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날 이후 독일은 여러모로 가슴을 졸여야 했다. 특히 신나치주의자들을 걱정하는 사람이 많았다. 월드컵 직전 이러한 우려는 현실이 되는 듯했다. 5월22일 옛 동독 지역인 마그데부르크에서 한국인 유학생(31)이 신나치주의자로 알려진 독일 청년한테서 구타를 당하는가 하면, 한 터키계 정치인은 동베를린에서 신나치주의자에게서 “더러운 외국인은 가라”는 욕설을 들었다.
독일월드컵조직위원회는 날씨 때문에도 노심초사했다. 개막 이틀 전만 해도 한낮의 기온이 겨우 10℃를 오르내렸고, 맑은 하늘을 구경하기도 힘들었다. 그러나 월드컵 개막과 함께 날씨는 마치 신이 축복이라도 내린 양 더할 나위 없이 쾌청해졌다. 당초 우려되던 훌리건이나 신나치주의자의 ‘행패’도 아직까지는 발생하지 않아 지구촌 축구 축제는 별 문제 없이 순항 중이다.
도시마다 대형 전광판 설치
2002년 한일월드컵을 통해 이곳 사람들이 우리에게 배운 것이 하나 있다. 바로 거리응원이다. 도시마다 광장에 대형 스크린을 설치해놓고, 누구나 함께 응원하고 즐기도록 했다(4년 전에는 없던 모습이다). 내가 사는 작은 마을에서도 시냇가 공터에 커다란 전광판을 설치했다. 그리고 물가에는 모래를 깔아서 작은 백사장을 만들었다. 함께 모여서 월드컵 경기도 보고, 일광욕도 즐기며, 아이들은 모래성도 쌓고, 개울에 들어가 놀기도 하는 시민의 놀이터가 생긴 셈이다.
4년 전 한국을 연상케 하는 것이 또 있다. ‘대∼한민국’ 열풍이 한반도를 뒤덮었던 것처럼 독일에서도 검정, 빨강, 황색의 독일 국기 색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성격의 민족감정이 끓어오르고 있는 것. 독일 국기가 요즘처럼 도처에서 눈에 띈 적은 없었다. 건물 창문, 자동차, 심지어는 유모차에서도 국기가 휘날리고 거리를 누비는 젊은이들의 모자와 옷, 그리고 어린이들의 뺨에 국기를 새기는 것은 이제 일상적인 모습이 됐다.
‘우리는 대한민국입니다’라는 한국의 한 이동통신회사의 광고와 비슷한 TV 광고가 독일에서도 방영된다. ‘당신이 독일입니다’라는 공익광고다. 16강 진출을 사실상 확정지으면서 애국심의 물결은 더욱 고조되고 있다. 제3자가 보기에는 다소 심하다고 여길 만큼 독일인에게 민족의식은 오랫동안 금기였다. 국제경기가 열릴 때마다 의례적으로 부르는 국가를 그들은 당당하게 부르지 못했다. 빌리 브란트 전 총리가 국가를 불렀다는 이유로 비판받았듯, 독일과 관련된 모든 것을 깎아내리는 게 한동안 유행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움츠린 자세는 이번 월드컵을 계기로 송두리째 사라질 것 같다. 독일의 애국심 고취가 정당한지의 논란은 이제 수면 밑으로 가라앉았고, 꽤 오랫동안 침체의 늪에 빠졌던 독일은 월드컵을 계기로 ‘새로운 민족 중흥의 시대’를 열고자 하는 강한 기대를 가지고 있다. 베스트셀러 작가인 마티아스 마투섹은 ‘빌트’와의 인터뷰에서 “독일인들이 이번 월드컵을 통해 민족감정이 어둡거나 나쁜 게 아니라 아주 자연스럽고 가벼운 것이라는 걸 느낄 수 있다는 점을 알아챘다”고 말했다.
LG전자의 지상파 DMB폰(왼쪽). LG전자는 독일의 베를린과 뮌헨, 프랑크푸르트 등 3개 도시를 마케팅 전략 지역으로 선정하고 주요 공항과 지하철, 버스, 건물 등에 인쇄광고나 대형 옥외광고 등을 설치했다.
