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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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복절도 형사반장 전과 7범 도굴꾼 변신

  • 입력2006-07-06 15: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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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복절도 형사반장 전과 7범 도굴꾼 변신
    한국 영화의 경우, 대부분 개봉하기 한두 주 전에 기자와 평론가들을 위한 시사회를 연다. 이때는 영화 제작자와 감독, 배우들이 참가해 무대인사라는 걸 하는데 대부분 형식적이다. “열심히 만들었습니다. 재미있게 봐주세요”라는 뻔한 멘트가 나오는 무대인사는 일종의 통과의례 같은 것이다. 그런데 이 무대인사에서 유독 주목받은 사람이 있다.

    강우석 감독의 ‘한반도’ 무대인사는 최근 필자가 본 것 중 가장 인상 깊은 자리였다. 안성기, 문성근, 강신일, 조재현, 차인표 등 주연배우들과 강 감독까지 남자 여섯 명이 양복을 입고 무대에 서자 그 중압감으로 무대가 꽉 차 보였다. 맏형인 안성기의 성실한 인사와 최근 영화 출연이 뜸한 문성근의 인사 뒤, 강신일이 마이크를 잡고 인사를 하자 객석에서 웃음과 박수가 터졌다.

    대학로 연극무대서 오랫동안 연기 내공 쌓아

    강신일의 목소리 때문이다. ‘한반도’ 시사 때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공공의 적’ 때도 그랬다. 그의 목소리는 남성적 매력이 물씬 풍기는 굵은 저음이다. 다른 사람보다 한 옥타브 낮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낮고 묵직하다. 대학로 연극무대에서 오랫동안 단련된 그의 목소리에는 배우로서의 직업적인 모습과 체취가 물씬 담겨 있다.

    강신일이 영화에 등장한 것은 10년도 되지 않았다. 1960년생이니 올해로 46세다. 경희대 전기공학과를 나온 그는 대학로 연극무대에서 오랫동안 연기를 했다. 1980년 이후 그는 대학로 연극의 중요 작품들인 ‘칠수와 만수’ ‘변방에 우짖는 새’ ‘날 보러 와요’ ‘진술’ 등에 출연했다. 그리고 1998년 서울국제연극제에서 ‘김치국씨 환장하다’라는 작품으로 연기상을 받았다.



    그해 강신일은 박광수 감독의 ‘이재수의 난’에 마참산 역으로 처음 영화에 출연했다. 그 뒤 곽경택 감독의 ‘친구’(2001년)에서는 조폭으로 나왔지만 그렇게 눈에 들어오는 역은 아니었다. ‘광복절 특사’에서 보안과장으로도 등장하지만 강신일이라는 배우를 확실하게 인식시킨 작품은 강우석 감독의 ‘공공의 적’이다. 그는 여기서 설경구의 상사인 엄 반장 역을 맡아 감찰반의 성화로부터 부하 직원들을 보호하고 강직하게 살인사건 조사를 지휘하는 연기를 했다.

    “ ‘공공의 적’ 이후 얼굴이 많이 알려진 편이지만 그래도 난 아직 지하철을 타고 다닌다. 얼굴이 워낙 시골스럽게 생겨서 점퍼 입고 앉아 있으면 배우라고 생각하지 못한다. 가끔 사인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있긴 하지만, 아직까지는 견딜 만하다.”

    마흔에 시작한 영화 인생 ‘공공의 적’서 두각

    ‘공공의 적’ 이후 ‘실미도’ ‘천년호’ ‘청풍명월’ ‘썸’ ‘공공의 적2’ ‘미스터 소크라테스’ ‘도마뱀’ 등의 영화를 찍었다. 그리고 TV에도 진출해 ‘오 필승 봉순영’ ‘햇빛 쏟아지다’ ‘부활’ 등의 드라마를 했다. 특히 강우석 감독의 작품에서는 ‘공공의 적’ 이후 모든 영화에서 중요한 배역을 맡았다.

    “고등학교 때 대학로에 있는 동숭교회를 다녔다. 거기서 연극을 시작했다. 단막극을 만들어 소외된 지역에 가서 공연하며 선교하는 일을 했다. 대학 1학년 때 극단 ‘증언’을 만들어 활동하다가 졸업 후 극단 연우무대에 들어갔다. 제대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얼굴이 험상궂은 덕분에 만수 역에 캐스팅됐다.”

    강신일은 연극 이외의 삶은 생각해보지도 않았다고 했다. 그러나 대학로에서 잠깐 활동하던 후배들이 영화나 TV에 진출해 인기를 얻고 인정받는 것을 보고 상대적 박탈감을 느꼈음을 숨기지 않는다. 그를 영화계로 이끈 것은 그의 셋째 아이였다.

