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모가 사위를 백년지객 또는 백년손이라 부르며 버선발로 달려나와 씨암탉을 잡아주던 시절은 아스라한 노스탤지어가 되고 말았는가.
저간 신세대 혼인 풍속이 달라지면서 장모와 사위가 함께 사는 경우가 늘어나고, 외할머니가 외손자를 돌보는 것이 평범한 일상이 된 지 오래다. 이 때문에 고부간 갈등이 장모 사위 간 갈등으로 바뀌는 사회학적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사위는 장모 처지에선 ‘내 딸과 동거하는 남자’지만, 요즘처럼 장인 장모와 함께 살게 되면서부터 단순한 내 딸의 남자가 아니라 공동체 속 가족의 일원으로 간주되고 장모가 사위를 고르는 기현상도 일어나고 있다. 그러면 우리 역사 속에 나타난 장모와 사위의 관계는 어땠을까. 중국 사서인 ‘삼국지’ ‘위서’ 동이전은 고구려의 혼인 풍속인 서옥제(壻屋制·데릴사위제도)를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조선 중기까지 장모 집에서 일정 기간 생활
“그 풍속은 혼인할 때 구두로 미리 정하고, 여자의 집에서 몸채 뒤편에 작은 별채를 짓는데, 그 집을 서옥(壻屋)이라 부른다. 해가 저물 무렵에 신랑이 신부 집 문밖에 도착하여 자기의 이름을 밝히고 궤배(詭拜·무릎을 꿇고 절함)하면서 아무쪼록 신부와 더불어 잘 수 있도록 해달라고 청한다. 이렇게 두 번, 세 번 거듭하면 신부의 부모는 그때서야 서옥에 가서 자도록 허락하고 신랑이 가져온 돈과 폐백은 서옥 곁에 쌓아둔다. 아들을 낳아서 장성하면 남편은 아내를 데리고 자기 집으로 돌아간다.”
여기서 보듯 고구려 사회는 사위가 장모 집에서 일정 기간 노동력을 제공하며 생활했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에 이어 신라의 이야기를 찾아보자.
일통삼한(一統三韓)의 초석을 닦은 김유신과 김춘추는 지기이자 사돈이었다. 김춘추는 금관가야계인 김유신의 여동생 문희와 정략결혼을 함으로써 도남(圖南·큰일을 꾀함)을 펼칠 수 있었다. 그런데 김유신 가계와 김춘추 가계는 이미 친속으로 김유신의 어머니인 만명부인(萬明夫人)은 진흥왕의 조카딸이고, 김춘추의 어머니인 천명부인(天明夫人)은 진흥왕의 증손녀였다. 따라서 만명과 천명은 할머니와 손녀 관계가 된다.
김유신이 화랑 시절 기생 천관(天官)에게 빠져 방황할 때 아들을 훈계한 만명부인이 김춘추에게는 장모가 된다. 이렇듯 두 가계의 혼맥으로 볼 때, 장모와 사위가 결코 남남이 아니라 같은 친속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고려시대 들어와서는 사위가 ‘처가의 호적에 입적해 처가에서 생활하는’ 서류부가혼(솔서혼·率壻婚)의 혼인 형태가 나타났다. 현존하는 고려 호적에서 장인 장모와 딸과 사위가 함께 생활한 경우가 상당수 확인되고 있다. 스물다섯의 젊은 나이에 ‘동명왕편’을 지은 이규보가 장인을 위해 쓴 제문을 보면 당시 처가와 사위의 관계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옛날에는 친영(親迎·신랑이 신부 집에 가서 신부를 맞은 후 자기 집으로 데려옴)에 부인이 남편의 집으로 시집오므로 처가에 의뢰하는 일이 거의 없었는데, 지금은 장가듦에 남자가 처가로 가니 무릇 자기의 필요한 것을 다 처가에 의거하여 장인 장모의 은혜가 자기 부모와 같습니다. 불초한 제가 외람되게도 일찍 사위가 되어 밥 한술과 물 한 모금까지 모두 장인에게 의지했습니다. 조금도 보답을 못했는데 벌써 돌아가시다니요….”
