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 대표는 곧장 중국 현지의 ‘탐정 네트워크’를 가동했다. 유일한 단서는 중국에서 걸려온 전화의 발신번호. 한 달 만에 칭다오(靑島)에 머물고 있는 1명의 소재가 파악됐다. 최 대표도 직접 현장으로 날아가 횡령 직원의 동향을 확인했다. 이 정보는 J사를 거쳐 수사기관으로 넘겨졌고, 정식 외교 절차를 거쳐 10월 이 직원은 국내로 소환됐다.
현행법상 ‘탐정’ 용어는 사용 못해
바바리코트와 파이프 담배, 그리고 예리한 눈매. 셜록 홈스 같은 사설탐정은 소설 속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에도 범죄 현장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사설탐정들이 있다. 현재 에스앤에프 같은 사설탐정업체는 20~30곳으로 추정된다. 이들 업체는 흥신소, 심부름센터와는 명확한 선을 긋고자 한다. 불법적인 방법으로 남의 뒤를 캐거나 사생활을 침해하거나 유괴 및 살인 등 범죄행위를 대신 해주는 일은 일절 수임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 탐정들은 동시에 ‘탐정’이 아니다. 현행법(신용정보의 이용 및 보호에 관한 법률 제26조)에서 ‘탐정’ ‘정보원’ 등의 명칭 사용을 금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한국 탐정들의 활동 반경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이들은 ‘탐정(detective)’보다는 ‘민간조사(private investigate)’라는 용어를 선호하면서 조사 권한이 있는 변호사의 위임을 받아 활동하고 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들이 탐정이 될까? 경찰이나 검찰, 변호사 사무실의 사무장 출신, 기업이나 정부기관의 리스크 담당자들, 법학과·경찰행정학과·경호학과 졸업자, 그리고 ‘셜록 홈스의 꿈’을 가진 일반인이 탐정이 된다. 에스오에스서치 대표이사이자 한국민간조사협회 협회장을 맡고 있는 유우종 씨는 “탐정은 너무 잘생겨도 예뻐도, 키가 너무 커도 작아도 안 된다”고 말했다. 현실세계에서는 바바리코트를 멋지게 차려입은 탐정은 없다. 주택가, 공장, 백화점 등 처한 상황에 따라 탐정은 카멜레온처럼 변신해야 하기 때문이다. ‘디텍티브’의 서진호 대표는 “잠복할 때는 멋진 검정색 세단 대신 마티즈나 중고 소나타처럼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차를 탄다”고 말했다.
산업스파이, 지적재산권, 기업의 회계부정, 교통사고 범죄, 해외 도피사범, 이산가족이나 미아 찾기, 재판 증거자료 수집…. 탐정들의 활동 영역은 다양하다. 자체 조사인력을 갖춘 보험회사도 사정이 여의치 않을 때는 탐정사무실을 찾는다.
지적재산권 조사·미아 찾기도 주된 업무
국가 수사기관에 속한 공무원이 아닌 개인이 남을 미행하거나 사생활을 조사하는 행위는 현재 불법이다. 그래서 한국 탐정들은 불륜 남녀의 뒤를 쫓는 일을 꺼린다. 대신 이들이 주력하는 분야는 지적재산권 침해 사건. 사람이 아닌 사물의 뒤를 쫓는 일은 불법이 아니기 때문이다.
디텍티브는 자동차회사 벤츠와 계약을 맺고 2년째 벤츠 로고의 지적재산권 침해 조사를 벌이고 있다. 벤츠 로고를 무단으로 사용하고 있는 노래방, 단란주점, 중고차 매장, 자동차 수리점, 양복점 등을 파악해서 벤츠에 보고하는 것. 서 대표는 “그동안 서울에서만 300여 곳을 찾아냈다”고 밝혔다. 또
경찰에 압수된 ‘짝퉁’ 명품 가방들. 탐정들은 명품업체로부터 의뢰를 받아 짝퉁 제조 공장을 찾아내는 일도 수행한다.
최근 들어 가장 전망이 밝은 시장으로 각광받는 업무는 해외 도피사범의 소재 파악이다. 매년 해외 도피사범의 수는 증가하지만, 국제 공조수사의 수준은 그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주간동아’ 552호 참조). 또한 해외에서의 활동은 국내법의 저촉을 받지 않기 때문에 그만큼 자유롭다. 해외 도피사범 소재 파악의 수임료는 1억원 내외.