    “연극배우 수입이 얼마나 되겠나? 아내가 동네에서 피아노 교습을 하며 먹고살았다. 그런데 셋째 아이를 갖게 되면서 겁이 났다. 그때 내 나이 마흔이었다. 아무리 대학로에서 잘나가는 배우, 존경받는 연기자가 됐어도 식구들에게는 미안했다. 그때부터 영화 쪽 제의가 들어오면 출연했다.”

    포복절도 형사반장 전과 7범 도굴꾼 변신

    개봉작 ‘한반도’에서 열연중인 강신일.

    강신일이 처음 영화에 출연한 작품인 ‘이재수의 난’은 현기영의 소설 ‘변방에 우짖는 새’를 영화화한 것이다. 박광수 감독은 강신일의 연우무대 선배이기도 하고, 또 강신일은 연극 ‘변방에 우짖는 새’에서 주인공을 맡았었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적극적 의지로 선택한 ‘공공의 적’을 영화 데뷔작으로 생각한다.

    나는 하일지의 소설을 박광정이 각색·연출한 ‘진술’을 본 뒤 무대 뒤에서 강신일을 처음 만났다. ‘칠수와 만수’도 봤고 ‘변방에 우짖는 새’도 봤지만, 강신일이라는 배우를 현실에서 만난 것은 ‘진술’ 때였다. 박광정 씨의 소개로 만난 강신일은 정말 힘 있는 배우였다.

    아직도 영화감독으로 데뷔하지 못하고 있는 배우 박광정은 그러나 대학로 연극무대에서는 각종 상을 휩쓴 주목받는 연출가다. 박광정은 오랫동안 연극 ‘진술’을 영화화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는 주인공 역에 강신일을 고집했고 투자자들은 고개를 흔들었다. 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더 이상 강신일은 무명배우가 아니기 때문이다.

    조재현과 짝 이뤄 영화에 웃음과 여유 주는 역할

    대학로의 톱스타가 영화에서는 조연을 한다는 사실이 그를 불편하게 하기도 했고, 연극무대와는 다른 영화 현장에 익숙해지는 데도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공공의 적’에서 강우석 감독을 만나면서 그는 마음이 편해졌다.

    “강우석 감독은 자신이 하는 일에 확신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시원시원하고 정확하고 스피디하다. 연극은 신성한 것이라고 생각해왔는데 영화 현장도 역시 그랬다.”

    그는 지금 동서울대학 겸임교수로도 일하고 있다. 연기에 집중하기 때문에 일주일에 하루 나가는 교수 일이 부담스럽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는 가르치는 일을 소중하게 생각한다.

    강우석 감독의 ‘한반도’에서 그는 전과 7범의 도굴꾼 역을 맡았다. 강신일은 무대인사에서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조금 어울리지 않는 도굴꾼 역을 맡았다”고 했지만, 그의 모습은 미안하지만 딱 그 배역에 맞았다. 강신일이 없었다면 ‘한반도’는 훨씬 재미없는 영화가 되었을 것이다. 강신일은 조재현과 짝을 이뤄 영화에 활기를 불어넣는 역을 한다.

    고종황제 당시, 나라가 일본으로 넘어갈 것을 우려한 고종은 국새를 만든 뒤 진짜 국새는 스스로 봉인해버렸다. 일본에 나라의 재산을 빼앗기는 각종 문서에는 가짜 국새가 찍혔다는 것이다. 근미래의 대한민국에서 남한의 대통령(안성기 분)과 북한의 국방위원장(백일섭 분)이 함께 경의선을 복원하여 완전 개통하려는 순간, 일본은 1907년 협약된 문서를 내놓으며 경의선과 관련된 모든 권한이 일본에 있다고 주장한다.

    역사학자 최민재 박사(조재현 분)는 대통령에게 진짜 국새가 따로 있다는 주장을 하고, 고종황제 내관의 후손인 전과 7범 김유식과 함께 진짜 국새가 묻혀 있을 만한 현장 발굴을 시작한다. 강신일은 지나치게 경직된 극적 구조와 비분강개한 파트너 조재현 사이에서 웃음을 주고 여유를 주는 역할을 한다.

    강신일은 지금까지 주로 형사반장 역으로 대표되는 캐릭터였지만 그 자신은 아주 사악한 연기 등 다양한 분야에 도전하고 싶다고 밝히고 있다. 마흔에 시작한 영화 인생. 그는 지금 굵은 저음의 목소리처럼 힘 있는 배우로 무섭게 성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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