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이번 주 논술 주제
- 현대사회에서 지식인의 역할
- (가)~(라)의 내용을 비판적으로 참고하여 연관관계를 찾고, 하나의 기준을 바탕으로 자신의 견해를 논술하시오. (750~850자)
이번 호 논술지도에는 서울 경성고등학교 국어담당 박찬호 선생님이 수고해주셨습니다.
그러나 볼테르, 졸라, 페기, 사르트르 등 프랑스 지식인에게서 전형적으로 발견되었던 바와 같이 ‘의심할 수 없는’ 보편성의 이름으로 발언할 수 있었던 지식인의 시대는 이제 지나가 버렸다고 리오타르는 선언하였다.
무지와 예속으로부터의 해방을 외쳤던 자유주의자의 계몽적 이상은 오늘날 세계시장을 둘러싼 살벌한 경제 전쟁과 공산권의 붕괴로 인해 좌절되었고, 지식인의 권위와 행위의 가장 중요한 토대였던 해방의 이념 역시 몰락해버린 상황 속에 놓이게 되었다. 학문의 영역이 차츰 세분되면서 지식인이 사회에 대해 종합적 정보를 가질 수 없게 되었고 이에 따라 지식인들이 이전처럼 사회변혁을 위한 중심적 이념도 만들어내기 어렵게 되었다.
나아가 현대사회는 정보가 다양해졌을 뿐 아니라, 그 정보도 지식인만의 전유물이 아니게 되었다. 수많은 언론과 방송, 잡지, 인터넷 등이 다양한 정보를 만들어내고 모든 사람들이 정보를 공유하게 됨으로써, 정보에 대한 독점적 지위를 바탕으로 사회를 이끌던 지식인의 선도자로서의 역할이라는 객관적 조건 역시 붕괴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리오타르가 오늘날 서구 사회에서 지식인 시대의 종언을 고한 것은 매우 자연스런 것이었다.
(나) 특정 분야에 전문적 지식을 습득하고 있던 지식 전문가들은 부르주아계급에 의해, 부르주아계급이 교회와 귀족들로부터 자신들의 이익을 보호하며 그들과의 투쟁에서 주도권을 잡기 위한 목적으로 기능적으로 만들어진 존재이었기에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그들이 수행하는 실제 기능과 기대 역할 사이에 많은 모순이 생기게 되었다. 지식 전문가들은 처음에는 휴머니즘과 평등주의에 기반한 보편주의를 추구하도록 만들어졌다. 하지만 그들은 곧 그들이 탐구하고 연구하는 보편적 지식이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와 갈등을 일으키고 있음을 알게 된다. 부르주아계급은 인간이 자유롭고 평등하다는 기본권을 내세워 민주주의를 성립시켰지만, 자신들이 지배계급이 된 이후 그들 스스로 자유와 평등을 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식 전문가들은 자신이 배운 보편적 지식과 자신이 처한 계급적 환경 사이에서 심각한 모순을 느끼게 된다. 그들은 자신의 전문적 지식이 보편주의를 위해 사용되기를 원하지만 자신이 처한 계급적 위치 때문에 자본가 계급의 특수한 이익을 위해 사용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지식 전문가들은 인류를 위해 봉사해야 한다는 학문의 보편성과 부르주아계급의 이익(특수성)을 위해 봉사할 수밖에 없는 계급적 신분 사이에 갈등하는 모순적 존재가 된 것이다.
이렇게 자기 내부의 모순을 간파한 지식 전문가들은 두 가지의 길을 걷게 된다. 어떤 지식 전문가들은 자신의 사회적 역할이 보편주의에 어긋남을 알면서도 지배계급의 이익을 위해 그들의 시녀로 전락한다. 이에 반해 다른 지식 전문가들은 자신들의 출신 배경을 거부하는 것이 될지언정 지배자의 하수인이 되기를 부정하고,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를 타파하여 진정한 보편주의를 추구하려고 노력한다.
(다) 서양철학은 플라톤 이후 줄기차게 최선의 국가, 최선의 쾌락, 지고의 행복, 영구평화 등 현실의 모순과는 대비되는 이상적인 현실을 구상해왔다. 현실에 적응하여 살아가면서도 그러한 현실에 만족하지 않고 현실의 모순을 타파하여 더욱 이상적인 현실을 창출하고자 하는 노력하는 가능성의 존재, 이중적 차원의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이중적인 차원을 자각함으로써 비로소 인간은 더 나은 현실을 창출할 수 있는 가능성을 현실화할 수 있게 된다. 요컨대 역사의 주체로 설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현대 선진 산업사회 속에서 인간은 그러한 가능성의 차원을 상실하고 단지 현실성의 차원으로 매몰돼버리고 말았다. 객관적인 ‘사실’과 주관적인 ‘가치’라는 이분법적 태도로만 세계를 이해하며 검증 불가능함을 이유로 ‘가치’의 중요성을 무시하는 실증주의적 태도를 견지함으로써, 계몽적·도구적 이성에 의한 비판과 부정의 필요성을 망각하고 기존의 현실만을 옹호하며 그 체제에 순응하기만 하는 ‘일차원적 인간’으로 살아가게 된 것이다.
