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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쾰러 대통령 獨 정가 ‘공공의 적’

의회 통과 법률 두 차례 거부권 행사 … 연금법 등 민감한 안건 처리 벌써부터 ‘한숨’

  • 슈투트가르트=안윤기 통신원 friedensstifter@gmail.com

    입력2007-01-10 15:2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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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통령이 문제야!” 최근 독일 정가로부터 심심치 않게 들려오는 소리다. 독일 국가원수인 호르스트 쾰러 대통령이 어쩌다가 ‘문젯거리’로 정계와 언론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었을까? 직접적인 이유는 그가 최근 의회를 통과한 법률 승인을 두 차례나 거부했기 때문이다.

    2006년 4월 연방의회는 국영 항공관제기관인 독일항공안전(DFS)의 지분 75%를 민간에 매각하는 민영화 법안을 통과시켰다. 이는 정부의 기업 관여를 제한하는 유럽연합(EU) 규정에 부합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쾰러 대통령이 10월24일 “영공의 안전은 국가 임무”라며 이 법안의 승인을 거부했다.

    더 큰 ‘쾰러 논란’은 두 달 후 벌어졌다. 12월8일 퀼러 대통령이 ‘소비자정보법’에 대한 승인을 거부한 것. 광우병 파동, 감자 가공식품에 대한 유해 화학물질 첨가 등으로 한창 시끄러웠던 2002년에 처음 발의된 이 법은 소비자가 제품 정보를 더 많이 얻을 수 있게 하자는 취지에서 나왔다. 식품업체의 반발 등 우여곡절 끝에 이 법안은 2005년 비로소 상원과 하원을 차례로 통과, 대통령 승인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그러나 쾰러 대통령은 이 법이 위헌 요소가 있다며 11월 총리와 정부의 입장 표명을 요청했고, 이에 메르켈 총리는 법이 위헌적이지 않다는 의견을 밝혔다. 그럼에도 쾰러 대통령은 소비자정보법에 대한 승인을 거부했다. 이 법이 ‘연방정부는 지방정부에 업무를 부과할 수 없다’는 헌법 조항에 저촉된다는 이유에서다.

    대연정 금갈 만한 초유의 사건



    쾰러 대통령의 잇따른 거부권 행사는 한편으로 일리 있어 보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심각한 파장을 일으킬 성격의 것이다. 해당 법이 위헌 요소가 있는지는 총리실이나 헌법기관에서 이미 수차례 검토했다. 게다가 소비자정보법안 처리는 기민련과 사민당의 대연정 협상에서 채택한 사안이기 때문에 이 법안의 좌초는 대연정에 금이 갈 빌미가 될 수 있다. 무엇보다 독일에서 대통령의 거듭된 거부권 행사가 사상 초유의 사건이다.

    의원내각제를 채택하고 있는 독일은 대통령의 권한이 매우 제한적이다. 독일 대통령은 총리 추천과 임명, 법률 승인과 공포, 외국과의 조약 서명, 외국대사 신임장 수령 등을 주요 권한으로 갖는다. 그러나 이 모든 경우는 연방정부 구성원의 서명 또한 요구하고 있다. 실상 연방정부의 총리나 장관이 실무적으로 처리한 사안에 대해 대통령이 서명 하나를 추가하는 형식적인 절차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로만 헤르초크 전 대통령(1994~99)은 스스로를 ‘연방 공증인’이라며 희화화해 표현하기도 했다.

    과거 바이마르공화국 시절(1919~ 33)에는 대통령이 수상과 내각, 주지사에 대한 임명권, 긴급명령권 등 강력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고, 또 국민에 의해 직접 선출돼 의회 못지않은 정치적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 이는 히틀러의 나치 세력이 절대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발판이었다. 이처럼 대통령의 권력이 악용된 불행한 선례가 있었기에 1949년 수립된 독일연방공화국 헌법에서는 대통령의 권한을 크게 약화했다. 임기를 7년에서 5년으로 줄이고 간선제를 채택했으며 권한도 극히 형식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쾰러 논란’의 중심축인 법률거부권만 해도 과거 8차례만 사용됐는데 그중 6차례는 절차상 결함 때문이었다. 단 두 차례(1961년과 91년)만 법안 내용을 이유로 승인이 거부됐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실제 법안의 문제가 뚜렷했거나 추후 보완조치를 통해 해결됐기에 큰 논란거리가 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쾰러 대통령은 불과 6주 사이에, 그것도 문제성이 확실하지 않은 사안을 놓고 두 차례나 거부권을 행사했다. 이례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정치 관여 긍정적’ 국민에겐 인기

    쾰러 대통령은 “위헌성이 뚜렷했기 때문”이라고 승인 거부 이유를 분명히 말했다. 그리고 “대통령의 승인은 헌법이 규정한 입법 과정의 한 요소다. 본인은 그 의무에 충실할 뿐”이라고도 밝혔다.

    그러나 쾰러 대통령의 발언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거의 없다. 대통령이 스스로를 ‘작은 헌법재판소’라고 착각하는 것은 아닌지, 혹시 측근 몇 사람의 말만 듣는 것은 아닌지 추측이 난무하다. 언론은 지난해부터 대통령의 법률자문을 맡고 있는 슈테판 울리히 피퍼를 문제의 원인으로 지목했다. 아무튼 대통령이 헌법이 정한 권한의 한도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드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혹이 짙다.

    사실 이러한 지적은 2004년 대통령 선출 직후부터 있었다. 대외적으로 국가를 대표하고 대내적으로는 국민통합을 위해 중립을 지키며 덕담을 하는 전임 대통령들과 달리 쾰러는 정치 현안에 대해 적극적인 발언을 서슴지 않았기 때문이다.

    애써 통과시켰지만 거부돼 돌아온 법률안을 받아든 독일 정치인들은 그저 어이없어할 뿐이다. 이런 작은 안건에 대해서도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한다면 이보다 훨씬 민감한 의료보험법이나 연금법 등은 향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막막하다는 하소연이 독일 정가 곳곳에서 쏟아지고 있다.

    누구보다도 당혹스러운 쪽은 3년 전 쾰러를 대통령 후보로 추대한 기민련 정부 내각이다. 쾰러는 ‘메르켈의 대통령’이라고 불릴 정도로 대통령직에 오르기까지 메르켈 당시 야당 당수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그런데 연정 파트너인 사민당과 협상하랴, 드센 지방 주지사들 달래랴 정신없는 메르켈 정부에 도움을 주기는커녕 부담만 주고 있는 형국이다. 메르켈의 정치적 라이벌인 롤란트 코흐 헤센 주지사는 “그러기에 정치 문외한을 대통령으로 추대하는 게 아니라고 경고하지 않았느냐”며 메르켈을 비꼬았다. 쾰러 대통령은 독일 굴지의 은행인 슈파카세 총재, IMF 총재 등을 역임한 경제인 출신으로 ‘극단적인 자유시장주의자’라는 평가를 받는 인물이다.

    현재 독일 정치인들에게는 쾰러 대통령에게 ‘제동’을 걸 뾰족한 방법이 없는 듯하다. 대통령 권한 남용을 이유로 헌법재판소에 소추하는 것은 매우 드물면서도 극단적인 방법이라 부담스럽다. 무엇보다도 쾰러 대통령은 국민에게 인기가 좋다. 지난해 12월 중순 설문조사에 따르면, 쾰러 대통령이 현실 정치문제에 관여하는 것에 대해 85%가 “긍정적”이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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