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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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책이든, 누구 책이든 “내 손안에”

책 수집에 대단한 열정 … 집에 수천 권 소장 ‘도서관 방불’

  • 강명관 부산대 교수·한문학 hkmk@pusan.ac.kr

    입력2006-07-06 16:5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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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책이든, 누구 책이든 “내 손안에”

    미암 유희춘의 각종 유물이 보관돼 있는 전남 담양군 대덕면 장산리의 모현관.<br> ‘미암일기’를 비롯해 여러 고문서와 목판이 있다.<br>모현관 인근에 종가와 사당, 연계정(漣溪亭)도 자리잡고 있다.

    임진왜란으로 인해 조선 건국 이후 2세기 동안 축적되었던 전적(典籍) 문화는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로 타격을 입었다. 경복궁이 불타면서 고려로부터 전해 내려온 전적과 조선 건국 이후 2세기 동안 생산된 방대한 문헌들이 하루 만에 잿더미가 됐고, 전국 각 지방 관아에서 축적하고 있던 엄청난 양의 목판들도 남김없이 재가 돼 사라졌던 것이다. 실록의 기초 자료가 되는 사초(史草) 역시 한 줌의 쓸쓸한 먼지가 되었음은 물론이다.

    자, 이제 무엇으로 실록을 쓸 것인가. ‘미암일기(眉巖日記)’란 책이 있다. 미암(眉巖) 유희춘(柳希春, 1513~1577)이 1567년부터 1577년까지 11년 동안 쓴 일기다. 개인의 일기지만, 이 일기는 매우 치밀하고 방대해 마침내 선조실록의 뼈대로 채택된다. 개인의 성실한 하루하루의 기록은 이렇듯 한 시대를 증언하는 자료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미암일기에 책 수집 방법·과정 상세히 남겨

    어떤 책이든, 누구 책이든 “내 손안에”

    유희춘이 쓴 ‘미암일기’. 보물 제260호로 지정돼 있다.

    ‘미암일기’의 내용은 매우 광범위하다. ‘미암일기’를 보면 16세기 조선 사람의 일상을 손바닥 보듯 환히 들여다볼 수 있다. 특히 조선 전기 생활사를 복구하는 데 결정적 자료가 된다. 나는 그가 꼼꼼하게 기록해놓은 음식 재료를 보고 언젠가 16세기 음식과 요리에 관한 책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을 정도다. 하지만 그건 뒷날의 일이다.

    유희춘은 대단한 장서가이기도 했다. 여기서는 ‘미암일기’를 통해 유희춘이 어떻게 서적을 집적(集積)했는지를 살펴보기로 한다.



    ‘미암일기’의 1575년 10월29일조를 보면, 유희춘은 다락방의 책을 중당(中堂)으로 옮기고 있는데 모두 3500책이란 막대한 분량이다. 하지만 ‘미암일기’에 가장(家藏) 서적을 여러 차례에 걸쳐 정리하고 옮기는 것을 보면, 이것은 전부가 아닌 그의 장서 중 일부로 짐작된다. 물론 3500책이라 해도 결코 적은 양이 아니다. 책이 흔해 빠진 물건이 된 오늘날에도 개인 장서가 3500권인 경우는 흔하지 않다. 교보문고와 같은 대형 서점이나 예스24 등의 인터넷 서점이 존재하지 않았던 조선시대에 책을 수집한다는 것은, 개인의 피나는 노력에 의한 것이었다. 조선시대에 책은 결코 흔한 물건이 아니었다. 인쇄본일 경우도 결코 많은 분량이 만들어지지 않았다. 예컨대 유희춘은 1571년 자신의 외조 최부(崔溥)의 문집 ‘금남집(錦南集)’을 인쇄했는데 15부에 불과했다. 15부라니 너무나 적은 양이 아닌가. 하지만 상업적 출판이 아닌 이상 많이 인쇄할 필요가 없었다. 오직 소수의 부수만을 제작해 가까운 사람들에게 보내는 것이 일반적인 인쇄 형태였던 것이다[그는 이 책을 박순(朴淳)·송순(宋純)·기대승(奇大升) 등 당대의 명류들에게 보냈다]. 이런 상황에서 책을 수집한다는 것은 엄청난 노력이 필요한 일이었다. 과연 유희춘의 장서는 어떻게 구축되었던가. ‘미암일기’에 그는 자신이 책을 수집한 내력을 꼼꼼하게 기록하고 있다. 이제 그 기록을 따라 그의 장서 축적기(蓄積記)를 써보자.

    어떤 책이든, 누구 책이든 “내 손안에”

    (위)담양군 대덕면 비차리에 있는 유희춘 신도비.<br>(아래)유희춘이 후학을 가르치고 시회를 즐기던 연계정.