비판이 마비되고 반대를 찾아볼 수 없는 현실, 바로 ‘일차원적 사회’는 압도적인 효율성과 경제적 생활수준 향상이라는 조건 위에서 사회적 모순과 갈등을 희석, 은폐시킨다.
마비된 비판 의식 속에서 ‘일차원적 인간’들은 끊임없이 소비하는 데 자신의 욕구를 바친다. 이러한 ‘허위 욕구’는 과도한 산업생산, 낭비, 실업, 소외와 억압 등의 부정적인 현실 모순을 비판적으로 인식하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그러니까 해방되고자 하는 진정한 의식과 욕구를 마비시킨다.
(라) 오늘날의 지식인들은 전통시대 지식인에 비해 그 역할과 영향력이 줄어들었다.
현재의 학자들은 정계에 진출해도 전문 지식과 머리를 제공하는 참모의 역할밖에 못하는 ‘한계인’들이 됐다. 그럼에도 한 시대를 이끈 사회 주체로서 진지하게 이상을 추구하며 학문과 행동을 일치시켜 갔던 선비상을 그리워하는 국민 정서는 아직도 선비다운 선비를 기대하고 있다. 현대인들은, 선비다운 선비가 없는 현실에서 가치 규범을 세우고 시비 판단의 잣대가 되며 사회의 소금이 되는 현대적 선비로서의 모습을 지식인에게 바라고 있는 것이다.
이 시대에 선비다운 선비를 요구하는 것은 무리한 주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사회적 요구에 제대로 부응하지 못하고 완벽한 선비다운 선비는 되지 못하더라도 지식인에게 주어진 책무와 기대는 여전히 막중하다.
어느 시대 어느 나라도 국가 비전을 제시하고 시대적 책무를 다한 집단은 지식인 그룹이었다.
● 문제 분석
。 문제는 주어진 제시문의 내용을 바탕으로 전체 내용을 종합적으로 정리할 것을 주문한다. 따라서 각 제시문에 대한 면밀한 요약과 정리가 필수적이다.。 (가)와 (나), (다)의 내용을 각각 100자 내외로 요약하라는 문제를 함께 출제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전체 내용을 고려할 때 문제에서 요구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내용이 될 것이다.
현대사회는 수많은 갈등과 대립을 통해 발전한다. 이 과정에서 지식인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사회를 움직이는 것은 말없는 다수의 대중이지만, 이를 올바른 방향으로 선도하는 것은 창조적 소수이기 때문이다.
이 문제에서는 사회를 움직이는 창조적 소수로서의 지식인 역할을 다루고 있다. 특히 4개의 제시문 중 (가)를 제외한 3개는 지식인의 필요성을 직·간접적으로 강조하는 내용들이다. (가) 글의 주장을 바탕으로 나머지 글에서 나타나는 주장을 반박하는 형식으로 글을 쓸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근대사회를 이끌었던 계몽적 지식인과 탈근대 사회가 요구하는 탈계몽적 지식인의 차이를 살펴보면서, 현대사회에도 왜 지식인이 필요한지에 대해 주장하는 것이 좀더 효과적일 것으로 보인다.
● 예시 개요
1. 지식인의 개념 : (나), (라) 글 참고
。 지식인은 특정 분야의 지식을 소유하면서 사회에 대해 지배적 여론을 형성하여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이다.
2. 지식인의 역할과 중요성 : (나), (라) 글 참고
。 지식인은 사회의 모순에 대항해 투쟁하는 존재다.。 따라서 사회발전을 위해 지식인에게 많은 역할을 기대하게 된다.。 미래사회에서도 이러한 기대는 바뀌지 않을 것이다.
3. 현대사회에서의 지식인의 역할에 대한 반론 : (가) 글 참고
。 하지만 이러한 지식인상에 의문을 갖고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많다.。 정보화사회에서는 다양성 때문에 하나의 중심적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내기 힘들다.。 정보화사회에서는 언론이 지식인의 역할을 대신하여 선도적 역할을 수행한다.
