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붐’이 다시 뜨고 있다. 아니, 차범근(53)-차두리(26) 부자가 화제다. 사람들은 이들 부자가 TV에 나와 해설하는 모습만으로도 흐뭇한 미소를 짓는다. 우리가 잃어버렸던 ‘흑백사진’ 같은 포근한 정경. 더구나 그들의 대화 내용도 재밌다. 때로는 아슬아슬하고, 때로는 티격태격하면서도 결국은 허허 웃고 마는 아버지와 아들의 정겨운 모습이다.
10년간 308경기서 98골
20대들은 차두리의 솔직담백하고 당당한 태도에 박수를 보낸다. 40대 이상 중·장년은 그들의 젊은 시절 영웅이었던 차범근을 친근하게 느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쁨을 느낀다. 차두리는 구김살이 없다. 아버지 차범근의 2000년대 버전이다. 차범근은 “나에게 축구는 밀리면 끝장나는 전투였는데 두리에게 축구는 행복을 가져다주는 생활의 일부분인 것 같다”고 말한다. 차범근은 70, 80년대 대한민국의 영웅이었다. 지금의 박지성은 감히 차범근 옆에 갈 수 없을 정도로 그는 대단했다. 당시 차범근은 유럽의 지네딘 지단이었고, 티에리 앙리였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그런 그를 흑백 텔레비전을 통해 일주일에 한 번씩 녹화 중계되는 분데스리가 경기에서 겨우 볼 수 있었다. 그렇지만 2006 독일월드컵에서는 차범근을 컬러 평면 텔레비전으로 원없이 볼 수 있게 되었다. 그 옆에는 젊었을 때의 차범근을 빼다 박은 아들 차두리도 있었다. 모두들 빙그레 웃었다. “허허, 그놈 참~.”
차범근의 팬들은 아직도 독일, 특히 프랑크푸르트와 레버쿠젠에 많다. 현대 독일문학에서 가장 비중 있는 작가 중 한 명인 에크하르트 헨샤이트(65)도 차붐의 팬이다. 그는 시, 소설, 희곡뿐 아니라 수필, 풍자, 동화, 난센스 문학, 문학비평, 음악비평 등 거의 모든 장르를 아우른다. 열광적인 프랑크푸르트 축구 팬으로서 여러 권의 축구 책을 쓰기도 했다.
당연히 차붐에 관한 글도 있다. 단순한 글이 아니라 신이나 영웅을 찬양하는 독일 전통시 ‘찬가(Hymne) 형식’을 빌려 1979년 ‘차범근 찬가(Hymne auf Bum Kun Cha)를 썼다. 가히 차범근을 신격화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주간동아’는 최근 어렵사리 독일 현지에서 헨샤이트의 ‘차범근 찬가’를 입수했다. A4용지 3.5장이나 되는 장문이다. 내용 중엔 요즘 박지성을 가리키는 ‘신형 엔진’이라는 표현도 눈에 띈다. 물론 여기서 신형 엔진은 ‘차범근’이다. ‘(독일로의) 귀화도 당신에겐 쓰라린 운명이 아니노라!’며 은근히 귀화를 종용하는 것도 흥미롭다.
두 번이나 UEFA컵 우승 이끌어
독일에서 차범근은 ‘갈색 폭격기’나 ‘차붐’으로 불렸다. ‘붐(BUM)’은 독일어로 ‘쿵!’ ‘쾅!’이라는 뜻. 차범근은 1979년 8월 독일 프랑크푸르트 구단에 입단한 순간부터 펄펄 날았다. 세 번째 경기인 슈투트가르트 전에서 헤딩으로 첫 골을 넣더니 그 다음 네 번째, 다섯 번째 경기에서도 대포알 같은 슛으로 골 망을 흔들었다. 3게임 연속 골. 그것은 경악이었다. 대지진이었다. 독일 축구전문잡지 ‘키커’는 ‘차붐(CHA BUM)!’이라는 한 단어로 그의 시대가 왔음을 알렸다. 그의 발은 전폭기였고 폭주기관차였다. 볼이 닿기만 하면 여지없이 폭탄세례를 퍼부었다. 10년 동안 308경기 98골. 독일인들은 차범근을 볼 때마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그를 사랑했다. 아니, 지금까지도 그에 대한 사랑은 가슴속에 숯불처럼 빨갛고 뜨겁게 살아 있다.
