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조류보호협회가 보호 중인 수리부엉이.
6월28일 오후 2시, 충남 천안시 광덕면 지장리의 SK건설 임업 부문(이하 SK임업) 천안사업소. 유병갑(50) 소장은 청설모(靑鼠) 얘기를 입에 올리면서 치를 떤다. 대체 청설모가 어쨌기에? 26년째 조림사업에 몸담고 있는 유 소장은 왜 청설모에게 이를 가는 걸까. 얼마나 한이 맺혔으면 청설모 고기의 ‘시식’까지 감행한 걸까.
청설모에 대한 유 소장의 분노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천안시 광덕면은 예부터 알아주는 호두 재배단지. SK임업 역시 이곳 땅 66만 평의 집단 조림지에서 3만4000그루의 호두나무를 가꾼다. 자체 작목반을 꾸린 일반 농가의 소유까지 합하면 광덕면 일대 호두나무밭은 물경 150만 평.
이렇게 드넓은 곳에서 재배되는 호두를 야금야금 빼앗는 놈들이 바로 청설모니, 얄미움을 넘어 적대감의 대상이 된 건 당연지사. 청설모는 광덕면 사람들에겐 ‘공공의 적’이다. 그것도 아주 강력한….
한 마리가 연 40kg 먹어치워
영글기 시작한 광덕면의 호두.
하지만 그와 같은 영화(榮華)는 이젠 옛일. 중국산 호두 유입에 따른 가격 폭락, 호두나무의 노령화로 인한 생산량 감소, 청설모의 창궐 등이 그 이유다. 그중 주민들이 가장 골칫거리로 꼽는 것이 청설모다.
청설모가 광덕면에 첫 출몰한 때는 1980년대 초. 청설모로 인한 호두 농가 피해가 81년 처음 발생했다고 한다. 이후 90년대를 거치면서 청설모들은 여우, 담비 등 천적이 없는 안전한 환경에서 지천에 널린 호두를 ‘주식’으로 삼으며 광덕면 일대를 ‘점령’했다. 특히 호두알이 영그는 7월 하순부터 수확기인 9월까지 본격적인 피해를 입힌다. 번식력도 좋아 한 배에 새끼를 5~7마리 낳는다.
이처럼 성가신 놈들을 소탕하려 (사)한국조류보호협회(회장 김성만·이하 조류보호협회)는 ‘비밀 작전’을 짜고 있다. 수리부엉이의 투입이다. 수리부엉이는 청설모의 천적. 청설모는 물론 산토끼, 들쥐, 꿩, 개구리, 뱀 등을 먹이로 삼는 수리부엉이는 올빼미목 올빼밋과의 텃새. 몸길이는 약 70cm이며, 1982년 천연기념물 324호로 지정된 야행성 맹금류다. 조류보호협회 김상섭 아산시지회장은 “육식성인 수리부엉이는 어두워진 뒤 활동을 개시해 해 뜨기 전까지 움직인다”며 “수명은 15년 내외로, 성조(成鳥) 한 마리의 활동반경은 3~4km에 이른다”고 설명한다. 조류보호협회 측은 수리부엉이 한 마리가 하루 7~8마리의 청설모를 잡아먹을 것으로 추산한다.
조류보호협회의 ‘다친 새들의 쉼터, 용산조류방사장’(서울 용산). 여기엔 ‘출격’을 기다리는 수리부엉이들이 있다. 양계장의 닭을 습격하다 주인에게 혼이 났거나 차량에 부딪혀 부상당한 놈들이다. 조류보호협회 신충하 관리과장은 “보호 중인 수리부엉이 12마리 중 5마리는 지금 당장 방사(放飼)할 수 있을 만큼 건강상태가 양호하다”며 “하루 한 번 닭고기를 먹이는데, 컨디션이 매우 좋다”고 귀띔한다.
청설모 퇴치에 천연기념물까지 ‘용병’으로 투입하려는 궁여지책은 청설모로 인한 피해가 상상 이상으로 크기 때문이다. 천안시에 따르면, 청설모 한 마리가 연간 먹어치우거나 훼손하는 호두는 한 가마 분량인 약 40kg. 돈으로 치면 마리당 80만~100만원어치를 없애는 셈이다.
