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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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카르트적 합리주의의 전복을 꿈꾸다

프랑스 대표화가 장 뒤뷔페, 원시세계로의 퇴행이 타락한 현대인의 질병 치유 주장

  • 중앙대 겸임교수 mkyoko@chollian.net

    입력2006-12-26 10:4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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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데카르트적 합리주의의 전복을 꿈꾸다

    장 뒤뷔페, 땅의 얼굴(1960)

    한불 수교 120주년을 맞아 덕수궁 현대미술관에서 장 뒤뷔페의 전시회가 열리고 있나보다. 뒤뷔페는 전후 프랑스 미술을 대표하는 화가로 ‘야성적인 예술’이라는 뜻의 ‘아르 브뤼’ 운동을 주도했다. 이름에서 시사하듯 아르 브뤼는 정신병자, 원시부족, 어린아이의 예술에서 영감을 얻는다. 그의 그림들은 너무나 원초적이어서 마치 유치원 아이가 벽에 그린 낙서처럼 소박하고 천진하다. 여기서 예술의지는 궁극적 완성을 향해 위로 진화하는 게 아니라 외려 이제까지 쌓아올린 것의 해체를 위해 아래로 퇴행하는 듯하다.

    사실 이는 새로운 생각이 아니어서, 이미 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도 몇몇 화가들이 의도적 퇴행을 시도한 바 있다. 가령 살바도르 달리는 편집증의 상태로 돌아가 초현실적 이미지들을 만들어냈고, 피카소는 그 유명한 ‘아비뇽의 처녀들’을 그릴 때 아프리카 원시미술을 참조했으며, 파울 클레는 1911년 어느 잡지에 이렇게 쓴 적이 있다. “예술에는 또한 근원적 시작이라는 것이 있다. 그것을 우리는 민속학 박물관이나 아이들의 방에서 볼 수 있다. 그와 비슷한 현상이 바로 정신병자들의 그림이다.”

    하지만 전후의 2차 모더니즘은 전쟁 전의 1차 모더니즘보다 더 급진적이었다. 잭슨 폴록의 추상표현주의는 형과 색의 구성을 포기한다. 추상표현주의의 유럽 버전인 앵포르멜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앵포르멜 화가들은 종종 모래, 타르, 나비의 날개 같은 재료들을 물감과 범벅하거나, 칼이나 끌로 캔버스의 표면을 공격한다. 여기서는 물질이 그 원초적 표현성을 가지고 몸부림을 치는 듯하다. 앵포르멜은 이른바 ‘마티에르’라는 거친 질감을 드러내고, 이로써 작품을 보는 것은 시각적 경험에서 촉각적 경험으로 바뀐다.

    문명과 야성

    언뜻 보면 야성적으로만 보이지만 사실 뒤뷔페만큼 철학적인 작가도 없다. 다만 그의 철학이 우리에게 익숙한 것과는 성격이 다를 뿐이다. 예를 들어 근대철학에 따르면 인간은 세계의 주인이다. 주체는 이성을 가지고 자연을 분석하며, 그렇게 얻은 지식을 개념에 담아 언어로 기술한다. 이렇게 자연의 질서를 잡아놓고 인간은 그 안에서 아름다움을 느낀다. 이것이 17세기 이후 프랑스를 지배해온 사유 방식이다. 뒤뷔페의 철학은 바로 이 관념을 공격한다. 그의 작품의 야성은 데카르트적 합리주의의 전복을 꿈꾼다.



    그런 맥락에서 관심을 끄는 것이 그가 언젠가 ‘시카고 예술 클럽’에서 한 강연이다. 제목이 ‘반문화적 입장들’(1951)이었는데 그는 이 강연에서 미개인들이 가진 야성적 사유(pensee sauvage)로 돌아갈 것을 주창한다. 이는 타락한 현대인과 고상한 야만인을 대립시키는 프랑스 철학의 또 하나의 전통을 연상시킨다. 장 자크 루소의 생각과 비슷하게 뒤뷔페 역시 원시세계로 퇴행하는 것을 합리주의적 문명에 걸린 질병을 치유해 원초적 건강함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이해한다.