1981년 3월 독일 프랑크푸르트 대 보루시아 MG의 UEFA컵 결승 2차전 . 차범근은 프랑크푸르트의 오른쪽 윙포워드로 선발 출전했다. 보루시아 MG로선 두말할 것도 없이 차범근이 경계대상 1호. 그를 막기만 한다면 승리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차가 야생마처럼 오른쪽을 휘젓고 다니도록 놔두면 경기는 하나 마나였다. 마테우스(45)가 전담마크맨으로 나섰다. 마테우스는 당시 떠오르는 ‘축구천재’. 무서울 것 없는 나이 스물. 차범근은 스물여덟 살. 하지만 차범근은 마테우스를 간단하게 제치고 결승골을 어시스트했다. 1대 0 승리로 프랑크푸르트 창단 첫 우승. 당시 UEFA컵 우승은 지금의 챔피언스리그 우승이나 같았다.
2006년 한국 월드컵대표팀이 레버쿠젠의 바이이레나에서 훈련할 때 에른스트 퀴흘러 시장은 “차붐으로 인연을 맺은 이 도시에서 한국대표팀이 훈련을 하게 돼 기쁘다. 차붐은 1983년부터 89년까지 레버쿠젠에서 무려 52골이나 터뜨렸다. 차붐의 홈구장에 온 태극전사들을 뜨겁게 환영한다”며 기뻐했다. 한국대표팀도 대표팀이지만 이들에게는 차붐이 먼저였다.
물론 독일의 차범근 팬들은 그의 아들 차두리를 통해 ‘대리 만족(?)’을 하고 있다. 차두리는 프랑크푸르트에서 태어나 프랑크푸르트 구단에서 최근까지 공격수로 뛰었다. 프랑크푸르트 팬들은 그를 보면서 늘 차붐을 떠올렸다. 그러나 차두리는 이제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려 한다. 이번 시즌부터 프랑크푸르트를 떠나 마인츠 구단에 등 번호 2번을 달고, 오른쪽 윙백으로 뛰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차두리는 이제 그의 아버지처럼 골잡이가 아니다. 수비수 차두리로 거듭나려는 것이다. 그는 유럽 선수들과 부딪쳐도 전혀 밀리지 않는다. 스피드도 아버지에 못지않다. 하지만 세기가 모자란다. 드리블 능력이 떨어진다. 골잡이로서는 치명적이다. 결국 그는 결단을 내렸다.
우리 가슴속에 살아 있는 차범근. 만약 그 같은 골잡이가 현재 한국대표팀에 있었다면 독일월드컵에서 이변의 주인공은 단연 한국팀이었을 것이다. ‘불의 전차’ 차범근. 이제 감독으로 팬들의 가슴을 ‘쿵쾅’거리게 해주기 바란다.
10년간 308경기서 98골
20대들은 차두리의 솔직담백하고 당당한 태도에 박수를 보낸다. 40대 이상 중·장년은 그들의 젊은 시절 영웅이었던 차범근을 친근하게 느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쁨을 느낀다. 차두리는 구김살이 없다. 아버지 차범근의 2000년대 버전이다. 차범근은 “나에게 축구는 밀리면 끝장나는 전투였는데 두리에게 축구는 행복을 가져다주는 생활의 일부분인 것 같다”고 말한다. 차범근은 70, 80년대 대한민국의 영웅이었다. 지금의 박지성은 감히 차범근 옆에 갈 수 없을 정도로 그는 대단했다. 당시 차범근은 유럽의 지네딘 지단이었고, 티에리 앙리였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그런 그를 흑백 텔레비전을 통해 일주일에 한 번씩 녹화 중계되는 분데스리가 경기에서 겨우 볼 수 있었다. 그렇지만 2006 독일월드컵에서는 차범근을 컬러 평면 텔레비전으로 원없이 볼 수 있게 되었다. 그 옆에는 젊었을 때의 차범근을 빼다 박은 아들 차두리도 있었다. 모두들 빙그레 웃었다. “허허, 그놈 참~.”
차범근의 팬들은 아직도 독일, 특히 프랑크푸르트와 레버쿠젠에 많다. 현대 독일문학에서 가장 비중 있는 작가 중 한 명인 에크하르트 헨샤이트(65)도 차붐의 팬이다. 그는 시, 소설, 희곡뿐 아니라 수필, 풍자, 동화, 난센스 문학, 문학비평, 음악비평 등 거의 모든 장르를 아우른다. 열광적인 프랑크푸르트 축구 팬으로서 여러 권의 축구 책을 쓰기도 했다.