    조선시대에 책을 인쇄해 공급하는 곳은 국가가 거의 유일했다. 19세기 어림이 되면 방각본(坊刻本)이라고 해서 민간에서도 상업적 출판이 등장하지만 그 양은 미미했고 수준 역시 조악하기 짝이 없었다. 조선시대 전체를 놓고 본다면, 역시 대종을 이루는 것은 중앙의 교서관(校書館)과 지방 감영, 군·현 등 행정단위의 출판이었다. 금속활자의 인쇄는 대개 교서관을 비롯한 중앙관청에서 이루어졌고, 지방의 행정단위에서는 주로 목판본을 제작했다. 이처럼 관(官)이 출판을 주도하는 것이 조선시대 인쇄, 출판의 특징이다.

    조선 최대의 출판처(出版處)는 역시 국립출판사라 할 교서관이다. 교서관은 금속활자와 다수의 책판(冊版)을 보유하고 책의 인쇄와 공급을 맡았다. 교서관에서 인쇄한 책은 국가 행정기관과 고급 관료에게 공급됐다. 임금이 녹봉이나 물건을 하사해주는 것을 반사(頒賜)라고 하는데, ‘미암일기’에는 유희춘이 책을 반사받았다는 기록이 상당히 많이 남아 있다. 그중 참고가 됨직한 것을 인용해보자.

    교서관에서 ‘백가시(百家詩)’를 다 인쇄했다고 하여 먼저 15건을 진상하고, 나머지 국용(國用) 150권 내에서 10건은 융문루(隆文樓)와 융무루(隆武樓), 그리고 여러 관(館)·부(府)·조(曺)에 나누어 간직하게 했다. 그 나머지 138건은 낙점(落點)하여 종친(宗親)·부마(駙馬)로서 2품 이상, 삼공(三公), 1품에서 2품, 여섯 승지, 홍문관 주서(注書), 한림(翰林), 대간(臺諫) 및 참의(參議), 감사(監司) 등 통정(通政) 중에서 빼어난 사람에게 하사하였다.(1570년 9월26일)

    교서관에서 책을 찍으면 임금의 개인적 용도로 일정한 양을 바친(進上) 뒤, 국가 발행의 도서를 납본받아 소장하는 궁중의 도서관인 융문루와 융무루에 일정량을 할당한다. 그런 다음 관·부·조 등의 명칭을 단 중앙관청에 하사한다. 그 뒤에 개인에게 반사가 이루어지는데, 종친이나 부마 등 왕실의 친척, 그리고 관료조직의 상층부를 이루는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과 승정원의 승지, 홍문관, 사헌부, 사간원, 관찰사 등 권력기관에 책이 배포되는 것이다.

    유희춘은 상당히 많은 책을 반사받았다. 하지만 반사만으로는 충분한 책을 확보할 수 없었다. 한데 반사 이외에도 책을 구할 길은 있었다. 금속활자 인쇄본의 경우는 책을 찍고 난 뒤 책판을 해체해버리므로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지만, 목판본은 다시 인출할 수가 있었다. 목판본은 처음 목판을 제작했을 때 일정한 양을 찍어 분배한 뒤 목판을 간직해 뒷날 인쇄를 기다리기 때문이다.

    조선 전기의 목판은 대체로 지방 관아에서 제작돼 해당 지방에 보관한다. 하지만 일부는 서울로 이관해 교서관에 보관한다. 같은 목판으로 뒤에 다시 찍어낸 책을 후쇄본이라 하는데, 요즘의 재판에 해당한다. 후쇄본은 대량 제작하는 경우도 있었고, 단 1부 내지 2, 3부를 찍어내는 경우도 흔하게 있었다. 교서관의 목판은 인쇄에 필요한 종이와 비용을 가져오면 책을 인쇄해주었다. 유희춘의 기록에 의하면, 교서관의 목판을 인쇄해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1) 허봉(許)이 고사(告辭)하였다. 나는 이절책지(二折冊紙) 27권, 장지(壯紙) 4권, 백지(白紙) 3권, 모두 합쳐서 68첩(貼)으로 ‘운부군옥(韻府群玉)’ ‘전등신화(剪燈新話)’ ‘본초(本草)’ □(□는 원래 판독 불능의 글자다)권의 15의 19차 및 ‘중용혹문(中庸或問)’을 인쇄하게 하였다.(1567년 10월9일)

    (2) 절지(折紙) 25권 10장을 교서관 저작(著作) 윤경희(尹景禧)에게 보내어 ‘군옥(群玉)’을 인출하게 하였다.(1568년 3월8일)

    (3) 인본(印本) ‘본초’의 낙권(落卷)과 ‘계사(繫辭)’ 하권, ‘대학’ 등 4책의 인쇄에 필요한 종이를 외교서관 정자(正字) 박민준(朴民俊)에게 보냈다.(1569년 6월20일)

    모두 교서관에 책의 인쇄를 의뢰한 것이다. 이처럼 교서관의 책판을 인출해 인쇄할 경우는 필요한 종이를 보내고 있다. 궁금한 것은 인쇄공에게 노임을 줬는가 하는 점인데, 이에 대해서는 아무런 기록이 없다. 생각해보면 교서관 제조까지 지낸 유희춘에게 인쇄 공임을 받았을 것 같지는 않다.

