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대한민국의 방송에는 오로지 월드컵만이 존재하는 듯하다.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일이라고 한다. ‘전파의 공공성’ ‘전파의 희소성’이라는 방송학의 명제에 비춰봐도 그렇고, 채널 선택권을 철저하게 빼앗긴 수용자의 입장에서도 이건 도무지 말이 안 된다. 월드컵에 관심 없는 소수 혹은 다수일지도 모르는 이들의 권리는 어디서 찾아야 할까?
영화와 음악 등 문화계에도 월드컵은 최대의 적이다. 대중의 관심을 온전히 앗아가버린 월드컵 때문에 문화계는 거의 패닉 상태다. 그래서 월드컵 기간에 영화 개봉과 음반 출시를 피하는 것은 이 바닥에서는 마케팅의 상식이다. 지독한 모험을 하고 싶지 않다면 월드컵의 광풍이 지나간 뒤로 미루는 것이 상책이다.
나 역시 축구를 좋아하고 월드컵에서 대한민국의 선전을 누구보다 바라며, 또 직업이 방송국 PD인 탓에 월드컵 특집을 기획·제작하고 있는 형편이라 이런 말을 꺼내기가 영 마음이 편치 않지만, 지나친 건 지나치다고 한번 짚고 넘어가자. 세상에 월드컵만 있는 것은 아닌 것이다.
오늘 밤에는 TV를 끄고 시원한 맥주 한 잔에 좋아하는 음악이나 실컷 들어야겠다. 모두가 축구에 빠져 곁눈질조차 하지 않는다면 음악이 너무 슬플 것 같아서 말이다. 내가 고른 음악은 오늘도 라디오 전파를 탈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는 오늘도 음악을 듣고 싶어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