성리학 득세하면서 ‘시집가기’ 친영제도 정착
혼인제도의 이러한 변천은 단지 풍속의 변화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와 관련한 상례, 제례 등에도 영향을 끼쳤다. 고려시대에는 남귀여가(男歸女家)의 서류부가혼과 재산의 자녀균분상속, 자녀윤회봉사(자녀가 돌아가며 제사를 모심)의 윤행(輪行)이 3박자를 이뤄 고려 사회가 남성 위주의 폐쇄적 공간이 아니라 여성의 제반 권리가 인정되는 유연하고 개방적인 공간이었음을 보여준다. 고려시대의 서류부가혼은 이처럼 결과적으로 딸과 사위의 소생인 외손을 아들이나 친손과 동일시해 부부, 부모, 자녀, 내외손을 대등한 위치에서 보는 쌍계적 친족체계를 만들었다.
그러나 조선왕조 창업 이후에도 서류부가혼이 관행화하자 새 왕조의 위정자들은 성리학을 체제교학으로 정립하면서 고려의 혼인 풍속을 양(陽)이 음(陰)을 따르는 모순된 제도로 인식해 혼인제도에 대한 논의를 본격화했다.
우선 왕실에서 친영의 모범을 보임으로써 백성이 따르도록 하기 위해 세종 17년(1435) 3월에 파원군(坡原君) 윤평(尹坪)과 숙신옹주(淑愼翁主)의 혼인을 친영의식으로 처음 거행했다고 왕조실록에 전한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성종실록’ 기사를 보면 “우리나라의 풍속은 (남자가) 처가에서 자라나니 처부모를 볼 때 오히려 자기 부모처럼 하고, 처의 부모도 사위를 자기 아들처럼 대한다”고 기술했다.
조선 중기까지도 혼인 후 사위가 장모 집에서 생활하며 처가와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다 17세기 이후 성리학적 종법제도가 확립되면서 혼인 후 곧바로 시집에서 생활하는 ‘시집가기’의 친영제도가 정착됐다.
조선 후기 한글소설로 최근 실제 모델이 거론될 만큼 연구가 된 ‘춘향전’에서도 적자와 서녀 간의 애틋한 로맨스와 장모와 사위 관계가 묘사됐는데 그들의 시니컬한 대화가 흥미롭다. 암행어사가 된 사위 이몽룡이 장모 월매를 찾아왔을 때, 장모는 옥사(獄死)를 기다리는 딸을 생각하며 “늙은 나를 누가 오너라 가너라 하느냐”면서 사위에 대한 원망을 퍼부었다. 딸 가진 미천한 장모가 귀한 양반 사위에게 날리는 ‘인간은 동등한 인격체’라는 질타로 통쾌한 페이소스가 아닐 수 없다.
장모와 사위에 대한 단상을 마무리하며 최근 출간된 김훈의 ‘바다의 기별’에 나오는 ‘1975년 2월15일의 박경리’를 빼놓을 수가 없다. 이것이야말로 장모와 사위의 진정한 유대와 일체감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됐다 출감하는 사위 김지하를 서울 영등포교도소에서 아직 첫돌도 안 된 외손자를 업은 채 기다리는 추운 겨울밤의 장모 박경리(朴景利·1926~2008)의 모습을 담은, 기사로는 쓰지 못한 후일담이다.
“새벽 두 시께 집으로 돌아와 잠자다 일어난 아내에게 그날의 박경리에 관해서 말해주었다. 아내는 울었다. 울면서 ‘아기가 추웠겠네요’라고 말했다.”