    데카르트적 합리주의의 전복을 꿈꾸다

    ‘공포’(1924, 맨 왼쪽)와 ‘창 앞의 릴리’(1935).



    데카르트적 합리주의의 전복을 꿈꾸다

    장 뒤뷔페는 재혼한 부인 릴리의 적극적인 권유로 마흔이 넘어 화가가 됐다.

    예술가들이 먼저 세계를 열어주면 철학자들은 나중에 그 속에 들어가 정돈한다. 데카르트적 합리주의에 대한 공격은 1990년대 한국을 휩쓸었던 프랑스 후기구조주의 철학의 일반적 특징. 실제로 데리다, 들뢰즈, 푸코는 사상의 형성기에 앵포르멜 예술의 영향을 받았다. 그런 의미에서 뒤뷔페의 강연은 아르 브뤼의 예술적 선언이자, 동시에 하나의 철학적 사건이었는지도 모른다. 뒤뷔페 전시회에 가는 이들은 거기서 아마 프랑스 후기구조주의 철학이 거친 물질의 형태로 캔버스 위에 발라져 있는 장관을 보게 될 것이다.

    반문화적 입장들

    이 강연에서 뒤뷔페는 먼저 서구인의 인간중심주의(anthropo-centrism)를 공격한다. 서구문화의 특징 중 하나는 “인간이 세계 속의 다른 사물들의 본성과 매우 다르다는 믿음”이다. 서구인들은, 인간은 세계와 다르며 주체는 객체의 주인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원시인들은 다르다. 그들은 세계 속의 모든 사물들이, 그리하여 인간과 다른 사물들의 사이 역시 연속되어 있다고 느낀다. 그래서 그들은 “인간은 존재의 주인이 아니라, 그저 존재들 중의 하나일 뿐이라고 느낀다.”

    두 번째 공격의 표적이 되는 것은 이성주의(rationalism) 사고방식. 서구인들은 이성이 세계의 질서를 그대로 보여준다고 믿고 광기를 위험한 것으로 보아 사회 밖으로 추방하려 한다. 하지만 원시인들은 합리주의의 전능을 믿지 않는다. 때문에 그들은 외려 광기, 섬망(의식장애 상태의 한 가지), 착란과 같은 정신상태를 존중하고 또 높이 평가할 줄 안다. 뒤뷔페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예술은 광기나 착란과 관계가 깊다”고 확신한다. 반 고흐와 같은 이에게서 볼 수 있듯 실제로 광기와 창조성의 경계는 매우 희미하다.

    세 번째 공격 포인트는 개념주의(conceptualism)다. “나는 개념을 인간기능의 가장 훌륭한 부분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개념이란 ‘낡은 사다리 속의 헐렁한 단’ 혹은 ‘이성과 논리라는 악덕과 부딪쳐 물로 응결된 증기’에 불과하다. 중요한 것은 정신의 활동이 개념으로 안착하기 전의 상태, 그리하여 생생하게 살아서 활동하는 상태다.” 그는 자신의 예술, 자신의 철학이 바로 이 깊은 단계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선언한다.

    다음으로 공격을 받는 것은 분석적 사유(analytics). 서구인들은 분석을 좋아한다. “그들은 사물의 껍질을 벗기고, 부분들로 잘게 잘라내 그 각각을 따로 연구함으로써 모든 것을 인식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나무를 인식하려면 그것의 잎새를 스치는 바람, 가지에 앉은 새들, 그리고 그것들의 노래까지도 따로 떼어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뒤뷔페는 “그렇게 생각을 전환한 것이 자기 예술의 중요한 측면”이라고 말한다.

