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12일 기록적인 폭우로 침수된 지하철 일산선 정발산역 승강장(왼쪽)과 고양시 풍동 일대 도로.
일부 언론에서 비판이 제기되자 기상청은 7월12일 ‘해명자료’를 내놓았다. “이번 호우에 대한 기상청의 최초 대응 선행시간은 4시간 전(호우예비특보 시부터 고양 100mm 기록 시까지), 3시간 전(호우주의보 발표 시부터 고양 100mm 기록 시까지)으로, 미국의 선행시간(50분 내외)보다 빨랐다”는 게 골자였다. 기상청은 또 “국지적이고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중간 규모 기상현상은 조기 탐지와 사전 예측이 어렵다”고 덧붙였다. 피해는 이미 입을 대로 입었는데, 이런 식의 ‘사후 변명’이 무슨 소용일까.
자연재해는 해마다 반복된다. 기상청 자료에 따르면 올해의 경우 7월7일부터 29일까지 23일간 홍천 1208mm, 제천 1024mm, 서울 990mm 등 호우가 집중돼 인명피해 63명, 이재민 9340명, 재산피해 1조9228억원(잠정)을 기록했다. 올해는 예년보다 장마가 2주일 정도 길었고(46일), 강우량도 평년의 2배 정도인 717.3mm (전국 평균)로 1973년 이후의 장마 통계로는 최대치를 기록했다. 여기에 태풍 에위니아(7월9~10일)까지 겹쳐 상황이 더욱 악화됐다.
올 장마철 인명피해 63명, 이재민 9340명
소방방재청, 기상청 등 재난관리 관련 정부기관과 전문가들은 지난 10여 년 사이에 우리나라의 재난관리 시스템이 많이 개선됐다고 입을 모은다. 일례로 올해 7월과 비슷한 강우량을 기록했던 1998년의 집중호우(7월31일~8월18일 19일간) 때는 인명피해 324명, 이재민 2만4531명을 기록했다. 비슷한 정도의 재해를 맞았지만, 올해의 경우 휴대전화 문자방송(CBS)을 통한 신속한 상황전파 등의 노력으로 인명피해가 현격히 줄어들었다는 것.
그럼에도 ‘개선의 여지는 여전히 많다’라는 것이 대다수 전문가들의 일치된 견해다. 자연재해에 ‘100% 완벽한 대책’이란 있을 수 없지만,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들은 도처에 널려 있다는 말이다. 전문가들이 지적하는 재난관리 시스템의 문제 및 개선책을 점검했다.
소방방재청 재난전략상황실 근무자들이 7월10일 한반도에 상륙한 제3호 태풍 에위니아에 대한 상황접수와 대응조치 등을 시달하며 상황근무를 하고 있다.
정부는 8월17일 태풍과 집중호우에 따른 피해 복구에 1조7600억원, 9월 이후의 재해에 대비한 예비비 3000억원 등 2조1549억원의 추가경정예산안(이하 추경예산)을 의결했다. 재난 복구를 위한 추경예산 편성은 1998년 이후 9년 연속 되풀이돼온 연례행사다. 올해의 경우에는 추경예산 중 1조3000억원을 국채를 발행해 조달하기로 했다니 결국 국민에게 떠넘겨진 빚인 셈이다.