4. 현대사회에서 지식인의 의미와 중요성 : (나), (다), (라) 글 참고
。 미래사회에도 사회적 모순은 없어지지 않을 것이고 이를 비판할 지식인은 필요하다.。 1차원적 사회의 극복을 위해서 지식인은 필요하다.
● 제시문 해설
(가) 지식인이란 기본적으로 근대적(계몽주의적)인 개념이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보편적 주체’라는 이념과 밀접하게 결부돼 있다. 즉, 지식인은 ‘지도자, 해방자, 사회적 책임을 가진 자, 지적 권위를 인정받는 자, 프롤레타리아(민중)와 함께 하는 자’ 등과 같은 어떤 구체적 좌표에 위치하는 정신적인 존재로서 항상 보편적 이념과 가치에 근거하여 행동하는 자다. 주어진 상황이나 조건을 분석하고 비판함으로써 궁극적으로 민중을 고통으로부터 해방시켜주는 존재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사르트르적 지식인론에 반대해 리오타르적 입장을 대변하는 제시문은 지식인 시대의 종말을 선언한다. 사르트르적 근대 지식인의 개념에 의하면 지식인은 더 이상 현실사회의 변화에 적절히 대처할 수 없다는 것이다.
사르트르적 지식인론이 갖는 가장 큰 문제점은 무엇보다도, 근대적 지식인이 중시하던 ‘해방’이란 개념이 이미 그 유효성에 의문이 제기된 마르크스주의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사르트르가 사회계층을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으로 분류한 것이나, 민중 계급을 순수하고 혁명적인 계급으로 강조한 것은 마르크스주의의 영향 때문이다. 하지만 사회가 이전보다 훨씬 복잡해진 오늘의 관점에서 보면, 마르크스의 이분법적인 계급 분류나 노동계급의 순수성은 인정하기 어렵다.
다음으로 현대사회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개방화, 다원화, 정보화 사회의 관점에서 사르트르의 지식인론을 비판할 수 있다.
이런 점들에 의해 사르트르의 이론은 근대사회에서나 적용 가능한 계몽적 지식인론으로 현대사회에서는 적용될 수 없다는 비판을 받는다.
(나) 진정한 지식인이란 어떠한 기능과 역할을 담당해야 할까? 우선 지식인들은 자기 성찰을 통해 지배계급의 의해 주입된 특수성을 자각해야 한다. 다시 말해 지식인은 끊임없이 자신을 되돌아보는 반성적 행위를 통해 자신의 계급적 한계(정신적으로는 프롤레타리아계급에 가까우나 실제 삶의 모습은 부르주아에 가까운)를 솔직히 인정하고, 지배계급의 왜곡된 이데올로기에 저항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나아가 지식인의 이러한 실천적 행위는 지속적이어야 한다.
또한 지식인은 ‘사이비 지식인’을 경계해야 한다. 사이비 지식인은 지배계급의 사주를 받아 피지배계급의 착취와 억압을 정당화하려는 사람들이다.
지배 이데올로기를 부정하는 존재로서 지식인이 염두에 둬야 할 점은 가장 혜택받지 못한 계층의 관점에서, 또한 그 존재 자체가 스스로 지배 이데올로기의 모순을 폭로하는 사람들(예컨대 정부는 절대 빈곤이 없다고 말하지만 실제 절대 빈곤에 놓여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존재 자체가 정부 발표가 허위임을 증명해준다)의 곁에 서서 사회를 바라봐야 한다는 것이다. 지식인은 소외계층의 상황과 사고를 인식함으로써 자신의 확실한 위치를 알게 되고, 자기 스스로가 갈등을 내재한 모순적 존재임을 깨닫게 된다.
소외계층 스스로 자신을 대변해줄 지식인을 배출하지 못하기 때문에 지식인이 먼저 그들에게 다가가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다) 1차원적 사유는 정치 제조자와 정보 조달업자에 의해 체계적으로 조장된다. 그들의 진술 세계는 끊임없이, 그리고 독점적으로 반복되어 최면적인 정의 또는 지시가 되는 자기확인적 가설로 구성된다.
예를 들어 직업을 선택할 때 우리는 나의 행복을 위해, 자아실현을 위해 직업을 선택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직장인으로서 나의 삶은, 열심히 일하거나 회사를 그만두고 굶거나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는 문제가 된다.
결국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라는 것은 회사에서 열심히 일하는 것밖에 없는 강제적인 선택에 불과하다. 이러한 현상이 구조화되면서 우리는 회사의 발전을 위해 나의 전부를 바치게 된다.
