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빈 코스트너가 주연한 영화 ‘로빈후드’의 한 장면.
의적(義賊)이자 전설의 궁사인 로빈후드는 오랫동안 ‘노팅엄 사람’으로 믿어져 왔다.
빈후드’ 전설은 노팅엄 근처에 있는 셔우드 숲에 본거지를 두고 귀족과 부자의 재산을 약탈해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었다는 게 줄거리다. 실제로 노팅엄에는 로빈후드 공원, 셔우드 숲에는 로빈후드 기념관이 만들어져 있으며 이 지역 주변에는 로빈후드 언덕, 로빈후드 무덤 등으로 불리는 곳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최근 셰필드대학 고고학과 팀은 셰필드의 볼스터스톤에 있는 오래된 성터를 로빈후드의 집으로 지목하고 발굴을 시작했다. 볼스터스톤은 셰필드 인근이지만 노팅엄에서는 80km나 떨어진 마을이다. 또 로빈후드의 친구로 알려진 리틀 존도 볼스터스톤 인근의 헤더세이지에서 태어나고 숨졌다고 한다.
로빈후드 이야기가 처음으로 등장한 것은 1320년대의 발라드 ‘로빈 호드(Robyn Hode)의 모험’이다. 그 후 1377년 윌리엄 랭그의 장편시 ‘농부 피어스의 환상’에서 의적 로빈후드의 모습이 형상화되기 시작했다. 14세기부터 영국 중부의 구전민요나 전설에 로빈후드는 빠지지 않는 인물이 되었다. 아일랜드나 스코틀랜드의 전설에도 로빈후드는 단골로 등장한다. 심지어 로빈후드의 정체가 뿔이 난 켈트족의 신이나 마법사였다는 주장까지 제기됐을 정도다.
오래된 성터 로빈후드 집으로 지목
이런 정황을 보면, 11세기에서 14세기 사이에 영국 중부에서 활약한 귀족이나 기사들의 무용담이 합쳐져 ‘로빈후드’라는 인물이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다. ‘후드’라는 성(姓)은 ‘두건’이란 뜻으로, 실제로 요크셔에서는 흔한 성이기도 했다. 또 ‘로빈’이라는 이름은 중세 영국에서 가장 많이 쓰인 남자 이름이다. 현재의 로빈후드 이미지는 1938년에 영국에서 제작된 ‘로빈후드의 모험’이라는 영화에서 굳어진 것이라고 한다.
이 많은 로빈후드 이야기들은 대부분 로빈후드가 노팅엄 인근의 셔우드 숲에서 은거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또 1600년대에 쓰인 몇몇 이야기들은 로빈후드가 노팅엄이 아니라 워릭의 록슬리에서 활약했다고도 주장한다. 록슬리가 로빈후드의 근거지라고 말하는 이야기들은 전설 속의 로빈후드 무덤 풍경이 록슬리와 흡사하다는 이유를 내세운다.
그렇다면 셰필드대학 고고학과 팀이 파헤치고 있는 성터는 누구의 것인가. 볼스터스톤의 성터는 ‘헌팅던 백작’이라고 불리는 월더오프의 주거지로 추측되는 장소다. 9세기의 귀족인 월더오프는 당시 영국을 괴롭히던 노르만족의 침공에 거세게 저항했던 인물이다. 1066년 노르만공 윌리엄이 영국을 정복하고 왕위에 오르자 그는 로빈후드처럼 반란을 꾀했다. 그러나 전설과 달리 월더오프의 반란 모의는 사전에 들통났고, 그는 1076년 30세의 나이로 처형되고 말았다. 월더오프에게는 활을 잘 쏘던 로버트 피츠월터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바로 이 월더오프와 로버트 부자가 로빈후드의 모델이라는 것이다.
노팅엄 근처의 셔우드 숲.
사실 로빈후드의 유력한 모델은 월더오프만이 아니다. 로빈후드 전설에는 영국 역사의 실존 인물인 리처드 1세와 그의 아들 존 왕자가 등장하는데, 이 리처드 1세와 동시대의 사람인 또 다른 헌팅던 백작 데이비드도 유력시되는 인물이다. 1219년 67세로 사망한 데이비드는 스코틀랜드 왕가와 먼 친척뻘 되는 대귀족이었다. 데이비드 역시 로빈후드처럼 십자군 원정에 참가했고, 로버트라는 아들이 있었으나 이 아들은 어려서 죽었다고 한다.
십자군 원정에서 돌아온 뒤부터 데이비드 백작은 전설 속의 로빈후드와 흡사한 행태를 보였다. 리처드 1세가 죽은 후 왕위 쟁탈전에 휩쓸리면서 자신의 영토를 잃은 데이비드 백작은 헨리 3세에게 반기를 들었고, 헨리 3세는 반란군을 토벌하기 위한 군대를 파견했다. 15세기경에 회자되던 로빈후드 전설 중에는 ‘헌팅던 백작의 아들 로빈’이라는 식으로 로빈후드의 가문을 명확하게 밝힌 경우도 있다.
로빈후드 후보 중에는 귀족뿐만 아니라 평민계층에서 탄생한 영웅이나 반란군, 도적들도 있다. 1498년 100여 명의 농민을 이끌고 산속으로 들어간 로저 마셜은 스스로를 로빈후드라고 칭했는데, 전설 속의 로빈후드와 로저 마셜이 이끈 의적 떼의 행태는 똑같았다고 한다. 1441년 노포크에서 일어난 폭도들 역시 “우리는 로빈호더스맨이다!”라는 노래를 부르고 다녔으며, 1469년 요크에서 반란을 일으킨 두 명의 평민은 자신들을 ‘홀더니스의 로빈’과 ‘레데스달의 로빈’이라고 칭했다. 많은 폭도들이 스스로를 ‘로빈’이라고 주장한 것은 ‘로빈(Robin)’이라는 이름이 ‘반란’을 뜻하는 영어 단어 ‘rebellion’을 연상시켰기 때문이다.
역사학자들 “로빈후드는 여러 사람”
로빈후드의 정체가 누구였든, 노팅엄 시로서는 시의 상징인 로빈후드를 뺏기게 될 참이니 기분이 좋을 리 없다. 노팅엄 시는 셰필드대학의 로빈후드 집 발굴 작업을 애써 무시하는 분위기다. 반면, 셰필드대학 고고학과 팀은 “발굴이 성공한다면 로빈후드는 더 이상 ‘노팅엄의 로빈후드’가 아니라 ‘셰필드의 로빈후드’로 불리게 될 것”이라며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발굴 작업에 자원봉사자로 참여한 셰필드 주민 스티브 목슨 씨는 “이 성터는 곧 역사적으로 중요한 유적지로 떠오를 것”이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로빈후드가 전설의 인물이라는 사실은 누구나 다 압니다. 그러나 셰필드에 살았던 월더오프의 애석한 죽음과 로버트의 활약이 로빈후드 전설의 모태가 된 건 분명하지요.”
로빈후드 소동에 대해 역사학자들은 한발 물러서 있다. 영국에서 ‘로빈후드 찾기’가 이번이 처음은 아니기 때문이다. 역사학자 J. C. 홀트는 이 문제에 대해 명쾌한 해답을 내놓는다. “로빈후드가 누구냐는 질문에 대한 답은 한 가지뿐입니다. 바로 ‘여러 사람이다’라는 거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