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에서 많은 관객을 끌어모았던 프랑스 영화 중 ‘퐁네프의 연인들’이란 작품이 있다. 정작 프랑스에서는 흥행에 실패해 감독에게 적잖은 시련을 안겨줬지만, 한국 관객들은 이 영화에 열광했다. 무엇이 한국 관객들을 끌어당겼을까.
이 작품이 개봉된 것은 1993년 무렵으로 해외여행이 그리 활발하지 않던 때다. 화면에 펼쳐진 프랑스 파리의 풍광이 매력적이었던 것일까? 하지만 영화는 그런 프랑스적 낭만과는 거리가 멀었다. 센강을 가로지르는 ‘퐁네프’라는 다리 아래에서 하루살이 삶을 살아가는 젊은 노숙자들의 이야기였으니, 파리의 낭만적 정취가 끼어들 여지는 별로 없었다. 거꾸로 ‘빛의 도시’ 뒤 그늘에서 벌어지는 어둠과 그늘이 한국 관객들을 잡아끌었는지도 모른다.
시력을 잃어가는 화가 미셸과 곡예사이면서 자신의 삶 자체가 외줄타기처럼 위태로운 알렉스. 영화는 이들을 통해 파리의 이면, 대도시 삶의 단면을 드러내면서 불우하지만 그렇기에 한편으로 자유로울 수 있었던 남녀의 격렬한 사랑을 그리고 있다.
‘퐁네프의 연인들’과 비슷한 시기에 개봉된 ‘피셔 킹’. 흔히 현대인의 고독과 소외에 대한 우화로 알려진 이 영화는 하루아침에 노숙자로 전락하는 남자들에 대한 이야기다. 청취자들의 전화에 늘 냉소적인 답변으로 응하는 방송국 라디오 DJ 잭. 어느 날 애인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는 젊은이에게 무심코 “여피들을 모조리 쓸어버리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 젊은이가 진짜로 총기난사 사건을 일으키자 방송국에서도 쫓겨난다. 하루하루 의미 없이 건달로 살아가는 그를 구원하는 것은 대학교수에서 미치광이 노숙자가 된 남자 페리다. 영화 결말부에서 두 사람이 뉴욕 도심의 공원에서 벌거벗고 누워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장면은 진정한 자유가 안락한 집을 나와 거리로 나앉을 때 비로소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누구든 하루아침에 안정된 생활 무너질 수도
집 없이 떠도는 삶, 거리에서 살아가는 삶이란 한편으론 자유와 해방의 입구인 듯 보인다. 숨을 죄는 듯한 제도권과 기성의 질서에서 비켜나 있기에 자유로운 노마드의 삶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래서 한국 영화 ‘고래사냥’에서도 소심하고 용기 없는 청년 병태가 실연의 상처를 못 견디고 고래를 잡겠다며 가출해 거리를 배회할 때, 그를 새로운 삶으로 이끌어준 이는 부랑자 민우였던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현실로 돌아와보자. 요즘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노숙자들을 과연 영화 속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사람들처럼 바라볼 수 있을까. 모든 노숙자가 한 줌의 햇볕만을 원했던 철학자 디오게네스처럼 자유를 꿈꾸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아침 출근길의 도심 지하철역에서 흔히 마주치는 노숙자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에 담겨 있어야 할 것은 우리 자신의 삶이 그들과 멀지 않은 곳에 놓여 있다는 자각이다.
영화 ‘로드 무비’에서 술에 취한 채 거리에 쓰러져 괴로워하는 남자, 유능한 펀드매니저였으나 주가 폭락으로 한순간 거리로 나앉게 된 석원처럼 아무리 안정적으로 보이는 삶이라도 대개는 벼랑 끝을 걷듯 위태롭다는 진실이다. 거기에 지금의 불안한 우리 삶이 매일 부딪치는 생생한 리얼리티가 있다.
이 작품이 개봉된 것은 1993년 무렵으로 해외여행이 그리 활발하지 않던 때다. 화면에 펼쳐진 프랑스 파리의 풍광이 매력적이었던 것일까? 하지만 영화는 그런 프랑스적 낭만과는 거리가 멀었다. 센강을 가로지르는 ‘퐁네프’라는 다리 아래에서 하루살이 삶을 살아가는 젊은 노숙자들의 이야기였으니, 파리의 낭만적 정취가 끼어들 여지는 별로 없었다. 거꾸로 ‘빛의 도시’ 뒤 그늘에서 벌어지는 어둠과 그늘이 한국 관객들을 잡아끌었는지도 모른다.
시력을 잃어가는 화가 미셸과 곡예사이면서 자신의 삶 자체가 외줄타기처럼 위태로운 알렉스. 영화는 이들을 통해 파리의 이면, 대도시 삶의 단면을 드러내면서 불우하지만 그렇기에 한편으로 자유로울 수 있었던 남녀의 격렬한 사랑을 그리고 있다.
‘퐁네프의 연인들’과 비슷한 시기에 개봉된 ‘피셔 킹’. 흔히 현대인의 고독과 소외에 대한 우화로 알려진 이 영화는 하루아침에 노숙자로 전락하는 남자들에 대한 이야기다. 청취자들의 전화에 늘 냉소적인 답변으로 응하는 방송국 라디오 DJ 잭. 어느 날 애인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는 젊은이에게 무심코 “여피들을 모조리 쓸어버리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 젊은이가 진짜로 총기난사 사건을 일으키자 방송국에서도 쫓겨난다. 하루하루 의미 없이 건달로 살아가는 그를 구원하는 것은 대학교수에서 미치광이 노숙자가 된 남자 페리다. 영화 결말부에서 두 사람이 뉴욕 도심의 공원에서 벌거벗고 누워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장면은 진정한 자유가 안락한 집을 나와 거리로 나앉을 때 비로소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누구든 하루아침에 안정된 생활 무너질 수도
집 없이 떠도는 삶, 거리에서 살아가는 삶이란 한편으론 자유와 해방의 입구인 듯 보인다. 숨을 죄는 듯한 제도권과 기성의 질서에서 비켜나 있기에 자유로운 노마드의 삶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래서 한국 영화 ‘고래사냥’에서도 소심하고 용기 없는 청년 병태가 실연의 상처를 못 견디고 고래를 잡겠다며 가출해 거리를 배회할 때, 그를 새로운 삶으로 이끌어준 이는 부랑자 민우였던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현실로 돌아와보자. 요즘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노숙자들을 과연 영화 속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사람들처럼 바라볼 수 있을까. 모든 노숙자가 한 줌의 햇볕만을 원했던 철학자 디오게네스처럼 자유를 꿈꾸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아침 출근길의 도심 지하철역에서 흔히 마주치는 노숙자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에 담겨 있어야 할 것은 우리 자신의 삶이 그들과 멀지 않은 곳에 놓여 있다는 자각이다.
영화 ‘로드 무비’에서 술에 취한 채 거리에 쓰러져 괴로워하는 남자, 유능한 펀드매니저였으나 주가 폭락으로 한순간 거리로 나앉게 된 석원처럼 아무리 안정적으로 보이는 삶이라도 대개는 벼랑 끝을 걷듯 위태롭다는 진실이다. 거기에 지금의 불안한 우리 삶이 매일 부딪치는 생생한 리얼리티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