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지에서 팔리던 성인용품이 ‘당당한 기호품’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이건 어때?”
“우리한텐 무리야.”
속삭임을 뒤로한 채 매장을 떠난 두 사람을 쫓아갔다. 주인공은 회사원 김양현(가명·33) 씨와 그의 여자친구. 김 씨는 “성인용품 전문점이 생겼다기에 구경하러 왔는데 매장이 작아서 약간 실망했다”면서 웃었다.
이어 외국인 한 명이 매장을 둘러보다 떠났고, 20대 남성 한 명이 “민망해서 못 들어오겠다는 여자친구를 설득하다가 혼자 들어왔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5월24일 문을 연 ‘부르르’는 성인용품 하면 으레 떠오르는 어두침침한 곳이 아니다. 진열된 성인용품은 앙증맞고 귀여웠다. 매장을 맡고 있는 김용석(33) 씨는 “성인용품은 어둡고 음침한 것이 아니라 밝고 재미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리고 싶었다”며 “강남에 2호점을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어른들 장난감 … 여성 고객 늘어
도로변이나 트럭 뒤에서 팔리던 성인용품이 ‘당당한 기호품’으로 자리 잡고 있다. 성에 대한 개방적인 풍토가 성인용품에 대한 거부감을 줄이고 있는 것. 특히 성인용품을 찾는 여성들이 최근 크게 늘었다는 것이 업계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인터넷에서 성인용품 쇼핑몰을 운영하는 정모(46) 씨는 “소비자 가운데 남성이 아직 7대 3 정도로 많지만, 여성용품이 더 비싸기 때문에 매출 규모로 따지면 남성과 여성이 5대 5 정도다”라고 덧붙였다.
팍시러브(foxylove.net) 등 여성 사이트와 블로그에는 성인용품 사용후기가 꾸준히 올라오고 있으며, 여성지에서 성인용품을 다루는 것도 더 이상 낯설지 않다. 케이블 TV에서 인기리에 방영됐던 미국 시트콤 ‘섹스 앤 더 시티’가 성인용품에 대한 여성들의 거부감을 줄이는 데 한몫했다는 것이 업계의 평가다.
성인용품 업계도 노골적이거나 자극적인 디자인 대신 장난감처럼 부담 없이 가지고 다니며 즐길 수 있는 제품들을 내놓고 있다. 성인용품의 ‘펀(fun) 마케팅’은 일반인들의 상상력을 뛰어넘는다.
욕조에 띄워놓으면 아이들 장난감처럼 보이는 노란색 오리는 배를 누르면 부리와 꽁지가 진동하며 여성들을 만족시킬 수 있게 설계됐다. 이 디자인은 MSN 메신저의 깜찍한 캐릭터를 따온 것이다. 조약돌 모양의 스웨덴산 바이브레이터 ‘레로’는 일본 여성들 사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제품으로, 업계에서 ‘부르주아적 감수성을 자극한 명품’으로 불린다. 8가지 진동 모드를 가진 펭귄 모양의 진동기, 아가미를 누르면 몸체가 진동하는 금붕어, 빛과 떨림이 함께하는 프레시 진동기, 리모컨으로 조절되는 UFO 진동기, 과일 모양의 남성용품 등 성인용품은 ‘쿨하디 쿨한’ 컨셉트와 디자인으로 소비자들을 유혹하고 있다.
업계에서는 성인용품의 주 구매층을 30, 40대로 보고 있다. 중간 정도의 학력을 가진 사람들보다 고학력자나 저학력자들이 상대적으로 많이 찾으며, 겨울에 많이 팔린다. 매장보다는 인터넷으로 물건을 사는 사람들이 많으며, 특히 여성은 대부분이 인터넷 쇼핑몰에서 구매한다.
연 1000억원대 시장 규모, 수입은 불허
인터넷으로 제품을 고르다 보니 자신에게 알맞은 상품을 고르기가 쉽지 않은 데다, 음성적으로 유통돼 제품에 명백한 결함이 있지 않는 한 애프터서비스나 교환, 반품이 쉽지 않다. 따라서 소비자와 판매자 간의 의견 충돌도 심심치 않게 발생한다. 사이즈가 다르다거나 흥미가 떨어졌으니 바꿔달라고 하는 사람들은 그나마 양호한 편이다. 한 성인용품 쇼핑몰 운영자는 “실제 여성과 비슷하게 디자인된 남성용품을 사간 구매자가 한 달 뒤 전화해 ‘모형에 음모가 없으니 바꿔달라’고 말할 때는 정말로 황당했다”고 털어놓았다.
남성 고객 가운데에는 유명 성인용품 제조사와 모델명을 줄줄이 꿰는 마니아도 적지 않다고 한다. 이들은 제품을 까다롭게 고르기는 하지만 뒷말이 없는 편이라고 한다. 반면 여성용품은 남성이 선물용으로 사거나 업소 여성들이 대량으로 구매하는 경우가 많다.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업계 관계자들은 성인용품 시장의 규모를 연간 1000억원 정도로 추산한다. 작지 않은 규모임에도 관련 법이나 담당 관청이 없다. 성인용품이 음란물이 아니며 판매할 수 있다는 법원 판결이 여러 번 나왔지만 여전히 세관에서는 ‘미풍양속을 해치는 물품’이라는 이유로 성인용품 정식 수입을 불허하고 있다. 지난해 출범한 성인용품협회의 정윤재(46) 사무국장은 “선진국들처럼 성인용품을 합법화, 양성화하는 것이 우리의 목표다. 하지만 정부에서는 대화조차 하지 않으려고 한다”고 말했다.
따라서 수입업자들은 ‘의료용구’나 ‘장난감’ 등으로 위장해 성인용품을 들여오고 있다. 유통구조가 투명하지 않다 보니 중간에서 폭리를 취해도 알 길이 없고 모조품이 나돌아도 구별할 방법이 없다. 일본 제품들은 현지 가격보다 2배가량 비싸게 판매되고 있지만 진짜 수입품인지, 모조품인지 알 수 없다. 남성용 실리콘 제품은 포장과 내용물이 다른 경우도 있다고 한다. 성인용품점에서 취급되는 일명 ‘칙칙이’나 ‘러브 젤’ 등은 식품의약품안전청이나 보건복지부의 안전 점검을 거치지 않은 채 판매되기 때문에 부작용이 생길 수도 있다.
성인용품 자체의 부작용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호주 웨스턴 시드니대학 교수이자 한국성건강센터 소장인 홍성묵 박사는 “시판 중인 성인용품들 중에는 효과가 과장된 게 많아 부부관계 시 도움이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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