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세당 영정.
이단은 경전의 해석에서 생긴다. 경전이란 무엇인가. 경전은 최초의 발언이란 영광을 쓴 텍스트일 뿐, 태어날 때부터 거룩한 텍스트는 아니다. 다만 뒷날 거룩하게 만들어졌을 뿐이다.
경전은 고대의 말씀이다. 아득한 옛날 말의 의미를 어떻게 제대로 알 수 있는가. ‘구약성서’를 읽으면 그 심오한 의미가 환히 떠오르는가. 그렇다 치자. 하지만 당신의 해석에 다른 사람이 동의한다는 보장은 없다. 경전을 설(說)한 사람은 이미 먼지가 됐다. 말씀은 입에서 귀로 떠돌다 어떤 이의 손에 의해 문자로 정착된다. 그런즉, 공자의 제자와 예수의 제자들은 스승의 육성을 그대로 옮기고 있을 것인가.
‘대학’ ‘중용’의 센텐스 다시 배열
그래, 육성이라 하자. 그래도 말씀의 의미는 애매하다. 말씀이 이루어지던, 말씀을 가능케 했던 상황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경전의 주석이 이래서 생겨난다. 주석은 말씀의 의미가 이런 것이라 주장하지만, 그것은 주석가의 주장일 뿐이다. 다만 주석가의 주장이 권력과 결합해 비판의 목소리를 뭉갤 수 있으면 진리가 된다. 진리를 만드는 것은 논리적 정합성이 아니라, 오로지 권력일 뿐인 것이다.
‘사서(四書)’는 유가(儒家)의 경전이다. 한데 ‘사서’는 주자(朱子)의 발명품이기도 하다. 공자, 맹자 시대에는 사서란 말이 없었다. ‘논어’ ‘맹자’는 독립된 저작이었고, ‘대학’과 ‘중용’은 ‘예기(禮記)’의 일부분이었다. 주자는 ‘대학’과 ‘중용’이 짧지만 유가의 형이상학이 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하고, ‘예기’에서 떼내어 ‘논어’ ‘맹자’와 함께 사서란 이름으로 묶었다.
한데 이 중요한 텍스트들을 읽어보니 문제가 심각하다. 특히 ‘대학’의 경우 ‘예기’에 실린 대로라면 문리가 불통하는 곳이 적지 않다. 주자는 ‘대학’에 오자와 탈자, 그리고 착간(錯簡)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텍스트를 변개(變改)한다. 공자의 말을 증자가 기록한 것이라면서 먼저 경(經) 1장 205자를 정하고, 나머지 부분은 증자의 의견을 증자의 문인이 기록한 것이라면서 전(傳) 10장 1546자로 나누었다. 뿐만 아니라 전(傳) 5장은 원래 있던 것이 없어졌다면서 몇 마디 써서 보충하기까지 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센텐스의 위치 변동이었다. 그는 원래 텍스트에서 센텐스가 뒤섞여 있다면서, 자기 생각대로 센텐스의 위치를 이리저리 옮겼다. 이것이 주자의 업적이자, 또 문제였다.
‘사서’는 애초 기획된 책이 아니었고, 정제된 텍스트도 아니었지만, 주자에 의해 일관된 질서를 갖는 텍스트로 다시 태어났다. 주자의 ‘사서집주(四書集注)’를 보면 주석을 다는 것은 경전의 의미를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상 경전을 새로 쓰는 행위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극단적으로 말해 주석은 경전의 원래 의미와는 상관없는 것이다. ‘사서집주’, 곧 ‘대학장구(大學章句)’ ‘중용장구’ ‘논어집주’ ‘맹자집주’는 주자가 쓴 새 경전인 것이다. 주자가 자신의 저작 중 사서집주에 가장 공력을 기울였던 것은 스스로 새 경전을 쓰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또 그의 희망대로 사서집주는 후세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박세당이 은거 당시 즐겨 찾던 의정부시 장암동의 취승대와 궤산정.