복지예산, 국방예산 등 가뜩이나 돈 쓸 데가 많은 터에 자연재해에 잘 대처하기만 한다면 피해 복구 예산을 줄일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최근 국회예산정책처가 공개한 ‘2006년도 추경예산안 분석’ 보고서를 보면, 그동안 정부의 재정지출은 전혀 그런 방향으로 쓰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자료에 따르면, 최근 5년간 정부가 재해 예방에 투자한 돈은 11조3000억원. 같은 기간 재해 복구비로 쓰인 21조1800억원의 절반 수준에 그쳤다. 일본이 최근 5년간 피해 복구에 19조원, 예방 투자에 무려 137조원을 지출한 것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집중호우, 태풍 등 자연재해는 해마다 반복되는 경향이 있다는 점에서 예방 투자를 잘하면 피해를 크게 줄일 수 있다. 그럼에도 재해가 발생하면 돈을 들여 시설을 원상 복구하고, 그러다가 또 재해가 발생하면 다시 원상 복구하는 행태가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국회예산정책처는 지난해 말 공개한 ‘재난관리 재정분석’ 보고서에서도 우리가 재난예방 투자에 지극히 인색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소(小)하천 정비사업’의 올해 예산(962억원) 수준을 앞으로도 계속 유지할 경우, 정비 완료에 108년이 걸린다고 추정한 것이 비근한 예다. 이와 관련, 국내 재난관리 분야의 선구자인 연세대 조원철 교수는 “방재(防災) 효과에 대한 경제성 분석을 하지 않는 것이 가장 근본적인 문제”라고 말했다.
“미국의 경우 1억 달러를 투자하면 향후 10년간 7.3~16.3배의 방재 효과가 나타난다는 자료가 있다. 세계은행 등 국제기구들도 방재 투자로 인해 유발되는 경제효과를 따져가며 예산을 배정한다. 그런데 우리는 방재 투자로 인한 피해 경감치는 예산을 짤 때부터 고려 대상이 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매년 5000억원 피해가 나던 분야에 500억원을 투자해 피해를 4000억으로 줄인다면 500억원의 순이익이 생기는 게 아닌가. 하지만 이러한 효과가 가시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무시해버리는 것이다. 이런 낙후된 인식이 바로 해마다 반복되는 피해의 가장 큰 요인이다.”
- 주먹구구 기상예보, 기상청만 탓할 일인가
지난해 말 국회를 통과해 올해 7월부터 시행에 들어간 법으로 ‘기상관측표준화법’이 있다. 기상관측 표준화를 법으로 정한다? 그렇다면 지금까지는 기상관측의 방법이나 단위가 제각각이었다는 뜻인가?
현재 국내에서 독자적으로 기상관측을 하는 기관으로는 기상청 외에도 산림청, 수자원공사, 도로공사 등 60여 개다. 이들 기관은 제각각 고유한 업무상의 이유로 기상관측을 해왔는데, 상이한 관측방법 등의 문제로 지금까지 기상관측 자료의 교환 및 공유가 거의 이뤄지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기상관측표준화법은 국내 모든 관측기관이 운용 중인 기상관측 장비, 기상관측 환경 및 방법, 절차 등을 표준화함으로써 기상관측 자료의 품질을 높이고 국가적인 기상관측 네트워크를 구축해 자료를 공동 활용하자는 취지에서 나왔다.
상식적으로는 당연히 있었어야 할 이런 법이 왜 이제야 만들어진 것일까? 이에 대해 지난해 말 국가안전보장회의(NSC)가 ‘위기대응 실무 매뉴얼’을 공개했을 당시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좀더 정확한 기상정보에 대한 필요성은 누구나 인정하면서도 총대를 메고 나설 주체가 없었다”고 설명했다. 기상관측에 관한 주무 관청은 물론 기상청이지만, 여타 기관들이 ‘힘없는’ 기상청의 목소리를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 이렇듯 미비한 협조 기반 아래에서 폭우나 태풍 피해가 발생하면 가장 먼저 ‘깨지는’ 곳이 기상청이었다.
기상예보는 국가방재 시스템의 첫 단계에 속하는 핵심이다. 정확한 기상예보가 재해 예방의 관건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 레이더 등 기상관측 장비의 노후화도 심각한 상황인 것으로 드러났다. 지난해 9월 기상청이 한나라당 김희정 의원(당시 과학기술정보통신위원회)에게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기상레이더 9대 중 5대가 내구연한(10년)을 초과했으며, 관악산 레이더의 경우 성능 미달로 14개월 째 정상 가동되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이로 인해 기상청은 2000년 이후 폭풍 458회, 호우 321회, 강풍 96회, 대설 90회 등 총 1038회에 걸쳐 기상특보 오보를 냈다는 것.
