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갈비
그러나 나는 일산 음식점들의 솜씨를 그다지 믿지 않는다. 일산에 수년간 살면서 맛있다고 소문난, 항상 문전성시를 이루는 식당들을 두루 둘러보고 내린 결론이다. 솔직히 잘나가는 식당일수록 음식은 ‘엉망’이다. 등심에다 참기름과 조미료 뿌려 구워내는 식당이 일산 최고의 고깃집으로 여기저기 분점을 내고 있으며, 숙성되지 않아 생밀가루 냄새 풀풀 나는 칼국수를 30분 넘게 줄을 서 먹는 데가 일산이다.
일산 주민들의 미각 수준이 떨어져서 그런가? 꼭 그렇지는 않다. 식당이란 게 참 묘해서 한번 맛있다고 소문나면 그 식당 음식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도 않고 그냥 맛있는 줄 알고 먹는 것이다. 다른 지역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으나 일산이 유독 심해 보이는 이유는 신도시이기 때문에 식당들이 아직 소비자들로부터 정확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솜씨보다는 인테리어 등 다른 요인으로 인한 뜬소문 등이 작용해 그렇지 않은가 싶다.
그래서 일산에 사는 나는 괴롭다. 식구들과 외식하러 나가봤자 나는 입이 퉁퉁 불어 돌아온다. 특별히 음식 가리지 않고 먹는 내 식구들도 괴롭기는 마찬가지다. 음식 투정하는 가장 앞에서 음식이 입에 제대로 들어가겠는가. 초딩 막내는 음식점에 들어갈 때마다 늘 내게 당부한다. “아빠, 그냥 먹어요, 네?! 입맛 없어지잖아요.”
며칠 전 오랜만에 일찍 퇴근하고 집에 들어가면서 전화를 했다. 6시 조금 넘은 시각이었는데 식구들이 동네 식당에 앉아 있다. 나 빼고 외식 나간 것이다. 보나마나 이런 생각들이었을 것이다. ‘아빠하고 가봤자 맛있게 먹지도 못한다. 차라리 우리끼리 먹자.’ 사실 나도 그 자리에 끼고 싶지 않았다. 나는 ‘집밥’이 최고다. 그런데 둘째가 간곡하게 불렀다. “아빠 일루 오세요.” 둘째는 딸이다. 집밥보다 나는 딸이 더 좋다.
일산 홀트복지회관 입구에 ‘백두산 숯불갈비’(031-915-8855)라는 식당이 있다. 전에 ‘동경갈비’인가 하는 간판을 달고 영업했을 때 쇠갈비를 두어 차례 먹어본 적이 있는 식당인데 육질은 괜찮았으나 그 외 별다른 매력을 발견하지 못했었다. 주인은 그대로이고, 음식점 이름을 ‘백두산’으로 바꾸고 돼지갈비를 메뉴에 추가했다(이름은 정말 잘 바꾸었다. 갈빗집이 ‘동경’이라니!).
식구들은 나 없이 포식을 한 눈치고, 불판 위에 고기 두어 점이 남겨져 있었다. 고기가 두툼하고 거무스레한 것으로 보아 쇠갈비인 줄 알았다. 그런데 냄새는 돼지갈비다. 자리에 앉자마자 한 점 씹었다. 돼지갈비가 맞다. 그런데 두께가 4cm는 돼 보이는 두툼한 돼지고기가 입 안에서 스스로 녹아내리듯 씹혔다. 돼지갈비라면 의당 입 안 전체를 때리는 양념의 들척지근한 맛도 없었다. 고소한 고기 맛에 이은 가볍고 개운한 양념 맛. 예사 솜씨가 아니다.
불판에 있는 ‘찌꺼기’ 고기나 먹지 하다가 1인분을 추가했다. 부위는 갈비 한쪽, 목살 한쪽이다. 스테이크 수준의 두께에 격자무늬 칼집을 냈다. 굽기 전 양념을 맛봤더니 흐릿한 간장 맛에 과일의 달콤함, 양념 채소들의 상큼한 향이 적절하게 배합돼 있었다. 서빙 아주머니한테 이것저것 물었다. “양념은 주방장님의 노하우예요. 두께도 주방장님이 고집해 이렇게 두꺼운 거고요. 새로 오셨는데 이 메뉴에 대한 고집이 대단하세요.”
사실 돼지갈비는 서민 음식이라는 이미지 때문인지 싸구려 부위를 대충대충 양념해 파는 집이 대부분이다. 간장과 양념이 불에 타는 냄새만으로도 입 안에 침이 돌 정도이니 잘하는 집, 못하는 집 구별하기도 사실 어렵다. 그런데 이 집 돼지갈비는 고기를 발라내는 데도 일단 품격이 있고 맛에서도 절대 저급하지 않다. 1인분 맛있게 먹고 난 다음 주방 쪽을 보니 이렇게 써 있다. ‘목초액과 천연양념에 5일간 숙성한 돼지갈비’.
계산하고 나오는데 8시가 넘었다. 아직 소문이 나지 않았는지 식당 안이 썰렁하다. 맛없는 집이 더 장사가 잘되는 이상한 동네 일산이라지만 이 정도 맛이면 일산 사람들 호응을 얻어낼 수 있지 않을까 싶다.