에스앤에프가 지금까지 소재를 파악해 국내 송환에 결정적인 구실을 한 사건은 모두 10여 건. 지난해 위조 CD를 발행하는 수법으로 수백억원을 횡령, 중국으로 달아난 조흥은행 직원 김모(40) 차장의 중국 내 소재를 찾아낸 것도 에스앤에프다. 최 대표는 중국으로 날아가 김 차장을 만나 자수를 권유한 뒤 함께 비행기를 타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해외 도피사범의 소재 파악 업무에서 가장 절실한 것은 현지 탐정들과의 끈끈한 네트워크다. 무작정 현지로 날아가 조사하는 것은 비용과 시간이 많이 들기 때문에 한국 탐정들은 외국의 사설탐정들에게 업무를 위탁해 공동으로 소재 파악에 나선다. 에스앤에프 오 총괄본부장은 “현지에 있는 탐정들이 해외 도피사범의 모습을 비디오로 촬영한 자료를 보내오면 의뢰인과 동행해 현지로 날아간다”고 했다.
한국 탐정들 중에서는 유일하게 세계탐정협회(WAD) 회원인 디텍티브의 서 대표는 WAD 소속 100여 명의 탐정과 제휴하고 있다(경호원 출신인 서 대표는 ‘르윈스키 스캔들’을 들춰낸 스타 검사에 대항하기 위해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이 고용했던 국제사설탐정 잭 팔라디노의 추천으로 WAD에 가입했다).
7월 디텍티브는 WAD 회원인 독일 탐정을 통해 국내 무역회사를 상대로 사기 행각을 벌인 한국인의 소재를 파악했다. 그는 이탈리아의 명품 브랜드 가방을 보내준다며 7억원을 받아낸 뒤 가짜 제품을 보내고 독일로 잠적한 인물. 독일 탐정은 소재 파악에 그치지 않고 그가 소유한 호텔까지 찾아냈다. 서 대표는 “피해 무역회사는 독일 현지에서 변호사를 선임, 재산 가압류 등 재판을 진행 중이다”라고 밝혔다.
겉으론 화려해 보여도 실제론 고된 일
경찰도 하지 못하는 일을 척척 해결해내는 탐정의 세계. 하지만 생각보다는 훨씬 고되고 ‘폼도 나지 않는’ 일이라고 한국 탐정들은 입을 모은다. 에스오에스서치의 대전지국장 김진규 씨는 일반 회사원 출신으로 2001년부터 탐정으로 활약 중이다. 그가 가장 보람된 일로 여기는 사건은 34년 전 잃어버린 부모를 찾아달라는 중년 여성의 간곡한 부탁이다. “6세 때 큰 물난리가 나는 바람에 길을 잃어 미국으로 입양된 분이었습니다. 고향에 대한 기억이라고는 ‘탄광촌에 살았고, 오빠가 있었다’는 것뿐이었습니다. 8개월 동안 강원도와 충청도 일대의 탄광촌을 모두 다 뒤졌습니다.” 김 씨는 탄광촌마다 돌아다니면서 노인들에게 34년 전 장마로 딸을 잃어버린 가족을 아는지 물었다. 초등학교에 들러 34년 전 학생기록부를 뒤지며 여동생을 잃어버린 소년의 기록이 없는지도 찾았다. “안쓰러워서 시작했는데, 오기가 돼 후배 직원들이 말려도 강행했습니다. 결국 찾아내서 헤어진 가족들을 만나게 해줬죠. 그 보람은 말로 다 설명할 수 없습니다.”(웃음)
한편 외국 탐정들도 국내에서 활동 중이다. 20~30개로 추정되는 외국계 탐정회사들은 현재 탐정업이 불법임을 감안해 ‘기업 컨설팅업체’ 형태로 들어와 있다. 한국 언론과의 접촉을 꺼리는 이들 업체는 구체적인 활동사항을 공개하고 있진 않지만, 주로 외국기업의 의뢰를 받아 투자나 거래 대상인 한국 기업에 대한 조사, 지적재산권 침해 조사 등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국정원 관계자는 “한국인을 조사원으로 고용해 인맥을 통하거나 공개입찰 등에 참여해 기업 정보를 수집하는 것으로 안다”고 귀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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