또 같은 지역에서 측정한 강수량이 최대 174.1mm 편차를 보이는 등 강수량 관측이 주먹구구식으로 이뤄지고 있는 사실도 드러났다.
“지난 10년간의 국내 기상통계를 보면, 한 해도 거르지 않고 기상이변이 있었다. 기상관측에서 ‘이상(異常)’이란 과거 30년간의 추세에서 벗어난 현상을 의미한다. 30년을 기준으로 삼는 이유는, 태양 흑점폭발 주기가 12년이고 이것의 2.5사이클이 30년인데, 이 정도 축적된 자료라야 트렌드를 분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난 10년간 해마다 기상이변이 이어졌다면, 이건 종전과는 다른 새로운 트렌드가 나타나고 있다는 의미다. 세계적으로도 기상이변이 갈수록 잦아지고 있지 않은가.
이런 상황에서 기상측정 장비 교체와 전문인력 양성은 더 미룰 일이 아니다. 특히 7월 고양 지역의 호우 같은 기습성 기상이변을 피하려면 국지적 예보가 중요한데, 현재의 장비와 인력으로는 그런 일의 재발을 막을 수가 없다. 기상청을 비판하더라도, 제 할 일을 할 수 있도록 해준 다음에 비판해야 하지 않을까.” 전직 기상청 관계자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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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가 재난관리 시스템, 제대로 작동되나
정부 최초의 종합적이고 전문적인 재난관리 전담기구로 2004년 6월 소방방재청이 출범했다. 소방방재청의 발족으로 우리나라의 재난관리 시스템은 적어도 외양 면에서는 진일보했다는 게 대체적인 평가다.
그러면 소방방재청은 애초의 의도대로 재난관리를 위한 총괄기관으로서의 역할을 다하고 있는가. 아쉽게도 ‘그렇지 못하다’는 게 안팎의 평가다. 재난관리는 성격상 정부 대부분의 부처 및 지방자치단체 업무와 관련된다. 그런데 차관급이 장(長)인 소방방재청으로서는 정부 내 모든 부처를 조정하는 데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게 그 첫 번째 이유다. 소방방재청의 방기성 방재관리본부장은 “소방방재청 발족 당시부터 총괄조정기능에 대한 논란이 없지 않았다. 그 대안으로 나온 게 비상시 비상설조직으로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를 가동하고 그 장을 행정자치부 장관, 본부장을 소방방재청장이 맡는 체제”라고 설명했다. 그는 “평상시 타 부처와의 업무 협의에도 애로가 많다”고 토로했다.
“예를 들어 재난 예방과 관련해 도로설계기준의 가이드라인을 놓고 건설교통부와 협의하려고 하면 그쪽에선 ‘웬 참견이냐’는 식의 반응을 보인다. 내풍(耐風) 설계기준, 지하공간 침수방어기준 등등 그런 예는 수없이 많다. 지자체도 공공시설을 건설할 때 경제성이나 기능적인 측면을 먼저 따질 뿐 안전성을 우선에 놓고 일을 추진하지는 않는다. 매사가 이런 식이다.”
방재 업무에 대한 정부 내부의 인식부터 뜯어고쳐야 한다는 말이 그래서 나온다. 방재 업무는 대부분의 공무원들이 기피하는 일이라고 한다. 그러다 보니 방재 업무에 대한 경험 축적이 이뤄지지 않고, 재난이 발생했을 때 부처 간 긴밀한 협조체계도 이뤄지기 어렵다는 것. 한 민간 방재 전문가의 말이다.
“7월 수해 직후 대통령이 정부 각 부처에 ‘재난 시에 해야 할 일을 작성해 보고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 지시 때문에 정부 부처들마다 난리가 났다. 내게도 하루에 수십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이는 곧 위기 상황이 닥쳤을 때 정부 부처들이 무슨 일을 할지 모르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지자체 장들도 마찬가지다. 5월 선거에서 당선된 한 지자체 장을 만난 적이 있는데, ‘당신 관내에 취약 지역이 어디냐’고 물었더니 ‘내가 그런 것도 알고 있어야 하느냐’고 반문해 황당했던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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