LCD, PDP 등 평면TV 판매량도 빠르게 늘었다. “1974년 독일월드컵 당시 컬러TV가 급속히 보급된 것처럼, 이제 최신형 평면TV가 사회적 성공의 상징으로 여겨지고 있다”는 보도도 있었다(독일은 뉴미디어 분야에서 한국보다 몇 걸음 유행에 뒤처져 있다). 그러나 즐거움도 잠깐, 많은 사람들이 새로 구입한 TV 화질에 실망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독일을 비롯한 유럽의 방송주파수가 아날로그 내지는 Pal 방식이어서 디지털 NTSC 방식을 기준으로 생산된 첨단 TV와 잘 맞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벽에 TV를 걸어놓고 만족해하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월드컵 매춘 특수 즐거운 비명
독일의 홍등가도 즐거운 비명을 지르고 있다. 남편을 독일로 보낸 여성들의 가장 큰 걱정은 매춘일 듯싶다. 반대로 2002년부터 매춘을 합법화한 독일의 매춘여성들은 특수를 누리고 있으며, ‘월드컵 장터’를 노리고 중남미와 동유럽의 매춘여성들까지 대거 입국해 남성들을 유혹하고 있다. 월드컵이 끝날 때까지 총 300만명이 매춘업소를 찾을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매춘여성들은 한 사람의 손님이라도 더 끌기 위해 시간대별 할인, 원정 매춘 등 다양한 상품을 내걸고 마케팅에 열을 올리고 있다.
6월13일 한국-토고전 경기가 열리기 서너 시간 전부터 프랑크푸르트 중앙역 앞은 독일 각지에서 몰려든 원정 응원단, 한국 교민, 유학생, 배낭여행족 등 5000여 명의 ‘붉은 악마’로 북적였다. 에시본에서 오는 국철인 에스반(S-Bahn)의 열차 한 칸을 모두 한국인이 차지하기도 했다고 한다. ‘대~한민국’을 외치는 한국인들의 목소리로 프랑크푸르트가 소란스러웠을 정도다.
중앙역 앞에는 이 지역의 대표적 홍등가인 카이저스트라세가 있다. 50개에 달하는 이곳의 매춘업소들은 4~5층 규모의 기업형이다. 1층은 포르노물 판매점, 2층은 성인용품 전문점, 3층 이상은 매춘여성들이 손님을 기다리는 곳이다. 매춘 가격은 30~50유로(약 3만~6만원)로 알려져 있는데, 공식적인 가격이 있는 것은 아니다. 월드컵 특수로 가격이 높아진 데다 매춘여성들과 직접 가격을 흥정해야 하기 때문에 바가지를 쓸 가능성도 높다고 한다.
붉은 물결 프랑크푸르트 점령하다
6월13일 오후 프랑크푸르트 메세(박람회장) 안의 아고라 광장. 그곳은 이미 ‘붉은 악마’ 응원복을 입은 한국인들로 가득 차 있었다. 무대 위에서는 누군가 응원구호를 힘차게 선창했고, 치어리더들은 흥을 돋웠다. 잘 정돈된 공간이었고, 응원을 이끄는 솜씨도 빼어났다. 다만 메세 광장은 외부인 출입이 봉쇄된 채 한국 사람들만 소리 높여 외치는, 상업적 냄새가 물씬 풍기는 ‘닫힌 공간’이었다.
호기심에 못 이겨 상당히 멀리 떨어진(도보로 1시간) 다른 응원장소로 자리를 옮겼다. 프랑크푸르트시는 마인강 한복판에 대형 전광판을 설치해놓고 시민들이 양쪽 강변에서 월드컵 경기를 관전할 수 있게 했다. 재독 동포응원단(단장 선경석)이 조직한 ‘붉은 호랑이’는 이곳에 자리를 잡았다. 마인 강변 응원장소는 외국인들도 자연스럽게 오갈 수 있는 열린 공간이었다.
경기가 한국의 승리로 끝나자 강변 응원장소는 서울시청 앞 광장이나 다름없었다. 다음 경기를 기다리던 사람들에게 마인 강변 자리를 넘겨주고 “대~한민국” “이겼다, 이겼다”를 연호하면서 붉은 호랑이는 삼삼오오 흩어졌다. 그러나 이것이 끝이 아니다. 승리의 감격에 취한 사람들은 시가지로 ‘진격’해 대한민국의 승리를 외쳤다. 누가 시킨 것도, 조직화된 것도 아니었다. 그저 몇 사람이 “대~한민국”을 외치면,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개선군처럼 행진하던 중 빨간색 옷을 입은 일군의 무리가 북, 꽹과리 소리와 함께 저 멀리에서 다가왔다. 메세 광장에서 오는 ‘붉은 악마’ 응원단이었다. 태극기를 앞세우고 농악대와 함께 진군해온 대한민국 응원단은 ‘점령군’이었다. 흩어져 있던 한국인들이 마침내 하나의 깃발 아래 모여들었다. 목적지는 프랑크푸르트 시청 앞 뢰머 광장. 뢰머 광장은 이날 저녁 한국에 점령당했다. 한국인들이 세계 여러 민족 앞에서 프랑크푸르트의 심장부를 정복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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