당연히 차붐에 관한 글도 있다. 단순한 글이 아니라 신이나 영웅을 찬양하는 독일 전통시 ‘찬가(Hymne) 형식’을 빌려 1979년 ‘차범근 찬가(Hymne auf Bum Kun Cha)를 썼다. 가히 차범근을 신격화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주간동아’는 최근 어렵사리 독일 현지에서 헨샤이트의 ‘차범근 찬가’를 입수했다. A4용지 3.5장이나 되는 장문이다. 내용 중엔 요즘 박지성을 가리키는 ‘신형 엔진’이라는 표현도 눈에 띈다. 물론 여기서 신형 엔진은 ‘차범근’이다. ‘(독일로의) 귀화도 당신에겐 쓰라린 운명이 아니노라!’며 은근히 귀화를 종용하는 것도 흥미롭다.
두 번이나 UEFA컵 우승 이끌어
독일에서 차범근은 ‘갈색 폭격기’나 ‘차붐’으로 불렸다. ‘붐(BUM)’은 독일어로 ‘쿵!’ ‘쾅!’이라는 뜻. 차범근은 1979년 8월 독일 프랑크푸르트 구단에 입단한 순간부터 펄펄 날았다. 세 번째 경기인 슈투트가르트 전에서 헤딩으로 첫 골을 넣더니 그 다음 네 번째, 다섯 번째 경기에서도 대포알 같은 슛으로 골 망을 흔들었다. 3게임 연속 골. 그것은 경악이었다. 대지진이었다. 독일 축구전문잡지 ‘키커’는 ‘차붐(CHA BUM)!’이라는 한 단어로 그의 시대가 왔음을 알렸다. 그의 발은 전폭기였고 폭주기관차였다. 볼이 닿기만 하면 여지없이 폭탄세례를 퍼부었다. 10년 동안 308경기 98골. 독일인들은 차범근을 볼 때마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그를 사랑했다. 아니, 지금까지도 그에 대한 사랑은 가슴속에 숯불처럼 빨갛고 뜨겁게 살아 있다.
1981년 3월 독일 프랑크푸르트 대 보루시아 MG의 UEFA컵 결승 2차전 . 차범근은 프랑크푸르트의 오른쪽 윙포워드로 선발 출전했다. 보루시아 MG로선 두말할 것도 없이 차범근이 경계대상 1호. 그를 막기만 한다면 승리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차가 야생마처럼 오른쪽을 휘젓고 다니도록 놔두면 경기는 하나 마나였다. 마테우스(45)가 전담마크맨으로 나섰다. 마테우스는 당시 떠오르는 ‘축구천재’. 무서울 것 없는 나이 스물. 차범근은 스물여덟 살. 하지만 차범근은 마테우스를 간단하게 제치고 결승골을 어시스트했다. 1대 0 승리로 프랑크푸르트 창단 첫 우승. 당시 UEFA컵 우승은 지금의 챔피언스리그 우승이나 같았다.
2006년 한국 월드컵대표팀이 레버쿠젠의 바이이레나에서 훈련할 때 에른스트 퀴흘러 시장은 “차붐으로 인연을 맺은 이 도시에서 한국대표팀이 훈련을 하게 돼 기쁘다. 차붐은 1983년부터 89년까지 레버쿠젠에서 무려 52골이나 터뜨렸다. 차붐의 홈구장에 온 태극전사들을 뜨겁게 환영한다”며 기뻐했다. 한국대표팀도 대표팀이지만 이들에게는 차붐이 먼저였다.
물론 독일의 차범근 팬들은 그의 아들 차두리를 통해 ‘대리 만족(?)’을 하고 있다. 차두리는 프랑크푸르트에서 태어나 프랑크푸르트 구단에서 최근까지 공격수로 뛰었다. 프랑크푸르트 팬들은 그를 보면서 늘 차붐을 떠올렸다. 그러나 차두리는 이제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려 한다. 이번 시즌부터 프랑크푸르트를 떠나 마인츠 구단에 등 번호 2번을 달고, 오른쪽 윙백으로 뛰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차두리는 이제 그의 아버지처럼 골잡이가 아니다. 수비수 차두리로 거듭나려는 것이다. 그는 유럽 선수들과 부딪쳐도 전혀 밀리지 않는다. 스피드도 아버지에 못지않다. 하지만 세기가 모자란다. 드리블 능력이 떨어진다. 골잡이로서는 치명적이다. 결국 그는 결단을 내렸다.
우리 가슴속에 살아 있는 차범근. 만약 그 같은 골잡이가 현재 한국대표팀에 있었다면 독일월드컵에서 이변의 주인공은 단연 한국팀이었을 것이다. ‘불의 전차’ 차범근. 이제 감독으로 팬들의 가슴을 ‘쿵쾅’거리게 해주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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