박세당의 학문적 작업 결과가 ‘사변록(思辨錄)’ 시리즈다. ‘사변록’은 ‘사서사변록(四書思辨錄)’ ‘상서사변록(尙書思辨錄)’과 미완성의 ‘시경사변록’으로 이루어진다. 시비의 대상이 된 것은 ‘사서사변록’이었다. 여기서 ‘사변록’의 내용 전체를 말할 수는 없다. 한 가지 예만 들자. 간단히 말해 그는 주자의 방법을 반복했다. 예컨대 ‘대학’의 경우, 텍스트의 센텐스를 자기 생각에 따라 다시 배열했다. 그런가 하면 주자가 손을 대지 않았던 ‘중용’의 센텐스도 역시 다시 배열했다. 텍스트의 의미는 당연히 주자와 달라지기 시작했다. ‘논어’와 ‘맹자’ 역시 주자와 다른 해석을 가했다. 경전을 새롭게 해석한다는 점에서 그는 주자를 가장 잘 배운 사람이다.
고령의 나이와 병 때문에 유배 피해
박세당이 쓴 서계유계(西溪遺戒)와 선조유필(先祖遺筆, 오른쪽). 서계유계는 박세당의 친필본이 아니라 후대에 자손들에 의해 전사된 책이다.
노론은 발끈했다. 하지만 비문만으로 박세당을 공격하자니 뭔가 부족하다. ‘사변록’을 꼬투리로 삼았다. 노론의 주동자는 김창흡(金昌翕)이었다. 장희빈을 두고 숙종이 벌인 애정놀음에 노론이 축출된 사건, 곧 기사환국(己巳換局)에서 김창흡의 아버지 김수항(金壽恒)과 백부 김수흥(金壽興), 그리고 스승 송시열은 유배 가서 죽거나 사약을 받아 저세상 사람이 된다. 이 일로 충격을 받은 김창흡과 그의 형 김창협(金昌協) 형제는 벼슬을 마다하고 초연한 삶을 산다고 했지만, 그것은 말뿐이었다. 김창협은 명리를 떠난 인물로 자처하면서도 조정 일에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있으면 즉각 중신들에게 편지를 보내 따지곤 했던 것이다.
김창흡은 박세당이 송시열을 모욕한 것을 알게 되자, 박세당의 문인 이덕수(李德壽)에게 편지를 보내 박세당이 주자를 능멸했다고 격렬히 비난했다. 그는 박세당의 사유가 양명좌파 안산농(顔山農)이나 역적으로 몰려 죽었던 허균과 같다고 비난했다. 안산농은 이른바 양지현성파(良知現成派)로 인간의 자연스런 본성을 그대로 따를 것을 주장하여 감정과 욕망을 적극적으로 인정한 사상가였다. 인간을 통제할 것을 요구하는 주자학과는 대척적인 지점에 있는 것이다. 김창흡은 박세당 사상의 논리적 연장이 결국은 양명좌파와 동일한 이단으로 귀착될 것이라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의정부시 장암동의 서계종택. 박세당이 처음 이곳에 정착한 뒤 그의 종손들이 대대로 거주해온 가옥이다. 건물 노후로 보수공사가 진행 중이다.
4월28일 숙종이 박세당을 옥과(玉果)로 귀양 보내라 명하자, 박세당의 문인 이인엽(李寅燁)이 상소를 올려 병든 사람을 옥과까지 보낼 수 없다고 애써 말린다. 숙종은 사문(斯文)에 죄를 얻은 사람을 그렇게 높이 평가하다니 이상한 일이라 핀잔을 주면서도 박세당의 나이와 병을 고려해 명을 거둔다. 집으로 돌아온 박세당은 8월21일 사망한다.