    유희춘은 교서관에 소장된 목판에서 상당량의 책을 인쇄했다. 한데 책판의 절대 다수는 각 지방 관아에 소장돼 있었다. 이 책판의 관리자는 각도의 관찰사와 지방관이므로 만약 지방 책판에서 책을 인쇄하고 싶다면, 감사나 지방관에게 부탁하는 수밖에 없었다. 다음 기록을 보자.

    아침에 새 경상감사 박공(朴公) 대립(大立)을 만났다.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다가 ‘주례(周禮)’ ‘속몽구(續蒙求)’ ‘익재난고(益齋亂藁)’ ‘역옹패설(翁稗說)’ 등의 책을 인쇄해주면 좋겠다고 청하자, 수백(守伯, 박대립)이 모두 허락하였다.(1570년 5월10일)

    유희춘은 같은 날 편지를 써서 책의 인쇄를 부탁해 허락을 받고 있고, 13일 임지로 떠나는 박대립을 전송하면서 자신의 집에서 준비한 다과를 대접하고 책의 인쇄를 재차 부탁해 허락을 얻어내고 있다. 관찰사는 도(道)의 행정을 책임지고, 주·부·군·현의 장관은 그의 관할 아래에 있기 때문에 관찰사를 통하는 것이 지방의 책판을 인쇄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다. 이외에는 직접 해당 지방관에게 부탁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제 각 지방관이 책을 인쇄해준 경우를 보자.

    (1) 윤안동(尹安東)의 편지를 보니, ‘이정전서(二程全書)’를 이미 나를 위해 인쇄해왔다고 하였다.(1567년 10월3일)

    (2) 들으니, 성주목사(星州牧使) 한성원(韓性源) 명숙(明叔)이 다시 편지를 보내 ‘당감(唐鑑)’을 인쇄해 보내는 것을 허락했다고 한다.(1567년 10월4일)

    (3) ‘고문궤범(古文軌範)’이 윤참판(尹參判)으로부터 왔다. 관동(關東)에서 인쇄한 것이다.(1568년 6월3일)

    이런 사례는 ‘미암일기’에서 매우 흔하게 발견된다. 그는 책판이 가장 많이 있었던 경상도, 전라도, 강원도 등에서 허다한 책을 인쇄해내고 있다. 아마도 이것은 유희춘의 경우만이 아니라, 사대부가에서 책을 구입하는 가장 보편적인 경우로 생각된다.

    그런데 지방 관아의 목판에서 서적을 인쇄할 경우, 종이와 인쇄 비용은 어떻게 감당했을까. 여기에 관한 자료를 본 적은 없다. 거개는 지방관의 호의로 무료로 인쇄해주지 않았나 한다. 물론 간혹 종이를 보내는 경우도 있다. (3)의 경우를 보면, 강원도에서 인쇄해 보낸 ‘고문궤범’은 원래 그가 이절(二折) 장지(壯紙) 4권 12장을 윤참판을 통해 강원감사에게 전해주어 찍게 한 것이다.

    유희춘은 지방관과의 안면을 이용하여 지방 소재 책판에서 책을 찍는 방법으로 장서의 일부를 구축했다. 물론 이와 같은 방법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지는 않았다. 그것은 지방관과 두루 안면을 통할 수 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에게나 가능한 방법이었다. 유희춘의 경우는 그가 임금의 신임을 받는 고급 관료였기 때문에 지방의 책판을 마음대로 인출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다음과 같은 기록도 음미할 만하다.

    도내(道內)의 책판을 기록한 장부를 보았다. 그중 볼 만한 책들을 뽑아 그 첩수(貼數)를 기록해두었다.(1571년 5월10일)

    유희춘이 1571년 전라도 관찰사가 되었을 때 일기의 한 구절이다. 관찰사가 되어 전라도 소재의 책판을 기록한 장부를 보고, 인쇄할 필요가 있는 서적을 추려놓았던 것이다.

    반사를 받거나 아니면 교서관과 지방 관아의 목판을 이용해 후쇄본을 찍어내는 것으로 그의 장서가 완성되었던 것인가. 천만에! 이것은 그야말로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책의 수집에 일단 뛰어들면 그 다음부터는 온갖 방법이 총동원된다. 다음 호에서 유희춘의 책 모으기를 계속 따라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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