오늘처럼 매서운 엄동설한에 장모 집에 얹혀산다는 자괴심 때문에 거나하게 취한 못난 사위에게 매생이 해장국을 끓여주는 장모가 그립다.
저간 신세대 혼인 풍속이 달라지면서 장모와 사위가 함께 사는 경우가 늘어나고, 외할머니가 외손자를 돌보는 것이 평범한 일상이 된 지 오래다. 이 때문에 고부간 갈등이 장모 사위 간 갈등으로 바뀌는 사회학적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사위는 장모 처지에선 ‘내 딸과 동거하는 남자’지만, 요즘처럼 장인 장모와 함께 살게 되면서부터 단순한 내 딸의 남자가 아니라 공동체 속 가족의 일원으로 간주되고 장모가 사위를 고르는 기현상도 일어나고 있다. 그러면 우리 역사 속에 나타난 장모와 사위의 관계는 어땠을까. 중국 사서인 ‘삼국지’ ‘위서’ 동이전은 고구려의 혼인 풍속인 서옥제(壻屋制·데릴사위제도)를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조선 중기까지 장모 집에서 일정 기간 생활
“그 풍속은 혼인할 때 구두로 미리 정하고, 여자의 집에서 몸채 뒤편에 작은 별채를 짓는데, 그 집을 서옥(壻屋)이라 부른다. 해가 저물 무렵에 신랑이 신부 집 문밖에 도착하여 자기의 이름을 밝히고 궤배(詭拜·무릎을 꿇고 절함)하면서 아무쪼록 신부와 더불어 잘 수 있도록 해달라고 청한다. 이렇게 두 번, 세 번 거듭하면 신부의 부모는 그때서야 서옥에 가서 자도록 허락하고 신랑이 가져온 돈과 폐백은 서옥 곁에 쌓아둔다. 아들을 낳아서 장성하면 남편은 아내를 데리고 자기 집으로 돌아간다.”
여기서 보듯 고구려 사회는 사위가 장모 집에서 일정 기간 노동력을 제공하며 생활했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에 이어 신라의 이야기를 찾아보자.
일통삼한(一統三韓)의 초석을 닦은 김유신과 김춘추는 지기이자 사돈이었다. 김춘추는 금관가야계인 김유신의 여동생 문희와 정략결혼을 함으로써 도남(圖南·큰일을 꾀함)을 펼칠 수 있었다. 그런데 김유신 가계와 김춘추 가계는 이미 친속으로 김유신의 어머니인 만명부인(萬明夫人)은 진흥왕의 조카딸이고, 김춘추의 어머니인 천명부인(天明夫人)은 진흥왕의 증손녀였다. 따라서 만명과 천명은 할머니와 손녀 관계가 된다.
김유신이 화랑 시절 기생 천관(天官)에게 빠져 방황할 때 아들을 훈계한 만명부인이 김춘추에게는 장모가 된다. 이렇듯 두 가계의 혼맥으로 볼 때, 장모와 사위가 결코 남남이 아니라 같은 친속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고려시대 들어와서는 사위가 ‘처가의 호적에 입적해 처가에서 생활하는’ 서류부가혼(솔서혼·率壻婚)의 혼인 형태가 나타났다. 현존하는 고려 호적에서 장인 장모와 딸과 사위가 함께 생활한 경우가 상당수 확인되고 있다. 스물다섯의 젊은 나이에 ‘동명왕편’을 지은 이규보가 장인을 위해 쓴 제문을 보면 당시 처가와 사위의 관계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옛날에는 친영(親迎·신랑이 신부 집에 가서 신부를 맞은 후 자기 집으로 데려옴)에 부인이 남편의 집으로 시집오므로 처가에 의뢰하는 일이 거의 없었는데, 지금은 장가듦에 남자가 처가로 가니 무릇 자기의 필요한 것을 다 처가에 의거하여 장인 장모의 은혜가 자기 부모와 같습니다. 불초한 제가 외람되게도 일찍 사위가 되어 밥 한술과 물 한 모금까지 모두 장인에게 의지했습니다. 조금도 보답을 못했는데 벌써 돌아가시다니요….”