따라서 회사의 운영 방침이나 회사가 나의 삶을 어떻게 침해하고 있는가라는 점에 대한 문제 제기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게 된다. 나아가 ‘열심히 일한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휴가를 받았을 때, 그것이 행복을 가장한 불행임에도 행복한 시간이라고 착각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듯 일차원적 사회는 ‘풍요와 자유를 가장해 사적 및 공적 생활의 영역에서 모든 진지한 반대를 말살하고 모든 선택 가능성을 소멸시키는’ 사회다.
(라) 선비란 높은 품격의 인성과 지성을 겸비한 지식인을 말한다. 그 성격을 한 마디로 규정하면 맑음의 미학에 기초하고 있다. 그들의 지향처는 수기치인(修己治人)이다. 즉, 어려서부터 철저한 인성 교육을 받고 학문을 연마하는 ‘수기’ 단계를 거쳐 완성된 인격체에 이르러야 남을 다스리는 ‘치인’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는 기본 입장이었다. 여기서 치인이란 권력 개념이라기보다 봉사 개념에 가깝다. 수기의 단계에선 사(士)이고 치인의 단계로 나가면 대부(大夫)이므로 ‘사대부(士大夫)’로 규정됐다.
그들은 배움에 있어서 학문과 예술을 일치시키는 학예일치(學藝一致)를 추구했으니 전공 필수로 문학·역사·철학의 ‘문사철(文史哲)’을, 교양 필수로 시와 글씨·그림의 ‘시서화(詩書畵)’를 연마했다. 문사철(文史哲)을 통해 이성 훈련을, 시서화를 통해 감성 훈련을 받은 것이다. 이성 훈련은 의리(義理)의 구현으로, 감성 훈련은 인정(人情)의 구현으로 나타난다. 의리와 인정은 사람다운 사람이 되기 위해 갖춰야 할 덕목이었고, 선비는 이 두 가지를 균형 있게 조화시킬 수 있는 인간형을 말한다.
그리하여 선비는 의리를 지키기 위해 서릿발 같은 기개와 꼿꼿한 지조로 역할 모델이 되는가 하면, 어렵거나 고통받는 사람을 위해 따뜻한 인정을 베푸는 인물이었다. 즉, 합리적이면서도 인간적인 전인적 이상형에 도달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사람이었다.
한 마디로 선비는 지식인으로서 사회적 역할의 극대화를 위해 공적인 일을 우선하고 사적인 일을 뒤로 하는 선공후사(先公後私)와 공평무사(公平無私)를 생활신조로 삼았으며 최종적으로 극기복례(克己復禮)하고자 노력했다.
| 조혜정, ‘글읽기와 삶읽기 2’ |
식민지 지식인은 식민 종주국에서 만들어진 지식이 현실과 맞지 않는다고 해서 수정할 근거도, 필요성도 느끼지 않으며 또 그럴 능력도 없으므로, 아예 자신이 선호하는 어떤 절대적인 틀을 정해놓고 그 속에서 소비자가 되어버린다. 그 틀 안에서 자신의 위치를 굳혀가는 길을 찾는 데만 급급하다. 식민 종주국에서 지식인은 지식의 소비자이자 생산자이지만 식민지의 지식인은 오로지 소비자일 수밖에 없으며, 자신이 값을 치르고 산 지식을 가능한 한 비싼 값으로 팔고자 할 뿐이다.
식민지적 문화에 젖은 지식인은 머리도, 감성도 식민지화돼 버려서 외국에서 새로 나온 패션을 곧바로 자기에게 어울리게 입듯이, 새 이론을 금방 근사하게 자기 것으로 치장해내는 뛰어난 능력을 가진다. 그의 ‘수준 높은’ 감각은 ‘수준 낮은’ 자생적 예술품에 혐오감을 갖게 하며, 자생적 이론을 거들떠보지도 않게 한다. 같은 내용의 말을 들었더라도 자기 나라 학자들이 한 말은 인용하지 않고, 외국 석학이 쓴 책만 인용한다.
물론 그들에게는 스승이 없다. 지식이 축적되지 않는 것과 관련하여 나는 항상 스승의 문제를 생각해 보곤 한다. ‘학파는 없고 당파만 있는 학문계’라는 진단을 우리는 자체적으로 내려왔다. 이 땅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많은 지식인들은 아직도 유학파이고, 또 그들이 외국 이론에 매달려 있는 한 그들이 떠받치는 학자는 이 땅의 학자가 아니다.