견디다 못한 광덕면의 호두 재배 농가와 SK임업 측은 온갖 자구책을 동원해 ‘청설모와의 전쟁’을 벌이고 있다. 호두를 담은 고무통을 나무 밑둥에서 1.2m 높이에 매달아 유인하거나, 어촌에서 내다버린 폐그물을 나무에 휘감아 나무를 타는 청설모를 잡기도 한다. 하지만 청설모가 워낙 약삭빠르고 날랜 까닭에 대량 포획은 힘든 실정. 다른 야생동물에게 치명적인 올무도 청설모에겐 별 효과가 없다. 현재 가장 효율적인 퇴치법은 공기총을 이용한 사살.
호두를 먹다 공기총에 사살된 청설모.
SK임업 천안사업소는 해마다 7월 중순부터 9월 말까지 엽사 4~5명을 고용해 공기총으로 청설모 소탕에 나선다. 사업소 측이 지난해 잡은 청설모는 2000여 마리. 천안시에 따르면, 광덕면 전체에서 2005년 포획한 청설모는 무려 4000여 마리에 달한다. 천안시는 2003년부터 청설모 꼬리를 가져오는 사람에게 마리당 3000원을 지급해왔지만, 청설모 피해가 줄지 않자 최근 5000원으로 ‘현상금’을 올렸다. 꼬리를 잘라낸 청설모 사체는 땅에 묻는다.
주변 지역에서도 피해 속출
이 같은 상황에서 결국 또 다른 대안으로 떠오른 것이 수리부엉이다. 그렇다고 수리부엉이의 방사에 문제가 없는 건 아니다. 먹이사슬의 정점에 위치한 수리부엉이는 천적이 없으므로 대량 방사가 이뤄지면 자칫 산토끼 등 다른 야생동물의 개체수가 급감하는 의도하지 않는 결과를 불러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직 수리부엉이 방사는 최종 결론이 나지 않은 상태. 조류보호협회 이동근 천안시지회장은 “수리부엉이 방사는 천적을 활용한 자연친화적인 청설모 퇴치법이라는 강점을 지닌다”면서도 “방사 이전에 적정한 방사 개체수가 어느 정도일지에 대한 면밀한 모니터링을 필수적으로 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조류보호협회는 7월 초 2마리의 수리부엉이를 광덕면에 방사한다. 이는 청설모 퇴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부상에서 회복된 수리부엉이를 야생으로 되돌려보내는 것. 조류보호협회는 3년 전에도 3마리의 수리부엉이를 광덕면에 방사한 적이 있다.
조류보호협회 관계자들과 광덕면 주민들은 7월 중 청설모 퇴치를 목적으로 한 수리부엉이 방사 문제를 집중 논의할 예정이다. 천안시 측도 굳이 반대하지는 않는다는 입장. 천안시청 문화재관리팀 관계자는 “시 차원에서의 계획은 없지만, 조류보호협회가 지난해부터 세 차례 정도 수리부엉이 방사에 대한 의견을 물어왔다”며 “조류보호협회 측이 방사할 수리부엉이의 마리 수와 방사 시점 등 기본계획을 시에 보내오면 도를 경유해 문화재청에 보고할 생각”이라고 답했다.
청설모의 민폐는 광덕면에 그치지 않는다. 광덕산이 걸쳐 있는 천안, 아산, 공주는 물론 ‘잣의 고장’ 경기도 가평군도 피해가 커 총기를 이용한 청설모 포획을 허가하고 있다. 다람쥣과의 잡식성 동물인 청설모는 호두뿐 아니라 잣, 밤 등 고급 열매를 탐식하기 때문. 환경부는 청설모를 ‘국부적으로 서식밀도가 과밀하여 농림수산업에 피해를 주는’ 유해조수 중 하나로 지정하고 있다.
6월28일, 광덕면 일대를 누빈 취재진은 청설모를 발견하기 힘들었다. 호두알이 덜 여문 데다 놈들이 이른 새벽에 활동하고 더운 낮은 피하는 탓이다. 가끔 산길에서 마주치곤 하던 놈들이 안 보이자 수리부엉이 ‘공습’에 대비한 ‘대책회의’라도 하는 건가 싶은 엉뚱한 상상마저 들었다.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는 옛말은 대체로 맞다.
수리부엉이의 ‘전투력’은 청설모 퇴치에 막강한 효과를 발휘할 수 있을까. 조류보호협회의 전망대로 호두 재배 농가의 걱정을 한시름 덜어줄까. 청설모와 수리부엉이의 대접전. 이는 어쩌면 청설모의 천적들이 발을 붙이지 못하도록 생태계의 자동조절기능을 파괴해버린 인간의 업보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