 가운데 절반에 가까운 46%가 1년에서 5년 사이의 경력인 것으로 나타났다. 경력 6년에서 10년 사이의 작가들이 약 27.5%, 10년 넘는 경력 작가가 12.3%를 차지했다. 이는 입사 10년차 PD들이 방송국의 중추로서 가장 왕성하게 활동하는 것과 대조적이다.

    박봉에 파리 목숨 프리랜서 한숨 ‘on’

    2002년 MBC 드라마 ‘인어아가씨’에서 성공한 드라마 작가로 등장한 은아리영(장서희). 드라마 작가보다 일반 구성작가가 더 고용 불안에 시달린다. MBC구성작가협의회의 홈페이지(왼쪽).

    더 큰 문제는 PD와 작가가 ‘갑과 을’의 관계라는 점이다. 즉 작가의 고용 여부는 PD의 주관적 판단과 밀접하게 관련돼 있어 작가들이 부당한 조치에 대해 쉽게 발언할 수조차 없는 구조라는 것. 실제로 4월 말 한 보조작가는 큐시트의 점선과 실선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일방적으로 해고됐다. 프로그램의 제작 진행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은 실수였지만 PD의 눈에 벗어난 이상 그가 발붙일 곳은 없었다.

    8년차 작가 오모씨(32)는 두 프로그램을 함께 만든다는 이유로 PD에게 잘린 경험담을 털어놨다. 그는 안정된 ‘정규직’을 경험해보고 싶어 두 달 전 홍보대행사로 직장을 옮겼다.

    “프로그램을 하기로 계약할 때 ‘다른 프로그램을 해선 안 된다’라는 조건 같은 건 없어요. 하지만 몇 년 전 KBS 모 종합교양 프로그램의 보조작가로 일할 당시 단발성 프로그램의 작가 일을 동시에 하다가 PD에게 들켜 해고통지를 받았어요. 그 작품에 피해가 가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는데…. 겸업을 할 수 있는 게 프리랜서의 특권 아닌가요?”

    2003년 국가인권위원회가 실시한 공공부문 비정규직 국가인권실태조사에서는 방송사의 ‘묻지마 계약’ 문제를 지적하고 있다. 방송작가나 자료조사 일을 시작할 때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근로조건조차 모르고 일에 뛰어든다는 것. 1년차 방송작가인 J씨는 “일을 시작할 때 내가 어떤 등급으로 분류돼 돈을 받게 되는지 듣지 못했다. 어린 작가가 급여에 대해 관심을 보이는 것조차 금기시돼 있는 실정”이라고 털어놨다. 그나마 급여의 지급 시기도 “영수증 처리가 안 됐다”는 이유로 늦어지는 경우도 많았다. 5년차 방송작가인 C씨(28·여)는 지난해 모 방송국의 아침 교양 프로그램의 작가로 활동하던 당시 주급을 8주나 늦게 받아야 했다. 방송작가의 급여 지급문제에 대해 명문화한 규정조차 없기 때문이다. 외주 프로덕션과 일한 방송작가의 경우 프로그램이 방송되지 않는 바람에 급여를 받지 못하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남자 작가들이 상대적으로 줄어들고 있는 이유도 ‘열악한 처우’에 따른 결과다. 16년간 쇼 오락프로그램의 작가로 활동해온 김모씨는 함께 일하던 남자 작가를 최근 들어 거의 찾아볼 수 없다며 안타까워했다.

    “현재 방송 구성작가들의 90%가 여성들이죠. 그건 상대적으로 가정을 꾸려갈 의무가 덜한 여성이 적은 급여를 감수하고 일한다고 보면 됩니다. 사실 일하다가 다쳐도 산재보험 혜택 같은 것을 전혀 받을 수 없는 게 우리 일이니까요. 고정적인 급여가 아니니 안심하고 적금을 들 수도 없죠, 법적 계약서가 없어서 불합리하게 일자리가 없어져도 어디에다 호소할 데도 없습니다.”

    열악한 방송작가의 고용 현실에 대해 최근 KBS 구성작가협의회는 ‘모든 작가들이 계약기간과 조건이 명시된 계약서를 작성하고, 사문화된 방송원고료 지급안을 재조정할 것’ 등을 내용으로 하는 요구안을 제시했다. 하지만 방송사와 합의를 거쳐야 하는 등 갈 길이 멀다. 이에 대해 한 라디오 프로그램의 PD는 “공채로 선발하는 PD나 기자에 비해 방송작가의 진입장벽은 낮고, 모든 작가가 검증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이들의 고용을 확실히 보장하는 문제는 논란이 예상된다”고 말했다.