그들은 ‘진짜 스승’이 없거나 있더라도 외국에 있으며, 이곳에 있는 스승은 다른 용도로 필요하다. 이들은 설날에 ‘스승’에게 세배를 드리러 가고 인간적 충성을 수시로 확인해가면서 사회적으로 안정된 연줄 결속망에 들어간다. 이 땅의 스승은 학문적 영감을 주는 존재라기보다 기득권층에 속하기 위해 필요한 연줄로서의 의미가 더 큰 것이다.
각론은 없는데 총론만 되풀이해서 외치는 구호적인 사회, 거창한 이론과 전문 용어는 누구보다 잘 외우고 있으면서 막상 자신의 이야기는 할 줄 모르는 이들이 큰 목소리를 내는 세상, ‘지식 수입상’이 성업 중인 사회에서는 특권층으로서의 엘리트나, 책 속에 빠져서 소일하는 ‘학자’는 있을지 몰라도 지식인이 나오기는 힘들다.
| 김주연, ‘사악한 지식인’ 중 ‘키 작은 지식인’|
지식인들의 비극은 그들 스스로 현실적으로 힘이 있다고 생각하는 데 있지 않나 하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착각일 수도 있는 이러한 생각 때문에 웃지 못할 여러 현상이 있을 수 있겠으나, 너무 자주 많은 지식인들이 그들 스스로의 힘을 과신하고 여기저기 나서는 일을 보게 된다. 그러나 상당한 경우, 그들에게 요구되었던 부분은 기껏해야 기능적, 도구적 수준인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자존증의 또 다른 모습은 기능적인 수준이 아닌, 사태의 본질에 대한 본격적인 비판의 모습을 띠는 경우에도 발견된다. 이른바 지식인의 이념 투쟁 장면을 상기해보면 좋을 것이다. 이데올로기가 싸움으로까지 이어지는 처절한 비극 속에서 지식인이 발견해낸 자화상은 무엇일까. 청년 마르크스의 순수하고 맑은 얼굴과 그의 좌절, 파탄을 생각하면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없을까. 거기에는 독일 관념론, 혹은 이상주의의 승리와 그 한계가 동시에 함축되어 있다. 그 교훈은 비단 19세기 독일인들만의 것이 아니다.
비판은 지식인의 몫이자 의무다. 그러나 비판은 비판의 카테고리를 넘어설 때 온갖 복잡한 문제들과 만나게 된다. 비판의 대상이 된 현실에 직접 개입하게 되고, 자신이 비판하고 제시한 수준으로 현실을 개혁하려고 하는 의지 때문에 그는 곧 이상주의자가 된다. 그러나 모든 이상주의는 무릇 실현되는 법이 없다. 그것은 진리며 신의 섭리다. 지혜로운 인간은 여기서 인간의 한계를 깨닫고 겸손해진다. 그러나 많은 지식인은 이상주의라는 이 거대한 꿈과 허위를 향해 돌진하거나 주저앉거나 둘 중 어느 한쪽으로 기운다. 참으로 지식인에게서 지혜를 찾기란 숲 속에서 낚시질하는 격으로 느껴지는 장면이다.
지식인에 대한 나의 이러한 생각이 지나치게 부정적이라고 비판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그러나 ‘비판’이 생명인 지식인이 그 스스로 비판을 싫어한다면 우스운 노릇이리라. 또 이즈음 잘 사용하는 ‘전략’이라는 개념을 사용한다면, ‘비판적 전략’이라는 것도 흥미 있는 이해의 방법일 수 있을 것이다.
자, 그렇다면 더욱 ‘센 비판’을 해보자. 지식인들은 기능적 현실 참여, 이상주의적 비판, 소외와 좌절감이라는 패러다임 밖으로 나올 의사도 능력도 없는 존재며 집단인가? 아니 그 정도의 비판만으로 비난이 면제되어도 좋은가? 그런 범주에 머무르기에는 너무도 힘없고, 그렇기 때문에 때로는 너무도 왜소하기까지 하다고 나는 감히 더 나아가고 싶다.
물론 이런 에피세트(주 : 관형어구)를 집단적으로 붙이고 다니기엔 적어도 우리 한국의 지식인들은 한결 씩씩한 면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확실한 지식인 집단에 이러한 속성, 즉 무력함과 왜소함이라는 특징이 있다는 느낌에 나는 최근 줄곧 사로잡혀 있다. 게다가 많은 지식인들은 지적 우월주의에 사로잡혀 있으면서, 남을 비판하는 사이사이 자신은 은연중 완벽한 듯한 얼굴을 내보이기 일쑤다. 물론 위험하거나 불리할 경우 꼬리를 슬그머니 감추는 것도 그들의 몫이다. 기회가 닿는다면 비단 우리 지식인들뿐 아니라, 지식인 일반에 대해서도 관심을 돌려 살펴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