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개그콘서트 ‘패션 7080’` , MBC 개그야 ‘사모님’ , SBS 웃찾사 ‘형님뉴스’ (맨 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지금, 사람들은 개그를 보면서 산다. 어렵고 우울한 시대, 개그는 사람들의 커뮤니케이션 코드가 되었다. 술자리에서 정치 얘기를 한다면 그 사람은 십중팔구 ‘폭탄’ 대접을 받는다.
지상파 개그 프로그램의 오랜 맹주였던 KBS ‘개그콘서트’(이하 개콘)에서는 ‘골목대장 마빡이’ ‘사랑의 카운슬러’ 등이 인기를 끌고 있고, SBS ‘웃음을 찾는 사람들’(이하 웃찾사)은 ‘형님뉴스’ ‘나몰라 패밀리’ 등의 코너가 강세를 보이고 있다. 이 두 프로그램 사이에서 상대적으로 고전을 면치 못했던 MBC의 ‘개그야’도 최근 김미려의 ‘사모님’을 비롯해 ‘명품남녀’ ‘아홉살 인생’ 등 몇몇 코너가 급부상함으로써 경쟁에 합류했다.
“요즘 관객들은 날로 먹는 개그맨을 싫어한단 말이야”라는 ‘개그야’의 ‘개그 신인왕전’ 대사처럼, 최근 개그는 유행어만 남발하는 자기복제류의 진부함을 벗어나 형태가 더욱 다양해졌을 뿐 아니라 경쟁도 한층 치열해지고 있다.
개그는 커뮤니케이션 코드
이처럼 방송 3사가 개그 경쟁구도를 갖추게 된 데는 ‘개콘’의 역할이 가장 컸다고 할 수 있다. 방송 7년째를 맞은 ‘개콘’의 최대 성과는 견고한 시스템을 만들었다는 점이다. ‘개콘’에서 웃음을 만들어내는 주체는 캐릭터가 아니라 시스템이다.
‘개콘’ 이전에는 코미디 프로그램의 시청률을 높이려면 인기 있는 희극인을 스카우트만 하면 됐다. 심형래, 김형곤, 김미화 시절만 해도 그랬다. 그러나 ‘개콘’에서 희극인들은 부속품이거나 대체 가능한 아바타이며, 웃음의 생산 주체는 프로그램이라는 시스템이다. 시스템이 단단하기 때문에 인기 개그맨 1~2명이 빠져도 별 문제가 없다.
‘개콘’의 탄탄한 시스템은 완벽한 개방형 경쟁체제에서 나온다. ‘개콘’에 나가려면 치열한 내부 경쟁을 거쳐야만 한다. 하지만 그 문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지금은 완전히 자리잡은 공개 코미디 형식을 도입한 ‘개콘’에서는 제아무리 인기 절정의 개그맨이라 해도 긴장의 끈을 늦출 수가 없다. 동료와 방청객을 웃기지 못하면 인기 있는 개그맨도 금세 도태된다. 그러니 소수의 로열그룹이 독점하던 시절에 으레 존재하던 독재자형 선참 개그맨은 더 이상 없다. 신인들도 아이디어와 능력만 있으면 얼마든지 출연 기회를 보장받는다.
방송사 개그맨 콘테스트에 합격한 뒤에도 대학로 무대에서 훈련받아야 하는 지금의 개그맨들처럼 ‘고달픈’ 대중문화인도 없다.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며 대학로 무대에 오르는 무명의 개그맨들은 호시탐탐 방송 진출을 노린다.
방송 개그는 3초, 혹은 늦어도 5초에 한 번씩 시청자들의 웃음을 터뜨려야 한다. 녹화 날, 카메라 사인이 없을 때 개그맨들의 표정이 얼마나 어둡고 비장한지 시청자들은 상상하지 못할 것이다.
이질적인 다수의 코너를 효과적으로 조합한 것도 ‘개콘’ 시스템이 탄탄해진 비결이다. 이를 바탕으로 ‘개콘’은 젊은 층만을 위주로 했던 벽을 깨고 온 가족이 텔레비전 앞에 모여 앉을 수 있게 했다. 60분 중에 ‘사랑의 카운슬러’ 등 13개 안팎의 짧은 스탠딩 코너가 포진해 있는데, 코너당 시간은 3~5분, 10분을 넘기는 코너는 ‘봉숭아학당’뿐이다. ‘집으로’와 ‘봉숭아학당’을 제외한 코너들은 수시로 퇴출과 신설을 거듭한다.