소설 `‘춘향전’`의 삽화.
혼인제도의 이러한 변천은 단지 풍속의 변화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와 관련한 상례, 제례 등에도 영향을 끼쳤다. 고려시대에는 남귀여가(男歸女家)의 서류부가혼과 재산의 자녀균분상속, 자녀윤회봉사(자녀가 돌아가며 제사를 모심)의 윤행(輪行)이 3박자를 이뤄 고려 사회가 남성 위주의 폐쇄적 공간이 아니라 여성의 제반 권리가 인정되는 유연하고 개방적인 공간이었음을 보여준다. 고려시대의 서류부가혼은 이처럼 결과적으로 딸과 사위의 소생인 외손을 아들이나 친손과 동일시해 부부, 부모, 자녀, 내외손을 대등한 위치에서 보는 쌍계적 친족체계를 만들었다.
그러나 조선왕조 창업 이후에도 서류부가혼이 관행화하자 새 왕조의 위정자들은 성리학을 체제교학으로 정립하면서 고려의 혼인 풍속을 양(陽)이 음(陰)을 따르는 모순된 제도로 인식해 혼인제도에 대한 논의를 본격화했다.
우선 왕실에서 친영의 모범을 보임으로써 백성이 따르도록 하기 위해 세종 17년(1435) 3월에 파원군(坡原君) 윤평(尹坪)과 숙신옹주(淑愼翁主)의 혼인을 친영의식으로 처음 거행했다고 왕조실록에 전한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성종실록’ 기사를 보면 “우리나라의 풍속은 (남자가) 처가에서 자라나니 처부모를 볼 때 오히려 자기 부모처럼 하고, 처의 부모도 사위를 자기 아들처럼 대한다”고 기술했다.
조선 중기까지도 혼인 후 사위가 장모 집에서 생활하며 처가와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다 17세기 이후 성리학적 종법제도가 확립되면서 혼인 후 곧바로 시집에서 생활하는 ‘시집가기’의 친영제도가 정착됐다.
조선 후기 한글소설로 최근 실제 모델이 거론될 만큼 연구가 된 ‘춘향전’에서도 적자와 서녀 간의 애틋한 로맨스와 장모와 사위 관계가 묘사됐는데 그들의 시니컬한 대화가 흥미롭다. 암행어사가 된 사위 이몽룡이 장모 월매를 찾아왔을 때, 장모는 옥사(獄死)를 기다리는 딸을 생각하며 “늙은 나를 누가 오너라 가너라 하느냐”면서 사위에 대한 원망을 퍼부었다. 딸 가진 미천한 장모가 귀한 양반 사위에게 날리는 ‘인간은 동등한 인격체’라는 질타로 통쾌한 페이소스가 아닐 수 없다.
장모와 사위에 대한 단상을 마무리하며 최근 출간된 김훈의 ‘바다의 기별’에 나오는 ‘1975년 2월15일의 박경리’를 빼놓을 수가 없다. 이것이야말로 장모와 사위의 진정한 유대와 일체감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됐다 출감하는 사위 김지하를 서울 영등포교도소에서 아직 첫돌도 안 된 외손자를 업은 채 기다리는 추운 겨울밤의 장모 박경리(朴景利·1926~2008)의 모습을 담은, 기사로는 쓰지 못한 후일담이다.
“새벽 두 시께 집으로 돌아와 잠자다 일어난 아내에게 그날의 박경리에 관해서 말해주었다. 아내는 울었다. 울면서 ‘아기가 추웠겠네요’라고 말했다.”
오늘처럼 매서운 엄동설한에 장모 집에 얹혀산다는 자괴심 때문에 거나하게 취한 못난 사위에게 매생이 해장국을 끓여주는 장모가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