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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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뺨치는 군인 … 명성만큼 뛰어난 영화는 없어

  • 이명재/ 자유기고가 min1627@hotmail.com

    입력2005-08-25 16: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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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 자유공원에 있는 한 동상이 철거 논란을 빚고 있다. 끌어내리려는 사람들의 의지도 대단하지만 지키려는 사람들은 더욱 필사적이다.

    45년 전 4·19혁명 당시 시위대 일단은 이 동상 목에 화환을 걸었다. 혁명의 혼란 상황 속에서 혹시 있을지 모를 북한의 위협을 경계하려는 뜻이 있었던 듯하다.

    이를테면 이 외국인의 동상을 일종의 ‘수호신의 사당’으로 여긴 것이다. 한국인들로부터 이처럼 절대적인 숭앙을 받은 동상의 주인공이 누군지 짐작하기 어렵진 않을 것이다. 바로 맥아더였다. 대부분의 한국인에게 맥아더는 한니발이나 나폴레옹과 같은 반열에 드는 명장에다, 특히 나라의 구세주로 각인돼온 인물일 것이다.

    그의 동상이 인천에 세워진 것은 물론 인천상륙작전을 지휘해 6·25전쟁의 전세를 반전시킨 그의 혁혁한 전과 때문이다.

    60년대 말 만들어진 한국 영화 ‘결사대작전’은 당시로선 대작이라 할 만한 작품이다. 이 영화의 소재가 바로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팔미도 등대 요새 침투작전’이었다. 영화에서 맥아더 장군은 민간과 군에서 6명의 특공대를 선발, 이들을 팔미도에 침투시켜 적들을 쳐부순다.



    이 영화에 대한 당시 기록을 보니 작전에 실제 참가했던 인물이 영화에 직접 출연했다고 한다. 그는 “작전 성공 후, 맥아더 장군이 직접 사인한 성조기를 나한테 보내와서 그것을 고이 간직하다, 맥아더 장군의 임종 직전에 미국으로 되돌려 보냈다”고 소개하기도 했다.

    맥아더가 유난히 한국인들에게만 명장으로 비쳐진 건 아니다. 미국 내에서도 매우 우수한 군인이라는 평가를 받았던 건 분명한 사실이다.

    여기에 또 하나 맥아더 신화를 만들어낸 것이 있다. 그는 유달리 매스컴과 대중심리를 잘 활용할 줄 아는 군인이었다. 특이한 모자에 선글라스를 끼고 옥수수 파이프를 입에 문 모습은 그야말로 ‘포토제닉’했다.

    영화배우처럼 대사도 멋졌다. 트루먼 대통령에 의해 옷을 벗은 뒤 미국 의회에서 한 연설에서 “노병은 죽지 않는다. 사라질 뿐”이라고 끝맺은 것은 얼마나 탁월한 감각이었는가.

    ‘나는 돌아온다(I’ll be back)’. 많은 사람들이 터미네이터2에서 아널드 슈워제네거가 내뱉은 이 짧지만 의미심장한 대사를 기억할 것이다. 터미네이터가 스스로 용광로에 융해되면서 남긴 이 한마디는 주인공과 기계인간 간의 진한 우정을 담았다.

    맥아더도 역시 이 말 한마디로 많은 주목을 받았다. 제2차 세계대전 초기 필리핀에 주둔하는 극동군 사령관에 임명됐지만 일본군에 마닐라가 함락당하자 “나는 돌아온다”는 말을 남기고 필리핀을 떠난다. 몇 년 뒤 그가 마침내 이 약속을 지키자 미국 군부와 언론은 그를 영웅으로 포장했다. 그러나 사실 로마의 카이사르처럼 멋진 개선은 아니었다. 애초에 필리핀 퇴각도 그의 서투른 작전 탓이었다는 지적을 받았지만 필리핀 귀환도 “나는 돌아온다”는 약속에 대한 그의 집착의 산물이었다. 이미 전세가 미국으로 기울어진 뒤의 김빠진 상륙이었던 것이다.

    또한 6·25전쟁 당시 무모하게 핵무기 사용을 고집했다든가, 냉전적 보수주의자 면모를 보인 것 등 그에 대한 냉정한 평가들이 내려지면서 그의 명성은 빛이 많이 바랬다.

    맥아더 하면 생각나는 영화로 가장 규모가 컸던 것은 80년대 초의 ‘오! 인천’일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돈을 많이 들였다는 것 외에는 전혀 인상적이지 못했다. 아카데미 영화상 시상식 하루 전에 발표되는 최악의 영화상인 골든 래즈베리 영화상을 휩쓴 것으로 뉴스를 타기는 했다. 이 영화에 출연해 최악의 남우주연상을 받은 건 그레고리 펙이었다. 아카데미상까지 받은 명배우지만 맥아더의 연기만큼 훌륭하지는 못했던 모양이다.



    영화의 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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