‘제3세계’와 ‘고고 예술 속으로’ ‘현대생활백수’ 등 인기가 높은 코너를 과감하게 폐지하기도 했다. 산소호흡기를 달고 연명하는 상태가 오기 전에 막을 내린다는 게 제작진의 방침이다. ‘개콘’의 김석현 PD는 “대체적으로 유행어 중심으로 움직이는 개그는 인기가 있다 해도 오래 보면 질릴 수 있어서 빨리 내리는 반면, 스토리와 연기에 의존한 개그는 오래가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요즘 ‘개콘’에서는 새 코너 ‘골목대장 마빡이’의 인기가 폭발적이다. ‘골목대장 마빡이’는 “이 개그는 이게 다여~”라는 박준형의 대사처럼 지극히 단순한 포맷이다. 정종철, 김시덕, 김대범, 박준형 등이 한 명씩 등장해 이마를 두드리는 동작을 반복하다 지쳐가는 하드코어형 개그다. ‘일회성 개그가 아닐까’ 하는 우려 속에서도 시청자들은 매회 어떤 애드리브가 나올지 궁금해한다. 이런 자학성 슬랩스틱코미디가 시선을 끄는 이유는 그동안 수없이 나왔던 말장난, 농담 따먹기식 수다형 토크 개그의 식상함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웃기는 코너도 유효기간 6개월
SBS ‘웃찾사’는 ‘개콘’에 비해 시청층의 연령대가 낮다. 신세대를 겨냥한 독특한 개그, 특히 내러티브가 부재한 비(非)내러티브코미디를 자주 선보인다. 스피드가 빠르고 유행어에 대한 의존도도 높은 편이다.
처음 나온 2003년만 해도 ‘웃찾사’는 별로 관심을 끌지 못했지만, 2004년 말엔 ‘개콘’의 아성을 무너뜨릴 만큼 성장했다. 하지만 ‘웃찾사’는 지난해 5월 개그맨들의 노예계약 기자회견 파문으로 하루아침에 곤두박질쳤다. 지금은 그때 상황을 극복하고 다시 도약 중이다. 현재 20%에 육박하는 시청률을 보이고 있다.
요즘 인기를 끄는 코너는 ‘형님뉴스’ ‘나몰라 패밀리’ ‘맨발의 코봉이’ ‘이건 아니잖아’ ‘몽키브라더스’ ‘놀아줘’ 등으로 다양하다. ‘형님뉴스’는 조직폭력배의 세계를 뉴스 형식으로 풍자한다. 최근에는 ‘바다이야기’ 사태를 꼬집는 내용을 방송해 공감을 얻었다. 매번 “뉴스가 뉴스다워야 뉴스지”라는 코멘트로 마무리하는 ‘형님뉴스’의 앵커맨 강성범은 실제 조직폭력배들을 통해 개그 소재를 상당수 얻고 있다고 밝혔다.
‘웃찾사’ 박상혁 PD는 “한 코너의 유효기간이 점점 짧아지고 있다. 예전에는 1년 이상 가는 코너도 있었지만, 이제는 6개월을 넘기기가 힘들고, 시청자들은 자꾸만 새로운 것을 원한다”며 고충을 털어놓았다.
MBC ‘개그야’는 ‘웃으면 복이와요’와 ‘웃는 데이’의 잇따른 흥행 실패 후 끊임없이 코너를 개편하고 편성에 변화를 준 끝에 시청자의 눈길 끌기에 성공했다. 30대 이상 남녀를 주 시청자로 삼아 ‘웃찾사’에 비해 호흡이 긴 편이다. 관객석 곳곳이 비어 있던 ‘개그야’는 이제 방청권을 구하기가 힘들 정도로 인기가 급상승했다.
‘개그야’의 시청률을 견인하는 간판 코너는 김미려와 김철민의 호흡이 돋보이는 ‘사모님’이다. ‘사모님’이 비음으로 말끝을 살짝 올려 발음하는 “김 기사, 운전해. 어서~” “일 고따구(그따위)로 할 거야?”라는 말은 금세 유행어가 돼버렸다. 사모님이 회장의 본처인지, 철없는 젊은 애인인지 모호하게 설정된 이 코너는 반반한 외모에 철없는 ‘사모님’의 생뚱맞은 반전 멘트로 배꼽을 잡게 만든다.
개그가 성공하려면 리얼리티·아이디어·캐릭터라는 3가지 요소가 합쳐져야 하며, 적어도 이 중 2가지는 갖춰야 한다. 하지만 한국 개그는 캐릭터 위주로 승부를 거는 경향이 있다. KBS 예능팀 김진홍 PD는 “개그가 캐릭터에 치중할 경우 ‘피하주사이론’처럼 처음엔 확 뜨지만 6개월을 넘기기가 어렵고, 결국 더 이상 보여줄 게 없어진다”면서 “개그에는 리얼리티가 있어야 생명이 길어진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