    다섯 번째로 공격의 대상이 되는 것은 씌어진 글. 그가 보기에 “씌어진 언어는 나쁜 도구다. 표현의 수단으로서 그것은 오직 생각의 죽은 흔적만 전달할 뿐이다.” 반면 “말은 구체적이다. 그것은 목청, 억양, 기침, 심지어 표정과 의태를 통해서까지 생명을 얻기 때문이다.” 씌어진 글보다 더 구체적인 것이 또 하나 있으니, 바로 회화다. 로고스중심주의(logo-centrism)에 대한 비판은 뒤뷔페의 캔버스 위에서 거친 재료가 내지르는 소리와 몸짓, 즉 강렬한 표현성으로 실현된다.

    마지막으로 그가 무너뜨리는 것은 서구의 유미주의(aestheti-cism) 문화다. 어떤 것이 다른 것보다 더 아름답다는 관념을 처음으로 발전시킨 것은 그리스인들이었다. 하지만 그가 보기에 “이 세상에 추한 사물, 추한 인간은 없다. 마찬가지로 세상 어디에도 아름다움은 없다. 어떤 대상이라도 매혹적일 수 있다. …이런 생각이 미에 대한 일상적 관념보다 더 삶을 풍부하게 해주리라 믿는다.”

    실제로 뒤뷔페의 캔버스 위에 ‘아름다움’이란 없다. 그럼에도 그 이미지들은 충분히 매혹적이다.

    데카르트적 합리주의의 전복을 꿈꾸다

    작업 중인 장 뒤뷔페와 ‘우룰루프 정원’ 연작 중 하나인 ‘잡담하는 사람Ⅱ’(1969~70, 맨 왼쪽).

    살아 움직이는 물질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뒤뷔페의 비판은 들뢰즈의 철학과 비슷한 면이 있다. 가령 뒤뷔페가 말하는 원시인의 나무-되기, 강물-되기는 ‘천의 고원’에 나오는 청년 한스의 말-되기, 슈만의 아이-되기, 모차르트의 새-되기를 연상시킨다. 이성을 비판하고 광기를 옹호하는 뒤뷔페의 입장은 ‘광기의 역사’를 쓸 때의 미셸 푸코를 연상시킨다. 서구철학의 음성중심주의(phono-centrism)를 공격하는 데리다의 입장은 마치 문자에 대한 음성의 우위를 주장하는 뒤뷔페의 생각을 거꾸로 뒤집어놓은 듯하다.

    데카르트적 합리주의의 전복을 꿈꾸다

    ‘기억할 만한 사건’(1977).

    원시인들은 죽은 사물에까지 생명을 부여했으나 오늘날의 인간들은 살아 있는 생명까지도 죽은 사물처럼 취급한다. 서구문명은 사물을 죽은 것으로 간주해, 사물이 내지르는 소리에 귀를 닫고 그 존재를 경멸하여 그것들을 자신의 소유물로 여긴다. 하지만 원시의 문명은 모든 사물을 살아 있는 것으로 보고(애니미즘), 이미 죽은 것들의 목소리에까지 귀를 기울이며(샤머니즘), 인간이 아닌 다른 사물들을 존중하고 존경하고 심지어 경배하기까지 한다(토테미즘). 뒤뷔페의 캔버스가 실천하는 것은 바로 이 야성적인 형태의 ‘물활론’이다.

    뒤뷔페가 재료에 집착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회화는 본디 물질에 관념을 겹쳐놓은 이중구조를 갖고 있다. 물질과 관념의 경계선에서 전통 회화는 재료의 물질성을 벗고 날아올라 의미가 되고, 조화가 되고, 아름다움이 되려 한다. 뒤뷔페는 다르다. 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뒤뷔페의 캔버스는 기꺼이 다시 물질성으로 내려가려 한다. 그리하여 그의 캔버스 위에서 죽은 물질은 요란한 소리와 몸짓을 내며 다시 살아서 꿈틀거린다. 그곳은 물질의 잠재성이 펼쳐지는 무한한 생성의 공간이자 야성의 사유가 전개되는 영원한 운동의 평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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