    MBC 역시 보조작가의 처우 문제로 한 차례 진통을 겪었다. 4월2일 MBC 구성작가협의회 홈페이지 게시판에 ‘피디수첩 뉴스서비스 사실은(부제: 작가 구조조정의 실체)’이란 제목의 글이 올라왔다. PD수첩에서 일하던 8명의 ‘서브작가’ 중 한 명의 결원이 생긴 이후 방송사에서 앞으로 ‘서브작가’를 없애고 ‘자료조사원’을 선발하겠다는 입장을 밝히며 벌어진 논란이다. 아이디 ‘PD수첩’은 비정규직 문제의 심각성을 보도한 PD수첩이 정작 방송국 내부의 비정규직 문제를 간과하는 현실에 대해 복잡한 심경을 드러냈다.

    “다들 서브작가라는 자리는 잠시 수련하는 자리, 잠시 거쳐가는 자리니까 문제를 어렵게 만들지 말고 적당히 참으라고만 합니다. 하지만 1~2년 적당히 쓰고 말 자리니까 이렇게 비합리적이고 주먹구구식인 노동환경이 만들어지는 게 아닐까요?”

    서브작가들의 지속적 문제 제기로 PD수첩은 PD들이 작가가 맡고 있던 5가지의 업무영역을 맡기로 하고 합의점을 찾았다. 그러나 정재홍 MBC 구성작가협의회 회장은 “앞으로 뽑힐 자료조사원은 구성작가협의회가 끌어안아야 할 것인지, MBC 비정규직노조가 관여해야 할 것인지를 놓고 고민하고 있다”고 밝혔다.

    위의 논란에서 드러나듯 ‘보조작가’나 ‘자료조사원’으로 불리는 이들은 자신의 입장을 대변해줄 조직조차 없는 실정이다. 작가협회의 회원이 되기 위해서는 메인작가 3년 이상의 경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작가협회에 현재 등록된 회원은 1600명 정도지만, 여기에 등록되지 않은 작가들의 수가 두 배는 될 것이라는 게 관계자들의 추산이다. 10년간 다큐멘터리 구성작가로 활동해온 김모씨(34·여)는 “큰 작가로 성장하기 위해 겪어야 할 과정이라고 강요하기엔, 보조작가가 감당해야 할 업무량이 너무나 많다. 작가의 일 영역조차 제대로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PD는 쉬어도 보조작가는 일해야 한다는 생각은 고쳐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방송 구성작가의 불리한 입지를 극복하기 위해 2001년 8월 마산MBC를 주축으로 한 ‘전국여성노조 방송사 지부’가 출범하기도 했다. 이들이 출범하기 넉 달 전 경남지방노동위원회는 마산MBC분회의 부당노동행위 구제신청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나, 중앙노동위원회는 이들의 신청을 인정했다. 그 후 올 초 고등법원에 이 사안이 올라왔지만 이들이 승소하기는 어렵다는 게 대다수의 견해다. 방송작가와 리포터들이 중심이 된 이 노조는 여전히 단체교섭에 응하지 않는 방송사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다. 프리랜서의 성격을 띤 방송작가의 ‘노조 구성’은 아직 걸음마 단계인 셈. 방송작가의 업무가 ‘특수직종’으로 분류되기에 노동시간이나 보수를 일반 업종의 잣대로 평가하기는 어렵지만, 최소한 능력과 노동량에 따라 보수를 받는 시스템이 갖춰져야 한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14년간의 방송작가 생활을 잠시 중단한 박주필씨는 턱없이 열악한 조건으로 방송작가를 고용하는 현재의 풍토가 결국 방송 전체 풍토에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며 우려를 나타냈다.

    “작가의 수요보다 공급이 많다는 이유로, 싼값에 이를 악용하는 방송국의 편의주의적 발상은 고쳐져야 합니다. 프로그램 제작에 전반적으로 참여하는 작가의 역량은 작품의 질을 가르는 분수령이지요. 하지만 작가에 대한 처우가 낮아질수록 방송작가를 지망하는 인재들이 줄어들고, 이것은 결국 방송 프로그램의 질 저하와 직결되리라 봅니다. 방송작가를 정규직으로 채용하는 것 역시 논란이 있겠지만, 최소한 이들의 노동권은 보장돼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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