과연 박세당은 김창흡의 말처럼 주자에 반기를 든 이단이었던가. 그는 주자의 방법을 따라 경전에 대해 좀더 새로운 ‘주자학적’ 해석을 내린 것일 뿐이었다. 그것은 유가, 곧 공자 맹자의 진리성을 다른 방식으로 천명하는 것이었다. 말이 이상하지만, 박세당의 경학은 주자학의 발전일 수밖에 없다. 그러니 박세당이 꿈꾸는 세상이 송시열이 꿈꾼 세상과 달랐을 것 같지도 않다. 흔히 박세당이 ‘신주도덕경(新注道德經)’과 ‘남화경주해산보(南華經注解刪補)’를 지어 이단의 책인 ‘노자(老子)’와 ‘장자(莊子)’에 주석을 가한 일을 두고 그가 주자학을 벗어난 것처럼 말하지만, 그렇다 해서 그를 노장(老莊) 사상가라고 할 수는 없다. 이이(李珥)도 비록 유가적 입장이기는 하지만, ‘노자’에 주를 붙여 ‘순언(醇言)’을 짓지 않았던가. 박세당이 아무리 나아간다 해도 그는 역시 유학자다. 그가 다른 이데올로기를 선택하거나 구성했으리라고는 기대할 수 없다.
‘사변록’은 순수한 학문적 사색의 결과물
명(明)이 세종 때 사서오경대전(四書五經大全)을 보내준 이래, 대전(大全)은 과거 공부의 필독서가 됐다. 사서에 대한 다른 주석본은 자연스레 사라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주자의 주석을 절대시한 것은 아니었다. 장유(張維)는 인조 10년(1632)에 저술한 ‘계곡만필’에서 중국에는 양명학·불학 등 여러 학문이 있지만, 조선 사람들은 성리학밖에 모른다고 개탄한다. ‘계곡만필’은 1643년에 인쇄된다. 이로부터 100년 전인 1543년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주자의 문집인 ‘주자대전’이 인쇄된 해다. 이황(李滉)은 잉크 냄새 풀풀 풍기는 ‘주자대전’ 한 질을 지고 고향으로 돌아가 연구에 몰두한다. 이로부터 100년 뒤 장유는 조선 사람은 주자학밖에 모른다고 말하고 있다.
장유의 말은 주자학에 대한 이해와 연구가 심화돼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또 장유 당대에는 적어도 주자학에 대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아직 주자학에 대한 경직된 태도가 일반화되지는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장유 이후 주자학으로의 경사는 더욱 심해졌고, 이에 비례해 주자학에 대한 이해도 더욱 깊어졌다. 송시열과 김창협, 박세당 등은 모두 주자학에 통달한 인물이었다. 주자학에 대한 연구와 이해의 수준이 높아지자, 새로운 안목이 열리기 시작했다. 경전을 비판적인 입장에서 근원적으로 성찰할 능력이 생기기 시작했던 것이다. 주자의 경전 해석에서 오류와 부족한 부분이 눈에 띄기 시작한다. 박세당의 ‘사변록’은 바로 이런 비판적 사유의 결과다. 그리고 그것은 주자학의 세계를 더욱 풍부하게 할 것이었다. 식견이 있는 당대 사람들의 생각 역시 같았다. 박세당을 편든 사람은 모두 ‘사변록’은 순수한 학문적 사색의 결과물이라는 생각이었고, 그 속에서 이단성을 찾을 수 없었다.
나는 앞서 ‘사변록’에 더해진 비난을 ‘더러운 폭력’이라고 말했다. 당쟁은 정치권력을 얻기 위해 벌이는 분쟁이다. 그 분쟁은 정치로 그쳐야 한다. 출판되지도 않은 책, 그러니 인간의 대뇌에만 존재하는 책을 끄집어내어 사상을 검증하고, 이단으로 고발하는 것이야말로 더러운 폭력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학문적 이설(異說)이 각립(角立)한다면, 토론으로 옳고 그름을 가리는 것이 온당한 태도가 아닌가. 당쟁은 이단일 수 없는 박세당을 이단으로 만들었으니, 참으로 기괴한 일이다. 하기야 지금은 그렇지 않다고 누가 보장하랴. 학문적 집단이 이익집단이 되어 권력을 잡으면, 누가 무어라 해도 쇠귀에 경 읽기다. 우습다. 우리는 과연 중세를 벗어났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